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었다. 북한은 12월 초에 미국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언급했고, 일각에선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나 위성 발사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미국도 정찰기를 매일 한반도 상공에 띄우면서 북한의 선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지나갔다.
일단 북한은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크리스마스 선물" 발언으로 상당한 효과를 봤다. 우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사나이 대 사나이의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이후 대외정책에 있어서 트럼프의 최대 관심사는 동맹국들의 군사비와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시키는 것이었다.
2018년 트럼프의 트위터에서 최대치를 기록한 북한 관련 발언은 올해 들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방위비 분담금 관련 발언이 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발언이 나온 이후 트럼프의 북한 관련 발언이 또다시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한으로서는 이 발언 한마디와 ICBM 엔진 시험으로 추측되는 두 차례의 "중요한 시험"으로 트럼프의 관심사를 되돌리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중국과 러시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북 제재 완화 결의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처음으로 낸 것이다. 이들 나라도 이게 통과될 것이라고 믿진 않는다.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과 프랑스도 반대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재 완화 결의 제출이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크리스마스를 무사히 넘기는 게 1차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소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중러 결의안은 향후 북미대화의 멍석을 깔아주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재 문제의 본격적인 의제화이다. 북한이 줄곧 미국에게 요구해온 "새로운 계산법"은 제재 해법을 들고나오라는 것인데 중국과 러시아도 이에 공개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북한으로선 또 하나의 수확인 셈이다.
북한의 자제로 '크리스마스 소동'은 별 탈 없이 지나갔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북한이 예고한 "새로운 길"과 미국의 완강한 태도에는 2017년에 버금가는 극심한 위기가 잉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 해결 구도는 철저하게 북미 관계 중심으로 짜여져왔다. 회담 성과 여부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상황도 반복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 문제를 북미대화에 맡겨두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해졌다. 북미대화 재개 자체도 불투명하고 재개되더라도 성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남북관계를 통해 반전을 모색하기도 쉽지 않을 현실이다. 이제야말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때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 초안은 대단히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안보리에서 당장 통과되지 않더라도 향후 한반도 문제 해결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유용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선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집중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을 재개하면 유엔 안보리에서 중러가 제출한 결의안 초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테니, ICBM 시험 발사와 같은 판 깨기를 하지 말고 적절한 시점에 북미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미국은 중러 초안에 거부감을 나타낸 이유로 "북한은 도발 고조를 위협하고 비핵화 논의를 위한 만남을 거부하고 있으며 금지된 대량살상무기(WMD)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들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향상시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중지를 유지하고 북미회담에 나서며 회담 결과로 핵 동결과 같은 조치를 취하면, 대북 제재 완화 조건은 상당 부분 충족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중국과 러시아는 '투 트랙' 접근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 북미대화와 함께 안보리에서의 대북 제재 해결 논의를 병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북한에게는 북미대화에 나설 동기를 부여하고 미국에게는 비핵화 회담을 측면 지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아울러 회담 구도를 북미 양자 대화에서 6자회담과 같은 다자 회담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도 "새로운 길"을 나설 필요가 있다. 정부에게 주문하고 싶은 새로운 길의 핵심은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신년사를 통해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남북미중 4자 회담을 공식 제안하는 것이다. 비핵화에 진전이 있어야 평화협정 논의가 가능하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비핵화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평화협정 논의가 필요하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내년은 한국전쟁 발발 70년째가 되는 해이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평화 정착을 도모하기에 딱 좋은 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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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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