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우리는 '용서와 화해'로 간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우리는 '용서와 화해'로 간다"

[구림 이야기] 6·25 좌우학살의 자발적 정리와 '화해의 탑' 건립운동

한국전쟁 기간 중 한 마을 안에서 좌익 또는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숨진 양민들의 원혼을 함께 위로하고 화해의 기풍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반세기 만에 해당 마을의 주민들에 의해 직접 추진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이 같은 움직임은 현재까지 이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고통스런 기억'을 더듬어 과거사를 재구성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합동위령사업을 계획하는 등 '자력(自力)'에 의한 과거사 정리 시도라는 점에서 타 지역의 움직임과 일정부분 궤를 달리한다.

***'비둘기 마을', 반세기만에 역사를 기록하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鳩林) 마을' 주민들이 그 주인공이다. 월출산의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최근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리북 펴냄)이라는 제목의 마을이야기 책을 주민들 스스로 집필하고 편집해 4월 7일 공식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비둘기 숲…〉이 주목되는 이유는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전적으로 리(里) 단위의 지역주민 및 출향민들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기간 중 좌우익 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주민 137명 가운데 현재 이름이 확인되는 98명 전원의 실명과 그 학살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 '공동의 신원(伸寃)'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희생자 명단 가운데 우익(군경 등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주민 70여 명의 명단은 이 마을 내부에서도 반세기 이상 공개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면서도 '금기'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비둘기 숲…〉의 머리말은, 경우에 따라선 전혀 되살리고 싶지 않았을 아픈 기억을 주민들 스스로 다시 불러오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특히 이 책의 발간과 함께 구림 사람들은 우리 민족 모두가 피할 수 없었던 근현대사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뜻깊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6ㆍ25를 전후한 갈등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당한 분들의 영령을 달래주며, 그 동안 슬픔을 묻어두고 살아 왔던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계기가 될 '사랑(평화)과 화해의 위령탑'을 건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이 역사의 기록을 넘어 화해와 평화의 기운을 만들어간다면 또 하나의 큰 성과이자 보람이 될 것이다."

***"좌우익에 의한 희생자 137명을 '함께' 위로하고 화해하자**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책의 발간이 제1단계의 '화해와 용서 작업'이라면 제2단계로 위령탑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대목이다. 현재 구림 마을에서 검토되고 있는 위령탑 건립 방안은 좌익에 희생된 주민들과 우익에 희생된 주민들의 명단을 하나의 합동위령탑에 수록해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화해와 평화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서 구림지 편찬위원회의 회장을 맡았던 최철종 씨는 이와 관련해 "이 책이 나온 뒤 위령탑을 건립하는 등의 본격적인 화해 작업은 전적으로 새로 구성되는 조직체가 맡게 될 것"이라면서도 "좌익에 죽었건, 우익에 죽었건 억울하게 죽은 양민이라면 그 명단이 함께 위령탑에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같은 판단의 저변에는 '좌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우익,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좌익이라는 고정관념에 마을 주민들 스스로 묶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학살의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학살자들 가운데 일부 해당 진영 활동가의 가족이 극소수 포함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학살을 설명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거니와 객관적인 사실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이미 좌익에 의해 희생된 28명의 군경 가족 및 기독교인에 대한 위령비가 2개(1976년에 건립된 '순절비'와 2000년에 건립된 '순교비') 세워져 있다.

***'합동위령비' 건립, 어떻게 할까?**

구림지 편찬위원회는 4월 7일 이 마을의 유구한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400여 년 전통의 대동계(1565년ㆍ조선 명종 20년 출범) 계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 자리가 향후의 합동위령비 건립사업과 화해의 조치를 논의하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구림 마을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합동위령사업의 수순은 △양민 희생자 합동유족회 및 합동위령사업추진위 구성 △구림지편찬위원회로부터 자료 및 잔여 재원 인수 △위령사업의 내용 협의 및 재원 마련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구림지 편찬사업에서 구림 현지의 자료조사 및 진행 책임을 맡았던 최복 씨는 "이제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산 사람들의 화해 작업에 시동이 걸린 것은 분명하다"면서 "다만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어 이 사업이 마무리되려면 2,3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같은 시도는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자발적으로 치유하려는 현대사 초유의 노력으로 꼽힐 수 있겠지만 현재 목전에 두고 있는 과제들이 사실 만만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화해'가 가능할까?**

