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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의 극단화와 유대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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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의 극단화와 유대인 학살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7>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④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인종주의적 사고를 전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체임벌린(H.S.Chamberlain)이다. 그는 영국 출신이나 독일로 귀화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로 나중에 오페라 극작가로 강한 인종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리햐르트 바그너의 사위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체임벌린은 인종의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이므로 인종적인 혼혈을 피하고 우월한 인간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문명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피가 섞여지면 그 창조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인종인 아리아족이 갖고 있는 피의 순수성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켜져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 군인다운 정신과 창조적인 힘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右)체임벌린 (H.S.Chamberlain, 1836~1914) (左)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1883년)

순수 혈통에 대한 체임벌린의 이런 맹목적 집착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국가나 민족내의 다른 인종, 또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행위를 공공연히 부추기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안에서라도 정신적, 유전적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인위적 제거를 주장하는 우생학(eugenics)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점점 극단화하며 그 사악성도 점차 노골화한다.

그리하여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 이전에 인종주의적 선동은 이미 유럽의 각 나라에서 광범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었다. 인종이라는 생각이 그 당시 사람들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가 갖고 있는 강한 인종주의적 태도는 그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결코 그가 동떨어진 사람은 아니다.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등장

인종주의가 한창 위세를 부리던 1870 - 8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적 반유대주의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에 유럽 각국은 자유주의가 발전하며 자기 나라 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 사회 안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유럽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곧 사업이나 자유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두려워하고 시기함으로써 새로이 반유대주의가 불붙은 것이다.

이는 1881년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2세의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박해를 받은 러시아 지역의 유대인이 대거 서쪽으로 이주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러시아 서부와 폴란드의 농촌 지역에 살던 많은 무식한 유대인들이 서, 중부 유럽의 도시들에 넘쳐나며 유럽인들의 반감을 불러 온 것이다. 이렇게 1880년대부터 발전한 반유대주의를 근대적 반유대주의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셈 인종으로 분류되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유대교를 믿는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성격, 또 다른 문화와 관습을 가졌다는 의미에서의 문화적 인종주의의 성격을 넘어선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했거나 유대교를 버리고 완전히 세속화된 사람들까지도 피를 따져 박해 대상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즉 생물학적인 인종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1890년대까지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가 동, 중부 유럽뿐 아니라 서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힘으로 발전했다. 많은 반유대주의적 정당, 결사, 선전기구가 생기며 반유대주의가 제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20, 30년대의 대대적인 확산을 통해 결국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예비하게 된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

