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진주 토박이다
1962년 진주에서 태어나서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진주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업가를 꿈꾸며 1981년 경상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건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냥 학생 시절 장래희망 설문지에 적어내는 꿈이었다.
2. 탈춤과 만나다. 그리고 <놀이판 큰들>과 마당극
통제받던 시기를 지나 자유롭고 신나는 대학생활을 즐기기 위해 써클(동아리)을 찾던 중, 잔디밭에서 사물 반주에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 하고 바로 가입한 곳이 전통문화예술연구회. 그곳은 탈춤, 풍물(농악), 진주검무를 연희하는 동아리였다. 대도시 탈춤반이 거의 운동권이었으나 경상대는 운동성은 좀 약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매일 춤추고 풍물치고 민중가요를 부르고 술 마시고, 그야말로 신명난 생활이었다.
탈춤은 81년 여름 양주별산대놀이를 시작으로 가산오광대, 통영오광대, 송파산대놀이, 봉산탈춤, 수영야류 등 전국의 다양한 탈춤을 전수하였고, 풍물과 밀양백중놀이 등 타 종목도 전수하였다. 타 대학 탈춤반과 교류도 활발하게 하였다. 풍물은 진주삼천포농악을 전수하여 공연을 하였고, 검무는 여학생들이 진주검무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하다가 그만하였다.
노는 것도 좀 지겨워질 때 군대를 갔고 85년 병역을 마친 후 <놀이판 큰들>에 입단했다. 1984년에 <경상대 전통문화예술연구회> 학생 4명이 학내 활동을 중단하고 사회로 나와 <물놀이패>라는 놀이패를 창단하였고, 창단 공연으로 진주농민항쟁을 소재로 <마당극 진양살풀이>를 공연하였다, 그 후 ,잿밥타령>, <한솥밥먹기>도 공연했다. 학생 신분으로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놀이판 큰들>은 <물놀이패>가 운영하는 공간의 명칭으로, 진주 상대동 쪽의 넓은 들을 뜻하는데, 이후 단체 이름이 <큰들>로 굳어졌다. 이때 <큰들>은 정동주 시인이 마당극 대본을 썼고 조언도 많이 해줬다.
나는 80년대 중후반 <큰들> 대표를 맡으면서 전국의 놀이패(마당극단)와 교류로 외연을 넓히고, 전교조, 농민회 등 지역 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88년에는 진주농민회의 수세현물납부운동을 소재로 직접 극작과 연출을 맡아 마당극 <우리땅에 우리가 간다>를 제작한다. 이 작품으로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 참가했고, <전국민족극운동협회>에 회원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영남지역 놀이패가 모여 <영남마당굿한마당>도 개최하였다. 그 외 대학축전에서 대동놀이 진행, 아카데미 개설, 전시회 개최, 예술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때론 집회에서 풍물을 치기도 했고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88년 8월, 겨우 졸업은 하게 되었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기에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전업예술가가 되기에는 예술적 소질이 없다고 판단한 끝에 <큰들>활동을 접고 경남생명보험주식회사에 공채 1기로 입사하여 1998년 초까지 직장생활을 하였다.
3. 진주오광대를 만나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1996년 시작된 진주탈춤한마당을 알게 됐지만 관여를 하지는 않았다. 97년 여름날 정병훈 교수 등 몇 사람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나가보니 진주오광대 복원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직장생활 중에도 항상 딴따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던 차에 두 말 없이 복원 활동에 참가하였다. 내가 과거 알던 사람들도 복원에 참여시키고 연희부장을 맡아 연습을 이끌어 갔다. 이때는 영업소장을 하던 시기라 낮에도 시간이 나곤 했었다.
