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계몽사상과 합리성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계몽사상과 합리성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30> 계몽사상의 재조명 ③

17세기 유럽인이 맞은 정신적 위기

계몽사상이 강조하는 이성과 합리성은 16세기 이래 유럽이 경험한 커다란 지적 변화의 산물이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를 크게 분열시켰다. 그 결과 근 천 년 이상 카톨릭 교회가 누려오던 절대적인 지적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또 16세기 이후 아메리카나 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유럽인의 시야는 크게 확대되었다. 성경이나 고전을 통해 알았던 세계는 이에 비하면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과학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서 본 우주는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과는 전연 다른 별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달 너머에 있는 우주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깨뜨린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어 왔던 모든 전통적 지식의 확실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제 모든 지식이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같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가 기존의 모든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재검토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수학의 공리와 같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원리 위에 지식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이 수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매우 중시한 것은 이렇게 수학이 가장 이성적이고 확실한 학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새로운 사조의 발전에 있어 데카르트주의의 역할은 중요하다. 데카르트가 거의 무신론적이며 기계론적인 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1640년대 말부터 널리 확산시켰다. 1650년대부터는 갈릴레오의 노력에 의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체계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1687년에 뉴턴이 발표한 만유인력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변화하는 지상계와, 에테르라는 물질로 만들어져 변화하지 않는 천상계의 둘로 나뉘어졌던 우주가 이제 중력의 법칙이라는 수학적 원리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큰 기계로 보는 생각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1700년경이면 지식인들 사이에서, 데카르트가 차지했던 자리는 뉴턴에게 넘어갔다.

기계론적 철학이나 세계관이 점차 확산되며 유럽은 17세기 중반부터 전례 없는 지적 혼란에 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믿는 전통적인 스콜라적 학문체계와 새로운 학문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럽인들에게 하나의 큰 정신적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이 17세기말에 계몽사상이 나타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서양사의 가장 결정적인 지적 변화의 시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

계몽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이다. 여기에서는 제임스 2세가 다시 친카톨릭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이 주도한 1688년의 명예혁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제임스 2세 (James II, 1633~1701)

이 혁명을 통해 영국은 절대왕정을 끝냈다. 다음 해의 권리장전을 통해 새로 즉위한 왕이 의회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그 사회적 기반은 좁지만 대의제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또 인신보호령(habeas corpus)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 자유와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관용도 허용받았다. 표현과 출판의 자유도 확보했다. 1695년에 책을 출판하기 전의 사전검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혁명에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존 로크이다. 그는 사회계약설을 통해 국가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으며 통치자가 위임된 것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인민에게 저항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민정부2론>은 교육 및 인식론에 대한 다른 글들과 함께 18세기에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프랑스에서 널리 읽혔고 계몽사상의 성경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나온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함께 미국독립과 네덜란드 혁명,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대륙의 지식인들은 이제 자기네 나라들이 영국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진 나라이고 불합리한 나라인가를 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의 계몽사상은 친영국적 풍조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영국이 그들에게 근대적이며 과학과 상업이 발전하고 이미 대의정부를 가진 선진국가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소개하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이 볼테르이다. 정부를 풍자했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있는 볼테르는 1720년대 말에 영국을 방문하고 쓴 <영국인에 관한 편지>에서 '모든 예술이 존중받고 보답을 받는 나라로 …… 누구나 굴욕적인 두려움 때문에 제지받지 않고 자유롭고 고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고 영국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뉴턴의 이론을 쉬운 말로 소개하는 데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가 다방면으로 개혁을 이야기하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그는 절대왕정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교황의 전횡이나 대중들이 가져올 사회적 불안정보다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1750년경이 되면 파리가 계몽사상의 수도가 되었다. 디드로나 루소 같은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볼테르의 뒤를 따르며 그것이 살롱이나 프리메이슨 조직, 각종 학회를 통해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독선, 교회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사회 안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며 프랑스 사회의 개혁을 외쳤다. 여기에는 금서 출판에 매달린 많은 출판업자들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주변국가의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계몽'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유럽적인 현상으로 만들었다.

