39일 간의 파업이 끝나고 3주 후, 문화방송(MBC)에는 '조폭'이 나타났다. 이근행 언론노조 MBC 본부장, 오행운 <PD수첩> PD 해고 등 대량 중징계에 반발한 노조 집행부가 스스로 머리를 밀고 나타나 농성을 벌였다. 공개적인 '삭발식'도 없었다. 연보흠 홍보국장은 "각자 이발소에 가서 밀고 왔다"고 말했다. 7~8일 이틀새 삭발한 사람은 연보흠 홍보국장, 이세훈 교섭쟁의국장, 정의찬 기술부위원장, 나준형 보도부위원장 등 8명이다.
이근행 위원장은 안 깎았다. 파업 막바지에 무기한 단식 투쟁을 벌일 당시에도 "단식과 삭발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했던 그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삭발한 집행부를) 보면 무섭다"라고 농담하며 웃었다. 자신이 해고를 당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느긋함이 묻어났다. 삭발한 연보흠 홍보국장은 "2명이 해고되고 40명 가까이 중징계를 받았는데 회사가 아무 일도 없다는듯 굴러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MBC 노조는 재심이 이뤄지는 오는 11일까지 서울 여의도 MBC 사옥 곳곳에서 농성을 진행할 예정이다. 해고를 당한 이 위원장과 오행운 PD가 사옥 1층 로비에서 아침, 저녁으로 항의 농성을 벌이고 '무섭게' 삭발한 이들을 포함한 집행부가 사옥 10층 사장실 앞에서 농성 중이다. 많은 사원들이 이들의 모습을 보고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김재철 사장 역시 사옥 1층과 10층에서 농성하는 이들과 마주쳤고 외면했다.
▲ MBC 사옥 1층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이근행 위원장(앞 줄 왼쪽)과 삭발한 MBC 노조 집행부. ⓒMBC 노동조합 |
"지역 지부장들도 일괄 징계…MBC에 '독립 경영'은 없다"
MBC 대량징계 사태는 확대일로를 치닫고 있다. 조만간 MBC에서는 도합 100명 징계 기록이 세워질 예정이다. MBC 노동조합은 "지역 지부장과 집행부들에게도 조만간 중징계가 내려질 예정"이라며 "서울까지 합하면 징계인원만 1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MBC 노조는 "사측은 각 지역사 사장들에게 지부장들은 정직 2개월, 부위원장과 사무국장에게는 감봉조치를 내리라는 '형량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보복 징계를 독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레시안 : 파업 당시 '해고를 각오했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대량 징계를 예상하고 있었나?
이근행 : 당연히 노조 위원장을 하고 파업 투쟁을 하면서 (해고 등 중징계는) 언제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물론 이미 있었다. 그러나 현실화된 시점에서 다시 말하자면 나와 조합원들이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사측이 그런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연 경영진이 구성원들을 해고하고 징계할만큼 도덕적 우위에 서있는지, 해고의 정당성이 있는지 묻고 싶다. 당연히 인정할 수 없다. 김재철 사장의 징계는 지금 시점에서 자기 자신의 보신, 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신임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후배 언론인들을 '학살'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본사 MBC 뿐 아니라 지역 MBC에도 징계 지침이 내려졌다고 밝혔다. MBC 대량 징계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상황인데.
이근행 : 지역 조합원들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MBC는 서울의 본사와 계열사로 이뤄진 구조다. 당연히 계열사에는 독립적 경영권과 인사권이 보장된다. 그런데 지금은 본사에서 지침이 내려오고 지역사 사장이 모여서 징계를 맞추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독립적 인사권,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본사의 강압에 의해 징계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 경영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는가.
전국의 19개 지역 MBC 노동조합은 8일 공동성명을 냈다. 이들은 "각 지역사 사장들이 징계 범위와 수위를 사전 담합해 전국 공히 적용할 획일적 기준을 정해놓고 각 사별 징계 인사위원회를 진행시켰다"며 "이토록 명백한 절차적 부당함, 사규 위반의 증거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오행운 PD 해고는 야비한 계산에서 나온 것"
이번 징계 사태가 더욱 논란이 된 것은 오행운 <PD수첩> PD가 사내 게시판에 김재철 사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해고됐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논란이 커지자 MBC 경영진은 이미 삭제한 오행운 PD의 글을 유인물로 인쇄해 배포하면서 "사장에게 '후레자식', '호로자식', '건달잡놈'이라고 욕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인가. 이는 인격살인이자 언론테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제가 된 것은 김재철 사장이 노조 집행부를 고소·고발한 직후 오 PD가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이었다. 오 PD는 김 사장이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고소하지 못하는 이유를 "선친이 송사에 휘말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에 빗대 "부모 말씀 안 들을 때 쓰는 핵심을 찌르는 단어가 떠오른다"며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후레자식'의 뜻을 올려가며 집행부 고소·고발 사태를 비꼬았다.
프레시안 : 이근행 위원장이나 노조 집행부에 대한 중징계는 어느정도 예상됐다면 오행운 PD에 대한 해고는 정말 예상 외였던 것 같다.
이근행 : 오행운 PD를 해고한 것은 정말 '야비하다'고 생각한다. 오 PD를 해고한 배경에는 지금의 노사 대립 구도를 MBC 노조의 도덕성 문제로 국면을 바꿔보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본다. 소위 언론사에서, 언론의 자유를 목숨처럼 여겨야 하는 회사에서 해고가 있을 수 있는가. 김재철 사장의 사적인 보복일 뿐이다. 경영진은 김재철 사장의 사적 보복에 부화뇌동했다. 오 PD의 글이 '패륜적'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글이 더 패륜적인지 아니면 그것을 이유로 해고한 경영진이 더 비이성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것인지 생각해보면 당연히 후자다.