우선 위령사업 대상자들의 범위가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당초 구림지 편찬사업을 구상했던 인사들이 생각했던 것은 〈비둘기 숲…〉에 실린 것과 같이 좌우익 활동에 가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 그대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만을 거명해 위령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6ㆍ25를 전후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좌익(유격대 등) 또는 우익(군경, 대한청년단 등) 활동을 하다 숨진 사람들의 영령까지 위로할 수 있어야 '완전한 위령과 화해'가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집계는 없으나 구림지 편찬 과정에서 자료를 수집한 관계자들은 그 숫자도 대략 양민 희생자 숫자 정도 된다고 보고 있다. 이 두 그룹을 합칠 경우 이 마을에서 6ㆍ25를 전후한 시기에 좌익 또는 우익에 의해 숨진 사람들은 모두 25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무렵 이 마을 주민들은 대략 900여 가구에 4000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희생자의 숫자는 전체 마을 주민의 6% 이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적극적 좌우익 활동을 하다 숨진 사람들을 위령의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문제에서 일부 제동이 걸렸다. 예컨대, "상대방 또는 양민을 학살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사람까지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거나 심지어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우리 가족의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특히 좌익 쪽의 '적극 활동자' 유가족 중에는 아직 "그런 일을 굳이 기록에 남기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비둘기 숲…〉은 역사적으로 큰 걸음을 내디뎠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완의 작업'임이 분명하다. 편찬위의 한 관계자는 "그 분들의 이름을 이번 책에 넣지 않은 것을 이 책의 한계로 보기보다는 앞으로 보다 완전한 화해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들이 서로서로 설득하고 상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평화를 위하여**

두 번째로는 위령사업의 재원 역시 앞으로 해결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미흡하지만 우리 손으로 직접 과거사를 정리한 만큼 후속 작업도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마을이야기책을 펴내는 데에 수천만 원이 들었다면 후속사업에는 단위가 다른 재원이 필요해 고민스러운 게 사실이다."

마을 관계자들에 따르면, 〈비둘기 숲…〉의 편찬에는 이 마을을 구성하는 6대 성씨의 문중과 대동계, 송계 등의 조직이 모두 기꺼이 재원을 염출했고 그밖에 개인적으로도 많은 인사들이 참여했지만, 위령사업은 아무래도 그 대상자는 줄어드는 반면 예산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국가에 일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3일 제주도의 4ㆍ3위령제에 참석해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헤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줘야 한다"면서 "이것이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언급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노 대통령이 이날 국민적 공감대 속에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분야로 언급한 대목에는 추모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림지 편찬위의 한 관계자는 "우리 마을의 경우 과거사 희생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정부 등 제3자의 힘을 빌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고 전제하면서 "추모사업에 일부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 대목 역시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해결한다는 정신으로 일단 일을 진행시키면서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새로운 역사는 '2세'들의 몫**

세 번째 과제는 이번에 출판된 〈비둘기 숲…〉의 과거사 부분을 보완하고 보다 의미있는 내용으로 확충하는 작업이다.

이번 구림지 편찬작업과 관련해 "과거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면서도 반세기 전의 아픈 기억을 공연히 들춰내 또다른 고통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 한 편찬위 관계자의 토로다.

따라서 이번에 출판된 구림지의 기술은 6ㆍ25 기간에 학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거나 들었던 당대인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기술하되 가해자를 명시하기보다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건 개요를 보여주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향후의 보완작업은 2세들이 중심이 되어 10년 또는 20년 뒤의 출판을 목표로 '적극적 좌우익 활동'의 내용까지 채록해 '완전한 화해'의 토대로 삼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 마을의 '젊은 층', 다시 말해 6ㆍ25 이후에 태어난 50대 후반 이하의 세대가 대개 생각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해의 탑'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화해다"**

이제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린 구림마을의 과거사 정리 및 화해 작업이 이같은 과제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며 최종 종착점에 이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구림지 편찬위의 최철종 회장은 이와 관련해 "화해의 탑을 세워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세워나가는 과정 자체가 화해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박스 시작〉

***구림…'마을 공동체'의 자긍과 위기와 부활**

구림 마을은 일반적으로 한 마을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와 전통과 공동체의식을 훌쩍 뛰어 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현재의 구림 마을은 전남 영암군 군서면의 동ㆍ서구림리와 도갑리 등 3개 지역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반촌(班村)이다. 월출산 자락의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이 마을은 길게 보면 2000년 전의 마한 시절(선사유적지)부터, 적어도 1000년 전 통일신라 시기에 대당 무역항(상대포)으로 상당히 번성한 지역을 이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된 역사에 처음 이름을 남긴 이 지역 인물은 백제 시대의 왕인(王仁ㆍ373~?) 박사다. 그는 이 지역의 성기동에서 태어나 마을 입구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해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4월 8일부터 이 마을에서는 제10회 왕인문화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린다.

그 다음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도선(道詵ㆍ827~898) 국사다. 그 역시 이 마을 출신으로 월출산의 도갑사를 창건한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월래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아기 도선을 비둘기들이 와서 보호했다는 설화에서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최근엔 마을 내의 불뭇등이라는 지역에서 이화여대 박물관 팀에 의해 8, 9세기의 가마터들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로 유약을 바른 도기(陶器)를 생산해낸 곳으로 추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전통은 조선 중기인 1545년 임구령(林九齡)이 지남제(指南堤)를 축조해 1000여 두락의 농토를 조성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1565년 향약 성격의 주민자치조직 대동계(大洞契)를 창설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4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이 대동계는 80여 명의 계원을 중심으로 마을의 대소사에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살아 있는 조직이다.