60년 만의 역사적인 복원 공연을 마치고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30대 후반에 자발적 퇴직이라니! 돌이켜 생각하면 조금도 깊은 고려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오광대를 그런대로 하면서도 보험회사에서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암튼 그렇게 급여도 아니 주는 진주오광대에 올인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과거 학생 때 배웠던 탈춤의 수준으로는 훌륭한 진주오광대를 만들지 못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양한 춤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경상대학교 민속무용학과에 편입했으나 한 학기를 못 채우고 자퇴를 했다. 학부 생활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고 끈기 또한 부족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승무, 살풀이, 한량무, 지전춤, 진쇠춤, 동래학춤, 진도북놀이, 진도북춤 등 다양한 한국춤을 익히기 시작했다. 물론 선생을 모시고 배우지는 못하고 연수회에 가는 수준, 거의 독학이었다. 부족한 것은 동영상을 보면서 익혔다. 그래서 나는 나를 '야매'라고 했다. 어쨌거나 그것을 토대로 진주오광대 춤이 더 깊고 넓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탈춤의 박제화를 극복하고자 창작탈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광대 회원들 중에는 대학탈춤반 출신이 얼마간 있었고, 또 젊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부족한 실력으로 겁도 없이 극작과 기획을 했다. 진주형평운동을 다룬 <백정>을 제작, 형평운동 80주년 행사에서 공연하였고, 다음 해 일본 수평사 단체의 초청으로 오사카에서 공연을 하였다. 그후 진주농민항쟁을 다룬 창작탈춤도 제작하였다.
복원의 시간이 지나면서, 오광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의욕만 가지고는 불가능했고, 회원들의 의욕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당연히 재정이었다. 유일한 타개책은 무형문화재 지정인데, 문화재 지정의 박제화를 이유로 일부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그 외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정이 되어야만 예산 지원, 전수관 확보 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소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 2003년 경남무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고, 나는 보유자후보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 보유자로 인정받고 지금까지 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4. <진주탈춤한마당>에 빠지다
<진주탈춤한마당>은 1996년 삼광문화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한국 최초의 민간탈춤축전이다. 이 축전을 시작하게 된 것은 김수업 선생님의 제안이었다. 이 축전을 통하여 진주오광대, 솟대쟁이놀이를 복원시켰으니 그 역할은 엄청난 것이다. <안동국제탈춮페스티벌>이 진주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안동시가 엄청난 예산과 행정력으로 축전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을 퇴직한 제3회부터 참가해서 일을 했다. 이때부터 채희완 선생님을 비롯, 지역 딴따라들도 행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다시 시작된 딴따라의 생활은 탈춤한마당으로 풍성해졌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목마름을 해소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많이 만나고, 많이 다니고, 많이 마시고, 많이 놀았다.
탈춤한마당도 문제는 예산이었다. 지자체 보조금 없이 <삼광문화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예산으로는 안정적인 진행이 어려웠고, 그 예산도 나중에는 중단되었다. 10회 이후로는 경상남도와 진주시의 예산을 받아 한국, 중국, 일본이 참가하는 '동아시아탈춤축전'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학술행사를 하여 성과를 축적해나갔기에 전문가들의 평가는 안동보다 좋았다.
나는 집행위원장 역할 외에 중국 공연단 섭외를 하였다. 고려대학교 전경욱 교수의 도움이 컸는데 같이 현지에 가서 직접 공연을 보고 섭외를 하였다. 상해, 지주, 중경 등을 다녔고 나중에 스리랑카까지 갔다. 특히 안휘성 지주시에 갈 때는 명산 황산을 들렀는데 이런 행운 또한 딴따라를 한 덕택이다.
올해로 <진주탈춤한마당>은 28년 째인데 여전히 예산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살다보니 예산은 권력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권력이 없으면 권력과 친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우리 중에는, 아니 많은 딴따라 중에는 그런 인물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5. <풍류춤연구소>를 만들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오광대의 비전업 회원과 다시 전업을 선택한 나는 열정과 욕망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 마산 내서에 춤 강습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모아 <풍류춤연구소>를 창단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주1-2회 춤공부를 하면서 매년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은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창작탈춤(마당극)제작에 집중하였는데 제주 4.3사건을 다룬 <까마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하얀강>, 다문화가정 이야기 <사랑해요 뿡따우>, 진주보도연맹 희생자 이야기 <해원> 등이 있다. 그 외 <운수좋은 날>, <떨거지들> 등이 있다.
개인적인 공연도 많이 하였는데 <춤추는 남자들>, <남무> 공연이 대표적이다. 일본, 이탈리아, 중국, 독일 공연도 하였는데 남는 시간은 여행까지 했기에 행복했다.