프레시안 : 이번 대량 징계가 나오자 MBC 노조에서는 '청와대와 철저한 사전 조율을 거쳐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징계자 명단이 먼저 나왔다는 정황도 제시했다.
이근행 :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명단이 먼저 나오고 5명 해고설이 나왔었다. 실제로 사측이 낸 인사 징계 통보서 등을 보면 5명을 해고하려 했던게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를 해고하는 문제는 진즉에 결정된 것 같고 오행운 PD 해고 문제를 두고 징계위 내에서 설왕설래가 있었던듯하나 이미 세부적인 징계 내용은 청와대에 다 직보되고 알려졌다. 그만큼 우리 경영진들이 청와대와 실시간 교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알던 김재철 사장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인정있고 소심한 사람인데,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저렇게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 야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소위 언론사의 수장은 심약하거나 휘둘리면 안된다. 김재철 사장은 MBC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최소한의 결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수장을 해야 언론사가 제대로 굴러간다. 김재철 사장이 악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론사 수장으로서의 자격은 많이 부족하다.
▲ 김재철 사장이 대량징계 사태에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는 MBC 노조 집행부 앞을 지나고 있다. ⓒMBC 노동조합 |
"지상파 3사 모두 언론의 위기 … 공동 행동 나선다면"
MBC 노조는 지난달 14일 파업 중단 선언을 하면서 "<PD수첩> 폐지나 단체협약 파기, 노조 집행부 중징계 등이 있을 경우 비대위 지침에 따라 총파업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량 징계가 나온 지금 당장 파업을 재개하기는 쉽지 않다. MBC 노조는 △조합 집행부를 비롯해 중징계를 받은 조합원들은 징계 무효화를 위한 법적 투쟁에 대비해 즉시 재심을 신청한다 △11일로 잡힌 재심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 행동 방안을 다시 논의한다는 비대위 지침을 발표한 상태다.
프레시안 : 파업 중단 당시 '집행부 중징계 등이 있을 경우 총파업 재개'를 이야기 했었다. 파업에 다시 돌입할 수 있을까?
이근행 : 파업과 같은 극단적인 투쟁은 여러 내외의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당장 파업에 돌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해고에 대해서는 재심은 절차상 거치는 과정이라고 보고, 크게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투쟁은 기나긴 과정이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긴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근행 위원장은 MBC와 한국방송(KBS), SBS 등 지상파 방송사 3사의 공동행동 가능성을 언급했다. KBS의 새 노조인 언론노조 KBS 본부(위원장 엄경철)는 사측과의 단체교섭 결렬 여부에 따라 조정이 진행되는 16일까지 파업 찬반투표를 진행하고 투표 결과에 따라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SBS 역시 지난 3월 90.9%의 압도적 찬성률로 파업안을 가결시켰으나 사측이 막판에 '콘텐츠운용위원회' 등을 설치하는데 최종 합의해 파업이 무산됐다.
이근행 : SBS와 KBS, MBC 3사가 내부적으로 언론으로서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똑같다. MBC는 파업했지만 KBS는 파업 준비 중이고 SBS는 결의했다 사실상 사측의 뒤통수를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파 3사의 공동 행동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2 지방선거 이후 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지상파 3사가 공동 대응에 나서면 상당히 정치적으로 파장이 크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권이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MBC 노조의 39일간 파업이 대규모 징계 사태로만 이어졌을 뿐 실질적인 성과가 없는, 한마디로 실패 아니냐는 말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근행 :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MBC의 경우 언론 노동자의 투쟁은 한번도 가시적인 실리를 얻은 적 없다. 우리의 모든 투쟁은 현실적으로는 패배였으나 역사적으로 승리였다. 우리의 39일간의 파업을 실패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단선적이고, 현실론에 실익에 기반한 평가라고 본다. MBC 구성원들이 보여줬던 발랄하고 치열한 투쟁, 일체의 분열도 없었던 일사분란함 등이 우리에게 엄청난 승리감과 자부심을 심어줬다. 어떠한 실질적 성과보다 오래 지속될 엄청난 성과가 됐다.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 MBC 노조 조합원들이 10층 사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MBC 노조 |
"6.2 지방선거 승리…민주당이 나서 언론 장악 사태 풀어야"
이근행 위원장의 단식 때 그의 초등학생 아들이 종종 화제에 올랐다. 이 위원장은 당시 트위터에 "제가 밥을 안 먹으니 처자식도 밥을 안 먹는다"며 "참으로 못할 짓"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위원장에게 "아들이 지금 해고된 상항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들이 아직 해고라는 말을 모른다"고 답했다.
이근행 : 일단 해고가 되면 본인도 본인이지만 가족들에게 주는 상처,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우리야 젊기도 하고 감당하기도 하지만 부모들은 두려워한다. 우리 어머니도 설명을 드리는데 손을 벌벌 떠시더라. 가슴이 벌렁벌렁하다고도 하셨다. 내 문제가 가족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족의 상처 등을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내 문제지 사회 문제는 아니지 않나.
대신 이근행 위원장은 '정치적, 사회적 해결'을 강조했다. 그는 "나에 대한 해고는 이 시대, 권력이 언론을 얼마나 야만적으로 다루려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증한다고 본다"며 "국민들과 언론이 마음을 급하게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민주당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근행 : 이번 선거에서는 야권이 승리했지만 작년을 돌이켜보면 민주당은 미디어 악법을 막기위해 나름 올인했으나 패배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의 신임을 받았다면 그 문제를 다시 풀어야 한다. 미디어 악법 무효와 KBS, MBC, YTN의 언론 장악 문제를 다시 정치적으로 이슈화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심판받고 버림받을 것이다. 목숨을 건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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