대동계를 비롯해 이 마을 각종 조직의 기틀이 되어 온 4대 성씨(낭주 최씨, 함양 박씨, 창녕 조씨, 해주 최씨) 또는 6대 성씨(4대 성씨에 선산 임씨, 연주 현씨 포함)는 그 동안 제각기 중요한 문장가와 학자들을 배출했으며, 지금도 '견제와 협력'의 마을 전통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특히 6ㆍ25전쟁 기간 중 당시 이 마을이 갖는 시공간적 특수성 때문에 큰 학살 사건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그 정도에서 멈추고 그 이후 반세기 이상 마을 내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들이 큰 말썽 없이 얼굴을 맞대고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같은 공동체 정신과 독특한 '사회적 용인'의 분위기가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스 끝〉

***구림의 독특한 시공간이 만들어낸 대형 참사**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구림 마을에 유독 양민 학살자들이 많았던 데에는 몇 가지 시공간적인 배경이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구림이 월출산이라는 호남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험준한 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1950년의 9ㆍ28 서울 수복 이후 영암 이남, 즉 목포 무안 등 타 지역의 인민군과 좌익들이 후퇴 또는 월출산 입산을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10월 초 이들이 떠난 뒤에는 20~30명 규모의 청년들로 구성된 비무장 자위대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지만 국군과 경찰은 월출산 지역 유격대(수위 빨치산)의 기습이 부담스러워 그해 12월 15일까지 구림 지역을 수복하지 못했다.

결국 9월28일부터 12월15일에 이르는 과도기, 즉 '인공(人共)'도 아니고 '수복(收復)'도 아닌 미묘한 두 달 반의 기간 동안 좌우익의 일진일퇴가 계속되는 가운데 크게 두 차례의 대량 학살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 학살극의 가해자 역은 좌익(유격대) 또는 우익(경찰) 세력이 번갈아 가며 맡았지만 피해자 역은 온전히 구림 마을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좌익측의 집단학살에 대해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은 "인민군 잔존세력 일부와 인공치하에서 활동했던 이성을 잃은 공산 유격대 일부가 우익 쪽에 가까운 군경 가족이나 인공치하에서 반동으로 모함 받았던 사람과 기독교 신자를 잡아 들여 10월 7일 지와목에 있는 김기준 소유 주막에 가두고 불을 질러 교인 6명을 포함하여 28명이 사망하는 잔인무도한 참상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이로부터 꼭 열흘 뒤인 10월17일 우익측에 의해 96명의 주민이 집단학살된 사태와 관련해서 〈비둘기 숲…〉은 당시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서 직접 목격한 참상을 상세히 전하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양민들이 좌익 세력들에 의해 가족이나 친지가 희생당한 경찰의 분풀이와 복수의 제물이 되어 죽어갔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진술은 '기억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 생생하게 표출되면서도 감정에 흐르지 않도록 자제한 흔적이 역력하다.

〈비둘기 숲…〉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가운데 "규범이나 법이 얼마나 무력하고 허무한 장식품인가를 6ㆍ25전쟁 때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면서 "6ㆍ25전쟁 전후를 통한 공포 분위기는 예리한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말 한마디 빗나가거나 눈 한번 잘못 떠도 좌우를 막론하고 힘 있는 자들의 비위를 거스른 행위로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갈림길이었다"고 상황을 요약했다.

다음은 〈비둘기 숲…〉에 수록된, 6ㆍ25를 전후한 시기의 양민 학살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하 글자 색깔 달리해주세요. 갈색?〉

***6. 월출산의 마지막 빨치산**

***월출산의 빨치산 활동**

1946년 6월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공언한 이후 좌익세력은 더 조직화되고 활동범위를 넓혀 갔으나 1947년 3.1절 주암집회의 발포사건 이후 탄압이 심해지고 마을에서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47년 7월경 영암 이봉천 등이 은신처를 월출산으로 옮겨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무장 투쟁의 길을 택하면서 월출산 유격대(빨치산)가 탄생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일제 때 사용하던 38식, 99식 등 빈약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월출산을 중심으로 4~8㎞ 범위 내외인 영암, 덕진, 신북, 군서, 도포, 학산, 서호, 미암 등에서 선전과 조직 확장에 주력하고 식량이나 일용품을 조달해 갔으나 경찰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과격해져 갔다. 이런 와중에 경찰이 동계마을 뒤 냇가 둔치에 마을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좌익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열일곱 살의 어린 동생을 '좌익 활동하면 가족도 이렇게 된다'고 하면서 공개 총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빨치산(유격대)들은 월출산을 근거지로 밤에만 마을에 나타난다고 해서 밤손님이라 불렀는데 마을사람들에게 식사 제공이나 협력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는데 실제 1948년 말 경 도갑사 주지가 피살되고, 서호정 최규태, 동계리 최윤호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해서 빨치산의 활동이 심해져 학암 황산에 있던 경찰지서는 돌과 흙으로 축대를 쌓고 호(壕)를 사람 키보다 깊게 돌려 파고 대발을 이중으로 둘러쳐 방패막이를 했으며 경찰은 밤이면 지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빨치산이 활개치고 다니는 세상이었다. 3일이 멀다하고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경비전화 전신주를 자르고 전화선을 절단하니 마을별로 책임 구역을 정해 밤마다 전신주 하나에 두 사람씩 경비(야번)를 섰으며, 만일 전신주가 잘리면 경비책임자는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마을에서 돈을 걷어 복구했다.

