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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

[신간] 부대찌개에서부터 양민학살의 현장까지

'한국은 일제 36년에 이어 미군 주둔 54년의 역사를 보냈다. 일제잔재도 청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미군잔재 청산은 언제할 것인가.'

이같은 문제의식으로 지난 93년 한국외국어대 재학생과 졸업생 9명으로 결성된 ‘기록문학’ 모임 ‘다큐인포’가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2탄을 냈다. <부끄러운 문화답사기-일제잔재편>에 이은 두번째 책의 제목은 <부끄러운 미군 문화답사기>(북이즈 간)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우리가 의식조차 못하는 일재의 잔재가 스며있듯, 알고나면 ‘부끄러운’ 미군문화가 놀랄만큼 지금 우리 주위에 지천이다. 저자들이 지난 1년6개월 동안 발로 뛰며 취재한 미군의 잔재들을 따라가 보자.

***‘꿀꿀이죽’과 ‘부대찌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즐겨먹는 ‘부대찌개’는 의정부 등 미군 부대가 있는 마을 주민들이 미군 부대 쓰레기장에서 고기 등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 커다란 쇠통에 넣고 끓여먹던 ‘꿀꿀이죽’이 진화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부대찌개를 ‘우리나라 최초의 퓨전음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부대찌개는 여기에 들어가는 김치 등 우리 고유의 발효식 내지 자연식 재료에 스팸, 프랑크햄 등 화학첨가제 투성의 인스턴트 음식이 결합해 우리 음식 문화를 퇴보시킨 사례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같은 부정적 인식 때문에 의정부 부대찌게 전문음식점들은 2001년부터 부대찌게라는 말 대신 ‘명물 의정부 찌개’라는 말을 사용하고 간판을 모두 바꾸어 달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10월30일 ‘꿀꿀이죽’의 아픔을 되살리는 사건이 터졌다. 서울 용산 미8군 식당에서 사병들이 먹다 남은 스테이크와 햄,소고기를 부대찌개 집에 넘겨준 미8군 근로자들과 이들로부터 음식찌꺼기를 넘겨받아 부대찌개에 넣어 판매한 식당업주들이 경찰에 적발된 것이다.

***‘원두커피’라는 희한한 용어**

커피는 일제시대 들어왔지만 원래 커피 하면 원두커피를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품으로 인스턴트 커피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커피 하면 인스턴트 커피를 의미하고 커피를 ‘원두커피’로 부르는 세계 유일의 희한한 용어가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학력 비정규 노동부대 ‘카투사’**

카투사(KATUSA)는 Korean Augmentation Troop to the U.S Army의 약자로 ‘미 8군에 증강된 한국육군요원’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카투사들이 투입되면서 한국전쟁 기간 중에만 총 4만3천6백6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싸웠으며 1만1천3백65명의 사상자(전사 6천4백15명, 실종 1천6백67명, 부상 3천23백83명)이 생겨났다.

82년부터 민간공개모집을 채택하면서 카투사가 되기 위한 시험 경쟁률이 20:1까지 치솟기도 하면서 ‘카투사 고시’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다시 98년에는 토익 성적을 선발 기준으로 삼자 토익 커트라인은 8백점대까지 올라갔다. 87년부터 지금까지 카투사는 4천5맹 내외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한민군 국군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평균 3만5천명이 넘는 주한미군에서는 15% 수준에 이른 큰 규모로 평균 미군 10명에 ~2명의 카투사들이 배당되는 셈이다.

2004년 현재 카투사의 기본조건은 징병검사에 1~3등급 이내인 자와 국내 정키 토익 7백점 이상 또는 템스 6백25점 이상인 자를 대상으로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한 후보들을 점수대로 별로 3그룹으로 나누어 추첨을 통해 선발하고 있다.

그러나 카투사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모병제도다. 먼저 카투사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존립을 유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이승만과 맥아더 사이에 맺은 비공식적인 구두협저에 따라 임시로 만들어진 이후 어떠한 법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도 ‘카투사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자에서 ‘역사상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라고 인정했다. 고용 관계인 용병과 달리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국민이 타국 군대에 제도적으로 편입되는 경우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 등 전세계 도처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가투사(GATUSA)니 자투사(JATUSA) 같은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군은 카투사를 통해 병력 보충과 함께 경제적인 이윤 획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미군으로서는 미군 한 명 고용하는 비용으로 1백명의 카투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투사는 한국군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대한민군 육군이지만 지휘는 미군에게 받는다. 카투사가 가장 많이 배정되는 보직이 행정직이지만 잡역이 많고 기술직이더라도 한국 지리를 안다는 이유로 운전병으로 배치되기 일쑤다. 그래서 ‘우리는 카투사가 아닌 카투리이며 미군 방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비하적인 발언도 나온다.

