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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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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신간> 조선 5백년 정권의 '블랙박스', "너희도 실록을 쓰라"

<노회찬이 함께 읽은 조선왕조실록>(일빛 간)은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노동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할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어, 그래”하는 감탄사를 자아낸 99편의 이야기를 골라 7년전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으로 펴냈던 책이다. 그후 그가 걸쭉한 입담으로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한 후 책을 찾은 이들이 많아지자 노 의원과 절친한 사이인 일빛 대표 이성부씨의 권유로 재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백72년 동안의 기록으로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자는 “왕과 조정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지금은 조선 왕조의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는 실록조차 없는 시대”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너희도 실록을 쓰라'고 충고"**

노 의원은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면서 “조선왕조실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희도 실록을 쓰라’고 충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공식 일정과 주요 발언을 기록하는 통치 사료 담당관이 있지만 ‘통치 사료’는 대통령이 퇴임할 때 가져가는 기념품에 불과하며, 통치 사료 담당관이 조선 시대의 사관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면서 “역대 정치사의 많은 잘못들은 국민은 물론 역사마저도 속일 수 있다는 만용에서 시작되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요즘 사회적 현안이 되고 있는 주제들과 관련된 몇 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울리지 않는 신문고**

“힘없는 백성이 하소연할 길 없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치는 북”이라는 신문고.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신문고를 치는 절차를 밝힌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에게 소장을 내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고 정해 놓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왕들이 신문고가 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에 따라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를 포기하고 왕의 행차나 궁중에 직접 다가서서 구두로 직소하거나, ‘상언’이라 해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글을 올리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1642년 5월14일 <인조실록>에는 왕에게 대사헌 이식이 다음같이 아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문고의 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고 왕 앞에서 상언하는 것도 일정한 법이 있으며, 벌을 받을 각오로 징을 쳐 호소하는 일은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어질고 거룩하신 임금이 위헤 계시는데도 아랫 사람의 충정이 이렇게까지 억눌리고 막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세종, 왕 못될 뻔 했다**

태종 이방원은 12명의 부인에게서 모두 12남 17녀의 자식을 얻었다. 정실 원경왕후에게서 4남 4녀를 얻어 장남 양녕대군이 태자로 책봉됐다. 양녕이 미친 것처럼 행동한 배경을 정확히 설명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태종이 처음부터 충녕대군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실록> 총서에 따르면 1418년 태종이 양녕대군을 왕세자 자리에서 폐하면서 양녕의 맏아들에게 왕세자 자리를 계승하려고 했다.

정실에서 태어난 장남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다른 왕들처럼,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뒷날의 시비를 예방하고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장남이 아니라면 장손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의 무사함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아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 청컨대 아드님 가운데 어진 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었다.

“아들이나 신하를 아는 데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에 달렸사옵니다.”

태종은 결국 신하들의 말을 좇아 양녕의 장남을 포기하고 셋째 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일본 사신들이 서울에서 단식투쟁**

세종 6년(1424) 1월5일 일본 사신 규주와 그 일행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세계 외교사에서도 유례 없는 단식투쟁이었다.

“너희 국왕이 요구한 대장경 판은 우리나라에 오직 한 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다”는 세종이 답변때문이었다.

사실 세종은 대장경 판을 줄 마음이 있었다. 사신들을 접견하기 전에 세종은 “이제 대장경 판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인데 이웃 나라에서 달라고 하니 주는 게 어떤가”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조선 건국 이래 억불숭유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이에 신하들은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비록 경판은 아낄 물건은 아니지만, 지금 일본이 계속 요구한다고 해서 일일이 따르다가 나중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요구하면 곤란해집니다. 이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못 됩니다.”

이에 세종은 단식투쟁까지 벌이는 일본 사신들에게 “너희들이 사신으로서 한 가지가 뜻에 맞지 않는다고 경솔하게도 단식을 하며 트집을 부리려 하니, 이 어찌 사신의 체통이라고 하겠는가”라고 입장에 변함이 없을 것임을 알렸다.