실제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인 1948년 5월 10일(영암 무투표 당선지구) 죽정마을 담당구역 경비전화 전신주가 잘려 경찰관 3~4명이 공포를 쏘며 마을로 찾아와 전신주의 배상과 복구를 요구함으로써 마을의 좋은 일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당시 이장 최성규(崔星奎ㆍ당시 26세, 1923년생)가 전신주의 배상과 복구를 약속하고 점심대접을 한 후였는데 동석했던 기동경찰의 총기 조작실수로 오발사고를 내 이장 최성규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여 장례를 면민장으로 치르는 일도 있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발생하고 48년 10월 19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에 대기 중이던 14연대의 육사 출신(3기) 김지회(金智會) 중위 일당이 '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며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고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국군의 토벌작전으로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후퇴하는 도중에 도갑(道岬), 동구(洞口) 출신으로 번개같이 빠르다고 '번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이성률(李成律ㆍ하사)이 1개 분대의 반란군 병력을 이끌고 월출산 유격대에 합류함에 따라 무기도 칼빈과 M1소총으로 바뀌고 세력도 막강해졌다. 경찰지서는 물론 경찰본서가 습격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국군 20연대 1개 중대가 영암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9년에는 미암 지서가 빨치산에게 습격당해 무기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하여 미암으로 지원 나가는 군인들이 성양리 저수지둑에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에게 기습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구림마을에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노소 모두를 끌어내서 회사정 뜰에 모아놓고 노인들에게 이놈저놈하고 행패를 부리고 조OO, 최OO의 배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두들겨 패고 부녀자들이 보는 앞에서 남자 두 사람을 발가벗겨 조리를 돌렸다. 젊은 사람은 무조건 구타했으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고, 기록에 남길 수 없을 정도로 만행을 서슴지 않아 '괘씸 부대'라고 불리고 마을사람들에게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깊어지고 거리는 멀어져 갔다.

도갑산 홍개골에서는 현영삼이 지휘하는 빨치산이 경찰 기동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8~9명이 사살되었는데 구림사람은 박OO 등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밤에는 빨치산에게 시달리고 협박당했으며, 낮에는 경찰의 조사와 감시는 물론, 부역을 강요당하고 마을 이장들은 순찰 경찰이나 의경에게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하고 잡부금 걷는 것이 일과였으며, 때로는 마을 단위로 지서에 야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념이나 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죽어라 일만 하던 평범한 마을사람들 가운데 식사제공이나 식량을 요구하는 빨치산의 청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중에는 빨치산에 동조한 사람도 간혹 있었겠지만 모두가 순수한 농민이었으며 바람 부는 데로 쓸리는 민초들이었다.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하여 마지못해 한 행동들이 빨치산에게 동조한 범죄자가 되어 빨치산 가족과 함께 보도연맹원이 되어 지서 아래쪽에 천막을 치고 집단 거주시켜 빨치산 습격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집단 거주 지역 밖으로 나갈 때는 허가를 받고 외출해야 했고, 다행히 천막살이를 면한 보도연맹원들도 지서에서 비상경보(싸이렌)가 울리면 논, 밭에서 일하다가도 내팽개치고 지서로 달려가야 했다.

한편 빨치산들은 모병을 한다면서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산할 것을 설득하고 강요하며 협박하는 일도 생겨 이를 피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도시로 피신하거나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일도 있었다. 정부수립 후 수십 차례의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점차세력이 약화되어 몇 사람 남지 않은 빨치산 잔존세력은 금정면 깊숙한 산속으로 숨어 버렸다.

***월출산 마지막 빨치산의 최후**

1950년 3월 하순, 즉 6.25전쟁 3개월 전 월출산에서 마지막 빨치산 활동을 하던 세 사람이 주지봉 밑 주재골 중턱 바위 뒤에서 아침 9시까지 잠에 취해 누워 있었다. 이 때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주재골 골짜기를 올라간 남송정 박OO가 빨치산과 마주쳤다. 서로 당황하고 놀라서 나무꾼은 얼굴이 백지장같이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의 빨치산이 이 사람을 살려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대장인 구림 출신 최OO이 '이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고 절대 신고하거나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설득해 신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살려주었다. 나무꾼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기를 망설이다가 나중에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발각될 때의 후환이 두려워 마을로 돌아와 경찰지서에 신고하고 말았다.

영암경찰서 기동대가 출동하여 주재골 골짜기를 완전히 포위할 때까지도 빨치산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다가 경찰이 집중 사격을 가하니 포복으로 도주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두 사람은 50m도 못 가서 죽고, 대장은 100여m 더 올라가다 죽었다. 처음 잠을 잤던 자리에는 운동화와 간이식기 등 일용품이 널려 있었고, 총의 개머리판은 바위에 부딪치고 나무에 씻기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끌고 다녔는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으며, 죽은 빨치산 한 사람은 여자였으며 발에는 절이나 성황당에 걸려 있는 울긋불긋한 천으로 발을 싸매고 있었다. 이것이 월출산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빨치산의 최후 모습이었다.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까운 청춘을 바치고 비참하게 죽어갔을까?