이 때문에 미군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카투사의 인원을 줄이고 군인으로서의 전문성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카투사 대신 군무원을 활용하거나 한미안보의 특수상황에서 미군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면 한국군에서 일과시간에 파견을 내보내는 형식이어야 한다는 것이 군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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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미군 기지 이전 비용 논란**

지리적 요충지인 서울 용산은 외적에 침탈 당할 때면 어김없이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되곤 했다. 약 7백전 고려 말에는 몽고군의 병참기지로 사용되었고 189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부대 3천 병력이 이곳에 주둔했다.

현재도 한강 이북에서 숙명여대 입구 전철역에 이르기까지 약 1백만평에 이르는 땅이 미군지로 이용되고 있다. 기지 내로 들어가는 문만 20여개가 넘는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 ‘사우스 포스트’ ‘캠프 킴’ ‘캠프 코이너’ 등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메인 포스트’에는 한미연합사령부,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등 주요 사령부가 있다.

한미연합사령부 건물은 현재 유엔사령부와 함께 쓰고 있으며, 건물지하에는 극비지휘소인 ‘서울’이 있다. 한미 양국 지휘관들은 평상시와 전쟁 발발 직전에는 ‘서울’에서 지휘를 하다 전쟁이 본격화되면 지하기지인 ‘탱고’로 옮겨간다.

맨북쪽에 자리잡은 ‘캠프 코이너’에는 미8군 인사 행정 사령부와 ‘카투사’라는 한국군 지원단, 501 정보여단 등이 있다.

미군기지에 대한 논란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특히 용산의 미군기지는 쓰레기, 하수, 각종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이 심각해 죽은 땅이나 다름없다고 환경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데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기지 이전에 엄청난 혈세가 들어갈 전망이다.

지난 90년 서명한 ‘용산기지 이전 합의각서’에 따르면 기지 이전을 먼저 제기한 측이 이전과 관련된 비용을 모두 부담하기로 되어 있어 용산기지 이전을 먼저 요청했다는 이유로 모든 비용을 한국이 부담한다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일부 주한미군을 이라크로 옮기는 것을 계기로 미군의 필요에 의해 기지를 이전하고 재배치하는 것에 대해 한국이 전액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전의 협상을 무효화하고 원점에서 재협상을 해야한다는 요구가 비등하고 있다.

***제주 4.3 항쟁**

제주 4.3 항쟁이란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소요사태 및 1953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 연구소 김창후 부소장에 따르면 제주 4.3항쟁으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명 이상이 미군정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양민의 숫자와 맞먹을 정도다. 93년 제주도 의회에서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한 후 피해자 신고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접수된 희생자 수만 1만8천명이 넘어서고 있다.

47년 당시 제주도는 일본에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사람들이 광복 후 귀환했으나 제주도 특유의 공동체 생활마저 흔들릴 정도로 피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때의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해 군 관리들의 부정부패 행위가 심각해지면서 제주도 민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시위 후 이를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이 경찰에 체포되고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치안과 안보를 위해 좌익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저지한다는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가운데 6명의 피해자가 초등학생,부녀자,농부 등으로 시위를 구경하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제주도 주민들은 격분했다.

열흘 후인 3월10일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찰관 처벌, 경찰 수뇌부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며 세계사에서보 보기드문 민관합동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파견한 진상조사단은 제주도 총파업의 원인을 제주도민의 감정을 선동해 반미감정을 유발시키는 남로당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짓고 민관합동 파업을 주도한 주동자 검거에 착수하면서 제주도에는 특별수사대가 설치되었다.

미군정이 검속을 실시한 지 한 달만에 5백여명이 체포되고 1년 동안에 2천5백명여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48년 3월에는 고문치사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해 제주도내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마침내 48년 4월3일 새벽 1시 미군정의 탄압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김달삼을 중심으로 5백여명의 무장대가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 내 11개의 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관료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후 제주도 초토화 작전에따라 48년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에 걸쳐 참혹한 양민학살이 벌어졌다. “태워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없앤다”는 이른바 ‘삼진(三盡)정책’에 의해 제주도는 피바다가 되기 시작했다.

무차별적인 토벌대의 진압에 무장대 세력이 약화되면서 진정되는 듯 했던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이후 양민학살은 다시 시작됐다. 제주도 섯알오름에 끌려가 집단학살된 시신들을 수습한 백조일손지묘도 이때의 비극을 말해준다.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몇 년 뒤 유족들이 찾아낸 1백32구의 시신들을 공동안장한 곳이다.

***최초로 미 정부가 인정한 미군의 양민학살 ‘노근리 사건’**

대전에서 김천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노근리에서 일어나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5일부터 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횡간면 노근리에서 피난민 4백여명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사격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미국 AP통신의 추적보도로 전세계에 알려져 2001년 1월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사과 발언을 받아내고 AP통신은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지금도 비극의 현장인 노근리 쌍굴에는 총탄이 박혔던 탄흔들이 선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미군들을 따라가던 피난민들을 모아놓고 학살했다는 점 때문에 지금도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노근리 사건은 미군에 의한 수십여건의 양민학살 사건의 하나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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