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차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1945년 8월 패망 직전까지 북한의 흥남(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바다 속 폭발실험까지 마쳤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 흥남에서 원폭 개발해 전세 역전 노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오는 12일 방영되는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일본의 원자폭탄개발’(기획 김환균, 연출 박건식) 편에서 이같은 주장을 제기할 예정이다.
제작진이 일본의 ‘북한 흥남 원폭개발·실험’을 제기하게 된 배경은 최근 미국의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이 문제에 천착해온 윌콕스(‘전쟁의 비밀’ 저자) 씨에 의해 1947년 연합군사령부(GHQ)의 관련 기밀 정보보고서가 발견됐기 때문. 당시 미군 세실 중령이 작성해 ‘세실보고서’로 불리고 있는 이 보고서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북한의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세실보고서’는 이에 앞서 1946년 10월 3일자 미국 <애틀란타신문>에 실렸던 한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애틀란타신문>은 당시 “미 범죄 수사국 요원이었던 데이빗 스넬이 종전직후 일본 장교 와카바야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정보가 입수됐다”고 보도했다. 나중에 ‘스넬보고서’로 이름 붙여진 와카바야시 신문내용에는 “1945년 8월 12일 새벽, 흥남 앞바다에서 섬광과 버섯구름을 동반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결국 미 정부는 이러한 보도가 있은 직후 흥남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벌인 결과 이듬해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비밀리에 실험을 마쳤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연합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또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 이외에도 1944년 영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독일제 장거리 미사일 V1, V2 생산을 ‘NZ’라는 암호명으로 진행해 왔다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나중에 암호명 NZ는 히틀러의 원폭개발계획과 같은 이름이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제작진은 여기에 당시 흥남에서 생산 공장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증언도 덧붙이고 있다. 당시 흥남공업학교 학생으로 관련 공장에 자주 파견실습을 나갔던 문봉수 씨는 “보통 공장과는 달리 원자력 공장처럼 사방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었다”며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고성능 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당시 공장 연구원이었던 최기선 씨는 전후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원폭개발 핵심 멤버였던 유가와 히데키가 일단의 일행들과 자주 흥남에 출몰했다고 증언했다.
여기다가 종전 직후 연합군사령부 원폭조사단 일원이었던 미국인 레온 톰슨 씨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을 통해 원자폭탄 설계도를 볼 수 있었고, 정확한 지명은 생각나지 않지만 북한의 어딘가에 일본군부가 최대규모의 시설을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흥남, 전력 등 모든 여건 원폭 개발 최적지**
일본이 자국이 아닌 북한의 흥남에 원자폭탄 개발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진은 당시 일본 본토의 사정과 흥남의 지리적 여건 등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으나 1942년 5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급해진 일본은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고, 군부는 일본 과학계의 최고 석학인 니시나 요시오 박사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지시하게 됐다.
이에 니시나 박사는 도쿄대 이화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니호연구’로 불린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 마침내 입자가속기를 통해 우라늄 원석에서 원자폭탄의 재료인 우라늄235를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우라늄은 독일을 통해 잠수함으로 대량 수입됐다.
하지만 1945년 3월 미국이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면서 사정은 여의치 않아졌다. 원자폭탄 개발의 중심이었던 이화학연구소도 B-29 폭격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파괴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대비해 도쿄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이시가와라는 마을에 별도의 연구소를 지어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한편으로 일본은 북한의 흥남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흥남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포항이나 창원과 같은 대단위 공업도시였다. 흥남은 1940년대 정점을 이뤄 총 부지만 6백만평에 종업원수만 4만5천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흥남은 또, 압록강 수계를 개발해 모두 3백20만㎾의 전력사용이 가능했다. 이는 일본 본토 전력사용량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다. 전력은 원폭개발에 있어서도 필수조건이었다.
미국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해 1945년 2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흥남일대를 정찰한 뒤 주요 공격 목표물로 삼았고, 나중에 흥남이 북한과 소련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자 한국전쟁 때 흥남을 초토화시켰다.
연출을 맡고 있는 박건식 PD는 “일본은 겉으로 지구상 최초이자 최대의 피폭 피해국임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7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수상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은 핵무장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이제는 준핵보유국으로서 90일 안에 얼마든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며 “일본이 북한 핵문제를 활용해 핵무장을 서두르고 있는 시점에서 이같은 일본의 두 얼굴을 보다 쉽게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잊혀진 과거를 되새겨 보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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