***7. 민족의 비극 6.25전쟁과 구림**

***경찰의 철수와 인민군의 점령**

1950년 7월 27일 정오 경 구림 북동쪽에서 기관총소리와 소총소리에 대포소리가 간간이 뒤섞여 한 시간 가량 계속 들려왔다. 이 소리는 인민군이 영암에 발을 들여놓은 신호탄이었고, 인민군이 영암에 들어오기 전인 7월 23일 군수를 비롯한 영암유지와 가족들 약 70여 명이 영암호(해창-목포를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를 이용하여 목포 쪽으로 피난가고 경찰은 7월 24일 해남, 완도 쪽으로 모두 철수하니 군청과 경찰서는 물론 영암읍은 무주공산이었다. 해남으로 철수했던 경찰이 7월 26일 밤, 다시 영암으로 되돌아 왔는데 7월 27일 영암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민군과 이를 방어하는 경찰이 덕진면과 신북면 경계지점에서 교전하는 총소리였다. 27일 오후, 경찰은 해남 쪽으로 다시 후퇴하고 인민군이 영암에 진주하니 이것이 영암에서의 인민공화국의 시작이었다.

텅 비어 있는 모든 기관을 인민군이 접수하고 금정면 국사봉과 장흥 유치(有治) 산골짜기에서 군경에 쫓겨 은신하고 있던 빨치산의 잔존 세력인 이봉천, 황점택, 최양렬 등이 하산하여 이봉천은 도당(道黨)으로 올라가고 황점택은 군당 위원장, 최양렬은 인민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들은 북쪽 출신 인민군이 맡아 실권을 장악하고 실무를 지도하고 있었다. 28일 군서면에서도 잠간 동안의 과도체제로 인민위원장은 양장 김OO, 부위원장 고산리 박OO가 맡고, 군서면당위원장은 신흥동 최OO가 맡고 분주소장(지서장)은 고산리 조OO이 맡아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림 분주소에도 빛바랜 인민군복을 입은 어려 보이는(17, 8세쯤) 인민군 두 사람이 파견되었으나 사전에 교육을 받았는지 아니면 이곳 실정을 몰라서인지 말과 행동을 조심하였고 지역 문제에 개입하려 들지 않다가 곧 철수하고 말았다. 인민군이 진주하고 경찰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매밀 방죽 위, 도갑산 골짜기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집단 처형하였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6.25전쟁 전에 좌익 운동을 하다 형무소에 가거나 경찰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억울함과 원통한 심정으로 들끓고 있었다.

결국 구림을 비롯하여 모정, 양장, 도갑 등 군서면 일원의 유가족들이 8월초 밤중에 배척골 최OO은 과거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알뫼들 최OO은 경찰지서를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타살하였으며, 학암 박OO은 일제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타살하기 직전 분주소 직원이었던 정창식이 그 쪽을 향해 공포를 쏘아 저지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들 중 정창식은 '최OO 같이 좋은 사람을 죽이다니' 라며 사표를 내고 분주소원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 후 마을사람들과 친구들 사이에도 언행을 조심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며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공포로 마을 분위기가 음산하게 바뀌었다.

구림에서는 이론과 신념을 가지고 좌익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6.25전쟁 전에 거의 죽고 살아남은 한두 사람이 군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정도였다. 유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민주학도대를 만들고 연극 연습 등을 하였으나 크게 활약하거나 구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한편 인민군 치하에서는 마을의 논과 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3:7로 인민공화국에 바쳐야 했으므로 마을별로 농민위원회에서 수확량 조사위원을 지명하여 위원들이 수확량을 조사한다며 논에서 벼 낱알을 세고, 밭에서는 조 이삭 수를 조사하여 생산량을 책정하였다. 이런 모습을 마을사람들이 보고 일제시대 때 공출이 연상되고, 농민위원회에서 하는 일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유리되어 갔으나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당(공산)에서 모병을 한다고 마을별로 청년들을 회유하고 설득한 바람에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한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어울려 두세 사람이 집단으로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민군의 철수와 경찰의 수복**