히틀러가 이끈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반유대주의도 특히 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쟁 전과 전간기(1919-1939)의 반유대주의는 유럽 전체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지, 독일만의 특별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틀러의 정치 전략에 있어 반유대주의가 사소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의 핵심요소였다. 히틀러는 세계사를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인종들 사이의 끝없는 생물학적 투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아리아족의 유럽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유럽의 주된 적은 국제적인 유대인 집단이었다. 국제적 금융자본주의와 국제적 사회주의가,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나아가 뒤집어엎으려는 유대인들의 두 핵심 무기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유대인들이 조종한다고 믿은 볼세비즘을 아리아 인종의 주된 위협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독일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을 침공하고 동유럽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학살이 계획된 것 같지는 않다. 1933년에 나치당(NSDAP)이 집권하고 나서 1935년 이후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과격해지기는 했으나 전쟁 전까지는 그들을 독일인과 격리시키고 박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의 폴란드 침공과 그에 따른 2차 대전의 발발은 유대인의 존재를 독일의 민족적(또는 인종적)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1941년에 독일군이 유대주의-볼세비즘 음모의 본거지로 생각된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폴란드 동부, 루마니아 북부, 소련 서부의 유대인 거주지역이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 가운데에서 유대인에 대한 격리정책은 급격하게 절멸정책으로 바뀌었고 결국 전 유럽에 걸쳐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저질러진 홀로코스트는 중세 이래의 종교적·문화적 인종주의, 생물학적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의 여러 성격들이 혼합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고집하는 전통적인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문화에 동화되어 유럽인과 구별할 수 없는 유대인마저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혈통이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이 아시아적 야만?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규모도 규모지만 그 비인간적인 방법과 잔인성에서 전대미문의 것이다. 특히 사람의 신체를 원료로 여러 물품을 만든 데 이르면 인간의 행위라고 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철학과 음악의 나라라고 인문주의적 교양을 뽐내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고 보면 입을 다물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2차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세계의 비판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독일이 일본과 달리 그래도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도 80년대에 들어오면 조금씩 달라진다. 독일 사회의 우경화와 함께 과거의 죄과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둘러싼 80년대의 소위 '역사가논쟁' 가운데에서 우익역사가들은 홀로코스트를 독일의 특수한 사례라기보다 현대문명의 병리현상이라고 강변한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가 저지른 사건을 포함하여 20세기의 수많은 학살사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우익역사가는 홀로코스트를 '아시아적 야만'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런 일은 야만적인 아시아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유럽 문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유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참으로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저지르기는 자기네가 저지르고 책임을 아시아에 떠넘기니 참 어린아이 같은 정신 상태라고 하겠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아직도 미국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유대인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론매체나 영화를 이용하므로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비아냥도 듣는 이런 지속적인 '홀로코스트 때리기'에는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의도도 숨어 있다. 유대인을 역사의 피해자로 계속 선전함으로써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켜 팔레스타인인을 지속적으로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만을 보아도 이렇게 잔인한 학살을 당한 것이 유대인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프랑스가 알제리 등 다른 식민지에서, 독일이 나미비아 등지에서, 벨기에가 콩고 등지에서 저지른 학살은 그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 유대인 학살과 똑 같은 것이다. 다 인종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대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소결 : 인종주의는 서양문명의 본질

그러면 인종주의와 서양문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해 그리스인들이 후대의 인종주의에 직접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그 빌미를 만든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후대의 인종주의자들이 그들을 두고두고 우려먹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독교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교도에게 가한 종교적 박해와 차별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와도 연결되며 그것이 특히 반유대주의와 관련하여 현대에 와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고 아프리카인의 노예화와 식민지배를 옹호하며 유럽과 미국을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었지만 비 백인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함을 안겨 주었다.

이런 점에서 인종주의는 서양문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근대 서양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이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의미에서 보편성을 내세우며 자유와 평등, 인권, 평화와 같은 고상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참으로 위선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과 인종주의는 전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인종주의가 앞으로도 짧은 시일 안에 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문제이다. 사라지기는커녕 90년대 이후 서양 각국에서 우경화 현상이 강화되며 인종주의도 더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비백인에 대한 차별이나 폭행, 살해사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정보통신과 매스 미디어의 발전으로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나 그 속도만큼 다른 인종,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과 멸시가 빨리 사라지고 있지는 않다. 사실 지구상의 힘의 우열이 서양인들에게 우세하게 전개되는 한 그들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극복은 아직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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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한 달간 쉽니다

그 동안 제 글을 열심히 읽고 관심을 보여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생소한 이야기도 있고 해서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려는 것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기존의 서양 중심 세계사 인식 체계를 바꾸는 것이라 그것은 당연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요.

그러나 제 이야기들이 아무 근거 없이 하는 것도 아니므로 일리는 있다는 정도로 받아 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연구의 한계도 있고 이 작업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당장 모든 체계를 다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급하게 쓰느라 마무리가 좀 덜 된 글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은 곧 고쳐서 올려놓겠습니다. 또 댓글을 통해 질문하신 분들에게 답변을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것은 질문한 분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댓글문화라는 것이 걸핏하면 욕설이 난무하기 때문에 그런 일에 아예 얽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신이 나야 하는 것이니 여러분께서도 그 점을 좀 이해해 주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또 오류를 지적하여 고치게 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제가 겨울방학 동안에 개인적인 일정으로 3-4주 동안 부득이 연재를 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프레시안 연재에는 15-16개의 주제를 다룰 예정이니 이제 절반 정도를 마친 셈입니다. 아직도 한 석 달 가량 더 연재를 해야 합니다. 설을 즐겁게 맞이하시고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강 철 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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