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주민들과 대책위가 공언한 핵폐기물처리장 유치에 관한 자체 주민투표를 주관할 '주민투표 관리위원회'가 15일 정식으로 발족했다. '주민투표 관리위원회'는 25일 주민투표 방안을 공고한 뒤 2월14일 부안 주민을 대상으로 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주민 자체투표는 한국 초유의 사태로, 노무현 정부의 권위에 적잖은 상처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1월25일 주민투표 공고, 2월14일 주민투표 실시해**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김지하 시인 등은 15일 11시 안국동 느티나무 까페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핵폐기물처리장 유치에 관한 부안 자체 주민투표를 주관할 '주민투표 관리위원회(이하 관리위원회)'의 발족을 정식으로 선언한 뒤 주민투표 일정과 방법을 밝혔다.
관리위원회는 박원순 이사가 위원장을 맡고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정현백 여성단체연합 회장, 이학영 한국YMCA 사무총장, 김지하 시인, 도법 스님, 홍근수 목사 등 22명의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인사로 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는 25일 주민투표 방안을 공고한 뒤 2월14일(토)에 주민투표를 실시하고 2월15일 개표 및 결과를 공표하기로 했다.
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원순 이사는 발족문 낭독을 통해 "부안의 갈등이 반년을 넘어서면서, 부안 군민들의 어려움과 함께 지역 경제의 피폐와 지역사회의 분열과 국가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과 정부 그리고 부안 군수까지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기로 했지만,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주민투표 제안에 정부가 묵묵부답"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박원순 이사는 "부안의 상황을 마무리하지 않고 주민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면서 "부안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 정부가 외면하는 상황에서 '관리위원회'가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거법과 주민투표법에 의거한 구체 방안도 나와**
관리위원회는 선거법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주민투표법에 근거해 1월25일 공고일을 기준으로 부안군 주민등록인구가 투표권을 갖도록 하고, 주민투표 공고일로부터 5일 이내 투표인명부를 작성해 2월14일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관리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은 하승수 변호사(참여연대 협동처장)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안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4월15일 총선전 60일 이전에 시행하기로 했다"면서 "공고일로부터 20일 동안 찬반 양측 모두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하승수 변호사는 "20일의 운동기간에 찬반 양측의 참석을 보장하는 TV토론회, 읍·면별 토론회·설명회를 개최하고, 운동 기간 중에는 선거법이나 주민투표법에 근거해 야간집회, 서명 수집, 도서관 등 금지장소에서의 연설 등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 변호사는 "주민투표 결과는 과반수 득표로 확정하고, 투표율이 3분의 1 미만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투표 방해 행위 등이 없다면 투표율이 낮다고 재투표를 하는 일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무처와 공보팀, 명부작성팀, 공정선거감시팀, 토론준비팀, 투개표관리팀 등 실무를 맡을 인력은 자체 주민투표를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의 간사들을 차출하거나, 일반 국민들의 자원봉사 신청을 받아서 해결하겠다"면서 관리위원회가 최대한 공정하게 주민투표를 진행할 것을 공언했다.
하 변호사는 "정부는 부안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민투표 결과로 드러날 다수 주민들의 의사대로 부안 핵폐기물처리장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
이날 기자 회견에 참가한 관리위원회 위원들은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을 비판하면서, 자체 주민투표의 정당성을 지적했다.
김지하 시인은 "부안 사태가 반년이 넘게 지속된 것 자체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면서 "부안 주민들이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한 것은 참으로 정당한 새로운 문명의 역사를 만드는 상징적인 시도"라고 지적했다
이학영 한국YMCA 사무총장도 "정부가 모든 잘못을 인정해 놓고도,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지 않는 무능함을 드러낼 때, 시민사회가 직접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면서 "시민사회단체의 명예를 걸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주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박석운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은 "이번 자체 주민투표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면서 "이제 곧 시작될 농번기 전에 찬반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자는 주민들의 제안을 정부가 수용하지 않는 것은 이 정부가 부안 주민의 고통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 이회수 대외협력실장도 "이번 자체 주민투표는 노무현 정부의 통치능력의 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최대 위기로 기록될 만한 일"이라면서 "정부가 더 늦기 전에 부안주민들의 투표에 동의하고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체 주민투표, "정치적 구속력은 매우 크다"**
한편 헌정 사상 유래 없는 이번 자체 주민투표가 계획대로 실시될 경우 정부에 큰 압박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시 내세웠던 지방 정책의 근간은 '참여'와 '분권'이었는데, 부안 주민들이 이를 직접 실현하려고 하는데도 정부는 거부로 일관하고 있다"고 정부의 이중적인 행태를 꼬집었다. "정부가 자체 주민투표를 막거나, 결과 수용을 거부할 경우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지적이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도 "이제 상황을 종료해야 할 시점"이라면서 "자체 주민투표는 법적 구속력은 없더라도 정치적 구속력은 매우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체 주민투표가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정부가 그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원순 이사도 "자체 주민투표는 모든 것이 7월에 시행될 정부의 주민투표법에 근거해 실시되기 때문에, 정부가 이것을 반대하거나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전북지역 10개 의석중 6개를 차지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급한 처지도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신임 의장은 의장 경선때 전북지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주민투표 시기 결정은 전적으로 부안 주민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정부, "더 늦기 전에 자체 주민투표 협조해라"**
박원순 이사는 "(이번 주민투표가) 국가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반대측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면서 "부안 주민들 찬반 양측 모두 적극적인 자세로 의사를 밝히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세를 가지고 주민투표를 반년이 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주민 축제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박 이사는 정부에게도 "부안 사태를 조속하고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서 주민투표가 충돌이나 대립 없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행정지원 등 대승적 지원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이같은 주민 자체투표 방침에 대해 아직 행정자치부 등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