9월 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영암에서도 10월 1일 군의 기간요원과 남로당 간부들이 금정면에 있는 국사봉으로 입산하고 극소수만 남아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구림에서는 민주학도대에서 활동하던 학생 10여 명은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고 하는 말에 10월 2일 구림을 떠나 월북을 시도해 나주 봉황면까지 갔으나 퇴로가 차단되어 10월 3일 구림으로 되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인민군 치하에 목포, 무안 등지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간요원(속칭 목포ㆍ무안부대)들이 영암 월출산으로 입산하기 위하여 9. 28 직후 구림으로 몰려들어 왔다. 구림에 수일 동안 머무는 과정에 큰 가마솥을 몇 개씩 걸어놓고 취사도 하고 4성씨 문각에 분산하여 숙영하면서 대낮에도 회사정에 늘피하게 드러눕거나 마을을 배회하는 등 뒤숭숭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당시 영암 군당위원장이었던 황점택이 지프차를 타고 쫓아와 영암군당의 승인 없이 관할 구역에 들어왔다고 거세게 항의하였으며 그 후 그들은 금정면으로 입산하지 못하고 말았다. 뒤처리를 위해 영암에 남아 있던 공산당 잔존세력은 소련이나 중국의 넓은 지역에서나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을 좁은 한국에서도 사용하여 영암군 내에서 영보초등학교를 제외한 모든 기관과 학교 등 중요 건물을 소각하였으며 호적, 지적도 등 행정문서와 학적부 등을 불태웠다. 구림에서도 10월 2일과 3일에 그 일당이 면사무소, 지서, 수리조합, 학교를 비롯하여 대동계사와 회사정 및 교회까지 불태우면서 '양반냄새가 펄펄 난다'고 했다고 한다.

10월 3일 월북을 시도하다 돌아온 유학생 몇 명과 마을에서 차출된 약 30명의 인원으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마을을 순찰하고 밤에는 야경을 서거나 마을 경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한편 인민군 잔존세력 일부와 인공치하에서 활동했던 이성을 잃은 공산 유격대 일부가 우익 쪽에 가까운 군경 가족이나 인공치하에서 반동으로 모함 받았던 사람과 기독교 신자를 잡아 들여 10월 7일 지와목에 있는 김기준 소유 주막에 가두고 불을 질러 교인 6명을 포함하여 28명이 사망하는 잔인무도한 참상도 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이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다.

그 후에도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살육이 계속되었고, 혼인이나 재산 관계 등에서 생겨난 사소한 감정 때문에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보복하는 일도 있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위였다고는 하나 인민군 점령기에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인민군이 물러나고 경찰이 수복한 후에는 경찰의 외곽 단체에서 활동하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좌우를 넘나들면서 설친 사람도 있었다. 법을 빙자하거나 앞세운 잘못된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횡포나 폭력을 낳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수 없이 보고 듣고 겪었으며 눈이 먼 폭력 앞에 윤리와 도덕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이고, 규범이나 법이 얼마나 무력하고 허무한 장식품인가를 6.25전쟁 때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

6.25전쟁 전후를 통한 공포 분위기는 예리한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말 한마디 빗나가거나 눈 한번 잘못 떠도 좌우를 막론하고 힘 있는 자들의 비위를 거스른 행위로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갈림길이었다.

***수복 후 구림의 상황**

영암읍 수복은 10월 초순 이루어졌는데 주암과 오산의 야산을 경계로 구림 쪽은 미수복지구로 남아 있었는데 구림에는 관동군 출신이었던 조○이 북한제 아시보소총(일명 따꿍총) 한 자루를 소지하고 있었을 뿐 무장 세력은 없었고 20~30명의 면 자위대만이 학암 창고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 무방비 상태의 구림마을을 10월 17일 새벽에 경찰이 포위하여 아무 죄가 없어 피신하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던 힘없는 양민을 집단 학살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다. 이후 경찰은 구림과 인근 마을을 드나들며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총질을 해대니 집에 있을 수 없어 산과 들로 피해 다녔다.

매봉 꼭대기에 깃대를 세워놓고 경찰이 읍쪽에서 오면 읍쪽에 대고 기를 흔들고 독천 쪽에서 오면 독천 쪽에 대고 기를 흔들면서 징을 울리면 집에 있거나 일을 하다가도 마을사람들은 경찰이 오는 반대방향으로 피해 도망 다녔다. 11월 초순 해병대와 경찰의 대대적인 합동 작전으로 월출산에 은신해 있던 공산유격대 소탕섬멸 작전이 실시되어 목포, 무안, 해남, 진도부대 등 많은 공산 유격대와 입산자가 사살되었다. 월출산 소탕 작전 이후 경찰은 낮에는 구림에 주둔하고 밤에는 영암으로 철수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구림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 영암경찰서 외곽에 울타리를 만들기 위하여 대나무를 지게에 지고 경찰서로 운반하여 주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다시 경찰서로 끌고 가 결국 형무소에서 죽어 돌아 온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하나 사람을 죽이고도 '양면괘지 한 장이면 해결된다'고 하는 공포와 살벌함이 극에 달했던 당시, 이대로 가다가는 마을사람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느낀 조병희, 최규태, 최흥섭, 박찬걸 등 다섯 사람이 구림의 대표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영암경찰서를 찾아갔다.

1950년 11월 하순은 대통령포고령으로 공포된 부역자(附逆者) 자수기간이었는데 이들이 당시 영암경찰서 류기병 서장(1950.7.18.~1951.1.18. 재직)과 협의하여 인공치하에서 부역한 사실을 자수하면 죄를 사면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와 야번(야경) 선 사람까지 여러 사람들이 자술서를 써서 경찰서에 제출하였다.