계몽사상은 디드로가 주도해서 만든 백과사전 안에 집대성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계몽사상가라고 하면 이 책에 기고한 사람을 의미할 정도로 거의 모든 계몽사상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돌바흐, 튀르고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 디드로 (Denis Diderot, 1713~1784)

1751년에 첫 권이 출간되고 그 후 29년에 걸쳐 36권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최신의, 가장 합리적이고 계몽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총 2만5천질이 팔려 사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이 책을 '사탄의 성경'으로 몰아붙이며 금서로 만들려고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계몽사상은 18세기 마지막 4분기에 들어서면 보다 급진적이 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이에는 미국이라는 최초의 공화국이 출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80년대 말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할 때쯤이면 볼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은 이미 너무나 온건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근대 자연법과 자연권

계몽사상가들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자연법과 자연권을 발전시킨 것이다. 17세기에 그로티우스에 의해 근대적인 성격을 갖게 된 자연법은 계몽사상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인간의 공동적 삶을 위한 편의성이나 사회성에 기초를 두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만들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연세계가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사람들은 국가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자연법으로서의 국제법을 만드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이 승자와 패자에게 공통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권력의 새로운 정당화를 위해 동원된 자연법이 사회계약설이다. 국민의 의사라는 합리적 기반 위에서 국가권력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물론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은 그것으로 절대왕정을 옹호했지만 로크나 루소는 왕의 절대주의를 부인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상업의 자유도 자연법에 속했다. 그것이 다른 지역 사이에 유무상통하게 함으로써 거래 당사자들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타국을 자기 마음대로 여행하거나 교역을 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사유재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만드는 목적의 하나는 그들이 확보한 것, 또 확보할 수 있는 이익을 자신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이 자신의 소유를 방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유재산이 신성하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조세도 사회의 자연적인 일부로서 지배자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호이익과 자기보존을 위한 것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것의 일부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는 것은 전체 사회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서이지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가치도 자연법에 속했다. 아름다움은 재산의 소유가 공리성을 만드는 것과 똑 같이 주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결정짓는 자산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고전 경제학에서 균형과 공리성이 중요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는 비례, 균형, 세련이 중요했다. 이외에도 많은 자연법들이 만들어졌다.

자연법의 발전과 함께 자연권 사상도 발전했다. 기존의 권력이나 종교, 관습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자연히 개인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누구에게도 침해 받아서는 안 되는 본래적인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처음 종교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신앙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인신(人身)의 자유라는 생각도 차츰 성장했다. 독립한 미국의 권리장전에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자연권이 들어간 것이나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연법과 보편성

근대 자연법과 자연권의 발전은 서양 근대사회의 기초로서 매우 중요하다. 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유럽 전체에 걸쳐 국가,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려는 수많은 제안과 시도들이 나타났다. 행정, 관세, 의회, 유대인의 조건 개선, 교회와 학교의 개혁, 축산 방법의 개량 등 갖가지 주제가 포함된다.

또 가장 혹독한 것으로 생각된 재판과정에서의 고문이나, 증인도 없이 할 수 있는 종교재판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에 고문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도 18세기 말에는 이를 뒤따랐다. 마녀사냥은 영국에서는 1712년에, 프랑스에서는 1718년에, 독일에서는 1749년에,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1782년에 금지되었다.
▲ 중세 말 마녀 사냥. 이단자로 판결이 되면 마녀로 몰려 화형이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이는 특히 비서양 세계에 대해 그렇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사유재산권은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근대초의 재산계급의 이익을 잘 대변한 것이다. 따라서 유산계급에게는 유리하나 무산계급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비서양세계에 적용될 때이다. 로크나 후대의 자연권론자들은 유럽인의 사유재산권은 신성시했으나 비유럽 사람들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메리카의 경우에 그 논리는 거꾸로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박탈하는 데 이용되었다.

자연법으로서의 상업의 자유는 유럽인들의 통상확대에는 도움이 되는 논리였지만 비유럽인에게는 제국주의적인 논리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다른 나라에 가서 문호개방과 통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했다.

인간의 몸의 미학적 가치도 18세기 말이면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종적, 사회적 위계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흰 피부, 두개골의 모양, 인체의 비례가 사람들의 미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자연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의 자연법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매주 수, 금 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