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밭에서 파리의 응접실까지
한 가지만 잘해도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조제프 볼로뉴(Joseph Bologne, 1745~1799)는 검도 잘 쓰고, 말도 잘 타고, 춤도 잘 추고,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 지휘까지 했다. 문제는 하나같이 잘했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는 뛰어난 재능보다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의 피부색을 먼저 따졌다.
볼로뉴는 1745년 12월 25일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과들루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백인 농장주였고 어머니는 아버지 소유농장의 흑인노예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흑인노예의 아들이라는 출신은 그의 앞길에 평생 그림자를 드리웠다.
볼로뉴는 검술을 익혀 이름을 날렸고 왕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다. 기사라는 뜻의 슈발리에(Chevalier) 칭호도 얻어 슈발리에 드 생조르주(Chevalier de Saint-Georges)라고 불렸다. 그러나 계몽의 시대를 자랑하던 프랑스에서도 인종에 대한 편견은 깊었다. 이성을 찬양하던 시대에 이성이 가장 늦게 도착한 곳이 피부색 앞이었다.
검객이 바이올린을 잡자
1769년 볼로뉴는 작곡가 프랑수아조제프 고세크(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가 이끄는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773년에는 지휘를 맡았고, 악단은 파리 음악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검을 휘두르던 손이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볼로뉴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현악 4중주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1780년대에는 하이든(1732~1809)의 이른바 ‘파리 교향곡’ 여섯 곡을 위촉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당대 음악계에서 그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를 ‘검은 모차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뛰어난 흑인 음악가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백인 작곡가의 이름을 빌려야 할까. 음악에는 피부색이 없지만 음악가를 평가하는 사회에는 피부색이 있었다.
오페라극장의 문턱
1776년 파리 오페라극장의 책임자 후보로 볼로뉴가 거론되었다. 실력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극장의 여성가수들이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왕비에게 탄원서를 내며 혼혈인의 지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음악 실력이 아니라 피부색이 심사기준이 된 셈이다.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던 사회에서 차별은 이렇게 점잖은 말투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볼로뉴는 오페라 작곡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대부분 널리 공연되지 않는다. 온전하게 전해지는 대표작 《익명의 연인》(L'Amant anonyme)은 1780년 초연된 뒤 오랫동안 무대에서 멀어졌다가 2016년에야 미국에서 전막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의 악보가 인종차별 때문에 고의로 불태워졌다거나 나폴레옹이 연주를 금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악보를 불태우지 않아도 사람은 역사에서 지워진다. 연주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된다.
혁명이 약속한 자유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볼로뉴는 시민으로서 새 시대에 참여했다. 군에 복무했고 1792년에는 생조르주 군단으로 알려진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혁명도 폭력과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1793년 군에서 배제되고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복직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799년 6월 9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쉰셋이었다.
더욱 얄궂은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혁명기의 공화국은 1794년 식민지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1802년 노예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평등을 외친 혁명도 식민지의 이익 앞에서는 뒷걸음질할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묻는다
첫째, 실력보다 출신을 따지는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볼로뉴를 오페라극장의 책임자 자리에서 밀어낸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인종에 대한 편견이었다. 오늘 한국사회도 이주민과 난민, 성소수자 등을 향한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 2026년 2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지만, 발의가 곧 제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합의를 기다린다는 말이 차별받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기다림이 될 수 있다. 합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만들어진다.
둘째, 군은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초래한 비상계엄 사태는 군과 경찰의 힘이 시민을 지키는 데 쓰이는지, 권력자의 위법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 쓰이는지 묻게 했다. 윤석열은 2026년 2월 내란 우두머리 혐의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민주주의는 위법한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희망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며, 거부한 이들이 보복당하지 않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야 한다. 군과 경찰의 교육과 지휘체계에 이 원칙을 분명히 새겨야 한다.
셋째, 개혁은 한 번의 승리로 완성되지 않는다. 노예제가 폐지된 뒤 다시 부활했듯, 한 번 얻은 권리도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시민들이 힘을 모아 추진해 온 《반헌법행위자열전》 같은 작업은 권력이 헌법을 어떻게 훼손했는지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기록은 복수를 위한 명단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공적 기억이어야 한다.
검을 잘 쓰던 사내는 바이올린을 잡았고, 지휘봉까지 쥐었다. 그의 재능은 시대를 앞섰지만 사회의 평등은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볼로뉴의 음악이 다시 울리는 것은 누군가 그의 악보를 찾아내고, 연주하고, 이름을 다시 불렀기 때문이다. 불의의 기록을 남기고 지워진 이름을 되살리는 일은 과거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오늘의 차별과 권력남용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다. 기억을 멈추는 순간, 역사는 같은 잘못을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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