12월 15일에는 구림이 완전 수복되고 경찰지서도 설치했으나 언제 지서에 끌려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마음은 항상 불안하였다. 당시 구림 출신 인사들 중에는 구림의 사정이나 억울함을 호소할 판검사, 경찰간부, 위관급 장교뿐 아니라 순경 한 사람, 군인 사병 한 사람도 없었으니 순경 한 사람에게도 절절 매며 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온갖 설움과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구림사람들이 6.25전쟁을 통해서 얻은 교훈은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조금씩 이해하고 수용하며 적과 동지란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모두가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한다.

돌이켜 보면 약소민족으로서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는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이에 대처하지 못한 탓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타의에 의해 국토가 분단됨으로써 6.25라는 참극의 불씨를 만들었다. 또한 민족과 국가를 이끌고 갈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민초들은 많은 혼란과 갈등 속에서 갈라서고 휩쓸리며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참혹한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행히 국가 차원에서 과거사 조사와 명예회복 등 근현대사의 비극과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때에 구림에서도 유족회를 만들어 의미 있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6.25 전후를 통해서 희생된 영혼과 그 후손들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하늘나라에서나마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손을 맞잡고 오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고자 '사랑과 화해의 위령탑'을 세우고자 한다. 〈구림지편찬위원회〉의 2차 목적사업이기도 한 위령탑 건립에 많은 분들이 협력하여 사랑과 화해의 위령탑이 우뚝 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8. 구림 '첫 포위'와 양민 희생**

1950년 10월 17일 면자위대(面自衛隊) 간부가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분대별로 분산해서 숙영(宿營)하고 새벽 5시까지 본부(학교관사)로 돌아오도록 지시가 있었으나 자위대원들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늦잠을 잔 벌로 동계리 당산나무까지 구보로 되돌아오는 기합을 받고 있었다. 6시경 학암 최용준이 한쪽 다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절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면 자위대 본부로 뛰어 들어와 '경찰들이 왔다. 빨리 피해라. 나는 총을 맞았다'고 말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신근정 사거리에서 야경을 서고 있다가 경찰의 총에 맞고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경찰이 왔음을 자위대에 알려줘 30여 명의 자위대원은 서쪽으로 뛰어 고산리 동산을 넘거나 큰 길을 따라 상대 아래로 도망쳐 엄길 쪽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경찰은 여러 차례의 염탐을 통하여 구림에 무장 세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영암경찰서 김OO 경위가 무장경찰 3개 소대를 이끌고 1950년 10월 17일 오전 3시경 구림을 포위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출발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착검을 하고 있었다.

구림을 향하여 오던 중에 경찰은 선인동 비석거리 근처 집에서 자고 나오던 죽정 최OO의 머슴을 칼로 죽이고, 강담안 주막 앞에서 주막집 셋째 아들과 평리 박OO를 자살(刺殺)한 후 신근정 사거리에서 야경을 서면서 '누구야' 하는 최용준에게 발포하였던 것이다.

경찰 1개 소대는 구림마을 북쪽 언덕을 따라 마을을 수색하면서 서호정 뒷동산을 거쳐 상대로 빠지고 1개 소대는 지와목 고개에서 고산리 뒷동산을 거쳐 남송정 뒷산 상대와 마주보는 지점에 머물고 1개 소대는 신근정에서 도로를 따라 집집마다 뒤지면서 사냥하듯 하며 상대에 이르러 2개 소대와 합류하여 모정 동호리 성양리 해창을 거쳐 영암으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야번(경비) 섰던 사람은 물론 논이나 밭에 거름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사람들을 불러내 칼이나 총으로 죽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마을에 머물던 사람들은 인민군 점령 시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인민군에게 협조하였던 사람들은 인민군이 철수하자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학암에서는 영암 망호리로 시집갔던 29세의 주부가 친정에 다니러 왔다가 칼에 찔려 죽고, 알뫼들 길갓집에 사는 17세 처녀는 인공치하에서 심부름 한번 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끌고 나가 면자위대 본부(당시 학암 학교관사) 큰길 가 담 밑에 참혹하게 죽여 놓아 길가는 사람들이 보기가 민망하여 볏짚으로 가려 놓을 정도였다.

딸이 끌려가는 것을 담 너머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도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텃밭에 죽어 있었다. 고산리 알뫼들에서는 경찰이 나이 어린 처녀 두 명을 개천으로 데려와 옷을 벗으라고 협박하였으나 심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주저주저하니 한 명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도 있었다.