***남편도 육아 휴가**

세종 8년(1426) 4월17일 왕은 관청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1백일 동안 휴가를 주도록 하고 이를 규정으로 삼도록 형조에 지시했다. 이때 세종의 나이 29세였다. 나아가 세종 12년(1430) 10월19일 왕은 산전 휴가 30일을 추가하는 조치를 내린다.

산전 휴가 30일에 산후 휴가 1백일까지 모두 1백30일의 출산 휴가가 보장된 것이다. 그전 까지 7일의 출산 휴가가 1백30일로 늘어났으니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434년 4월26일 남편의 육아 휴가 제도를 실시한다.

“여종이 아이를 배어 산달이 된 사람과 산후 1백일 안에 있는 사람은 사역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그 전대로 일을 하게 해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된다. 부부가 서로 돕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하겠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을 하게 하라.”

우리나라는 2001년 말 노동계와 여성계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90일로 늘어나게 되었다.

***경복궁은 백성들이 불살랐다**

1592년 4월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임진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의 사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혔으며 백성들이 피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불태운 것으로 알려진 경복궁도 사실은 배신당한 조선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왕의 피난 행렬이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국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이때 불에 탄 경복궁은 고종 2년(1865)에 중건에 들어간다. 백성들의 부담과 고통 속에서 2년 만에 광화문.근정전.경회루를 포함해 경복궁은 중건되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그 뒤편 궁궐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식민 통치 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총독부 청사는 미군정기에 군정청으로 사용되었고, 이때부터 중앙청으로 일컬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가 철거한 광화문을 복원시켰으나, 청와대 경비를 구실로 경복궁 북문 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은 중앙청을 철거하고 부대를 철수시켜 대원군 시대 이후 처음으로 경복궁은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조선 시대 공무원의 비애**

조선 시대 관리들은 해가 긴 봄 여름에는 하루 12시간, 해가 짧은 가을 겨울에는 하루 8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일요일도 없고 1년에 휴일로 쉬는 날이 20여일 정도 되다보니 결근도 잦았다. 결근하면 태형 10대, 지각 또는 조퇴한 관리는 태형 50대에 처해졌다.

세종 13년(1431) 3월15일 왕이 지각과 조퇴가 결근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 점을 고치도록 지시했으나 이 제도가 바뀌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엄한 벌칙이 있는데도 관리들의 근무기강 문란을 조선 시대 내내 문제가 되었다.

***울릉도 영토분쟁**

오늘날 한일 양국 사이에 독도가 누구 땅이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에는 울릉도가 누구 땅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1693년 봄 일본 대마도 도조의 편지는 이렇게 적도 있다.

“귀 나라(조선)의 바닷가에 고기 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일본)의 죽도(竹島:그 무렵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일컫던 말)에 배를 타고 왔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습니다. 그런데도 올 봄에 어민 40여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어수선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우리 관리가 그 가운데 2명을 잡아 두고서 한동안 증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이들 어민을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절대로 배를 대지 못하도록 조치해, 두 나라의 친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마도 도주의 서신에 답장을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민을 단속해 먼바다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울릉도에도 아득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물며 그 밖의 섬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따라 죄를 벌하게 하고, 앞으로는 법을 엄하게 제정해 연안 지방에 이를 집행하도록 할 것이오.”

그러나 사신 다치바나 신주는 조선의 회답 편지 가운데 ‘우리나라의 울릉도’라는 말이 왜 들어가냐고 따졌고 울릉도에 배를 정박했던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숙종 20년(1694) 2월23일 <숙종실록>은 조정의 이같은 일 처리 방식에 대한 사관의 통렬한 비판을 싣고 있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다. 왜인들을 울릉이란 이름을 숨기고 다만 죽도에서 고기 잡는다는 이유를 구실 삼아, 금지하겠다는 우리나라의 회답을 받은 뒤에 곧바로 위의 편지를 가지고서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아! 나라의 강토는 남에게 줄 수 없으니 명백히 가리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이 다시는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빈틈없고 신중한 것이 지나쳐 단지 견제하려고만 했다. 이것이 이웃 나라에 더욱 약점으로 보였으니,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조정은 이후 보다 강경한 태도로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해 사태를 마무리했다. 한편,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던 일본인들은 요즘에도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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