고산리 뒷동산에서는 죄 없는 사람은 나오라고 외치자 그 외치는 소리만 믿고 나간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 목포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 큰집으로 피난 온 최호섭(崔豪燮)은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사촌동생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죄가 없으니 괜찮다'고 말하며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넓은 대나무 밭이나 마루 밑에 숨거나, 심지어 합수통(당시 시골 화장실) 인분저장소에서 목만 내놓고 피했던 사람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에 협력하거나 좌익 활동과는 무관한 우익성향의 사람도, 한문 공부만 해서 샌님이란 별명이 붙은 처녀 같은 사람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 한 사람도, 또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도 희생되었다. 총소리에 놀라고 무서워 도망치는 마을사람들에게 남녀나 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신근정 사거리, 학암 사거리, 집 담밑, 솔밭, 텃밭, 동산 위, 논(나락논), 개천가 번덕지, 간척지 등 여기저기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심지어 바로 자기 집 앞에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무장도 하지 않은 양민들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의 손에 잔인하게 학살당하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 양민들이 좌익 세력들에 의해 가족이나 친지가 희생당한 경찰의 분풀이와 복수의 제물이 되어 죽어갔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는 마치 무서운 태풍이 몰아쳐 마을을 헤집고 지나간 것처럼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나뭇가지는 찢기고 부러져 땅바닥에 뒹굴고 푸른 생잎은 떨어져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널려 있듯이, 마을은 음산하고 숙연한 적막과 몸서리 처지는 참상과 공포에 휩싸여 닭도 울음을 멈추고 개는 짖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만물이 숨을 죽이고 청천벽력 같은 원통하고 억울한 죽음에 당산바위도 떨고 당산나무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지금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들은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사건 당시 희생자가 96명이라고 했으나 근래 발행된 〈구림연구〉(경인문화사, 2003)에서는 78명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가족들이 외지로 이사하거나 연고자가 사망하여 모두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6.25전쟁이 한창 때인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말 경, 영암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국방 경비대에 입대했던 군서면 신기 마을의 신OO이 육군중위 계급장을 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공치하에서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가산을 몰수 당했는데 이를 배상 받고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다. 군용 트럭을 타고 사병 2명과 함께 구림에 들어와 인공치하에서 분주소원이었던 동계리 최OO, 서호정 조OO을 잡아들여 임시지서(자위대 본부)에서 3일간 혹독한 심문을 해댔다. 1951년 1월 2일 집에 있던 사람, 아침에 생일 밥상을 받고 있던 사람, 지서 복구 부역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 전날 저녁 야경을 서고 늦잠을 자는 사람 등을 지서로 불러 들였다. 말 한마디 물어보지 않고 군 트럭에 싣고 해창지서로 간다면서 지서를 출발하여 호동 잔등을 지나 주암 마을 못 미쳐 도로에서 20여m 거리의 굴청에 밀어 넣고 3명의 군인들이 13명을 집단 학살하였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국토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군의 손에 죽어 감을 원통해 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당시 분주소에 근무했던 두 사람은 재산을 보전(補塡)해 주고 살아남았으니 이것이 당시의 법이요, 사회였다.〈사진 설명〉

1. (책 표지) 구림 마을 사람들이 손수 조사하고 정리해 펴낸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리북 펴냄)의 표지. 자신들의 '자랑'과 '치부'를 동시에 드러낸, 보기 드문 마을 이야기책이다.

2. (순교비&순절비)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는 한쪽의 발언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해 왔다. 그 결과는 다른 한쪽의 강요된 침묵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구림 마을에서 좌익에 의해 희생된 28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기념비가 마을 입구에 2개나 거의 겹치듯 세워져 있다. 뒤쪽의 순절비가 1976년에, 앞쪽의 순교비가 2000년에 각각 세워졌다. 이제 사상의 벽을 넘어 좌우익에 의한 희생자를 함께 위령하자는 움직임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3. (플래카드) 구림 마을 사람들은 이제 4월 7일이면 주민들 스스로 증언하고 기록해낸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이라는 자랑스러운 마을 이야기책을 손에 쥐게 된다. 이날의 출판기념회를 계기로 이들은 제2단계의 화해 작업으로 돌입하게 된다.

4. (대동계사) 구림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규정해 온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대동계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다 해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공동체정신의 정화는 이 대동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2004년에 복원된 대동계사.

5. (마을 전경)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구림 마을이 최근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작업에 착수해 관심을 끌고 있다. 영암도기문화센터에서 바라본 구림 마을의 전경.

6. (희생자 명단) 〈비둘기 숲…〉에 수록된 6ㆍ25 전쟁 기간 중의 희생자 명단. 전체 희생자 137명 가운데 현재 시점에서 조사 가능한 98명 전원의 명단이 기재돼 있다. 사건 명칭에 가해자를 좌익 또는 우익 등으로 명시하지 않은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7. (최철종, 머리 흰 사람) "10여 년 전부터 가슴에 담고 있던 우리 마을의 과거사 정리 작업을 최근의 남북관계의 진전과 과거사 정리 분위기에 힘입어 마침내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추어들이 만들다 보니 책이 좀 촌스럽고 미비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게 더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계기로 구림의 진정한 화해가 앞당겨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최철종〉

8. (최복, 머리 검은 사람) "구림지의 발간은 정말 늦었지만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을 공동체의 해묵은 과제를 훌훌 털어내는 화해 작업에 막 시동이 걸린 셈입니다. 6·25 희생자 위령사업의 범위와 방법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연구하고 상의하고 설득할 참입니다. 그거야말로 우리 산 사람들의 몫 아닌가요?" 〈최복〉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