6. <진주민예총>을 만들다
우리 지역은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까지도 보수 일색이었다. 시대가 어둡고 암울할 때도 지역 예술인들이 어떠한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예술의 역할, 예술계의 균형, 진보예술인의 조직 등 그런 고민과 필요 속에서 2003년 <진주민예총>과 2005년 <경남민예총> 창립을 주도하였고, 지역문화예술정책 제안. 지역문화예술 이슈 활동. 시국 문제 연대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나는 창립을 주도한 책임으로 <진주민예총> 회장, <경남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정치 환경이 변하면서 지역민예총의 조직과 활동도 많이 약화되었다, 여전히 계속되는 불평등한 보조금으로 사업하기에도 어려움이 많다. 앞으로 어떠한 전망과 목표를 마련해야 할 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예총의 존재와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7. 귀한 분들을 만나다
활동하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훌륭하신 분을 만났다는 것이다.
첫째, <진주오광대> 복원을 시작하고 <진주문화연구소>를 만드신 김수업 선생님,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신 김장하 선생님, 오광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감히 가까이 모실 수 있었을까?
둘째, 채희완 <민족미학연구소> 소장(부산대 명예교수)이시다. 선생님은 80년대 <큰들> 활동을 할 때 만났다. 선생님은 한국의 70년대 탈춤부훙운동과 마당극운동의 선구자이다. 우리 업계에서는 교주로 통하는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탈춤을 추시고, 창작활동도 하시고, “일본군 위안부 해원상생굿” 등 큰 행사도 하고 계신다. <진주오광대> 복원을 지도를 해주셨고 <진주탈춤한마당>의 총감독도 맡아 수고를 해주셨다. 나를 비롯한 전국의 딴따라들이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성장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민족미학연구소>가 매년 진행하는 <중국 동북3성 한국민속예술순회공연>에 참가한 덕택으로 백두산 천지를 몇 번이나 볼 수 있으니 정말 행운이었다.
8. 잠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우연히 기회가 와서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으로 4년을 일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회관 경영에 대해, 다양한 공연 장르에 대해, 행정에 대해, 의회에 대해, 정치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경험이 앞으로의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4년간 급여를 받았기에 척박한 예술가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됐고, 얼마 안 되지만 남은 인생 전업예술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총알이라도 마련된 셈이니 모든 것에 고마울 따름이다. 앞날은 정말 알 수 없다.
9. 진주오광대의 오늘과 내일
2010년에 진주오광대 보유자가 되고나서 줄곧 진주오광대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나는 탈춤 배우러 오는 초중등학생들에게 진주오광대를 이렇게 설명해준다.
"진주오광대는 진주 지방에서 전승되어온 탈춤이며, 현재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진주오광대는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98년 60년만에 복원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진주오광대는 우리나라 가면극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대본 등 총 4가지 대본이 전해져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일제 강점기의 탈이 보관되어 있었어요, 연희자도 한 분 살아 계셨기에 복원에 크게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나와 놀음을 하는 것이죠.
내용은 벽사진경(闢邪進慶), 곧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의식춤인 오방신장춤, 화해와 평화를 놀이하는 오문둥놀음이 있고, 무능하고 무식한 양반을 조롱하는 말뚝이 마당, 타락한 중을 풍자하는 중마당,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영감을 해학적으로 다룬 할미마당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탈춤이 가지는 가치 및 중요성을 강조해 두는 것이다.
"탈춤은 춤, 연극, 음악, 미술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캐릭터별 다양하고 멋진 춤과 재미있는 연희가 핵심이죠. 각종 탈 또한 그 예술성이 뛰어납니다.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울려 한국 탈춤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탈춤 속의 민중의식입니다. 계층간의 갈등구조를 이용하여 그 시대 민중의 염원, 공동체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진주오광대는 구성, 내용, 탈, 역사 등을 볼 때 모든 면에서 다른 오광대에 비해 뛰어난 오광대였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대중들 속에서 잘 전승하고 발전시켜야 함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한국 최고의 탈춤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풍물, 농악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탈춤을 하는 사람은 귀하다. 춤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이것으로는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정책이다. 개인이나 단체의 노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팔자라면 팔자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수 밖에….
10.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탈춤 등재에 대하여
한국 탈춤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의 일차적인 의의는 우리 탈춤의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특징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번 등재로서 한국 탈춤의 현실과 향후 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왔다는 점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인 탈춤을 잘 계승 발전시켜 대중화하고 시대에 맞게 현대화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정부에서는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11. 탈춤의 활성화는 초중등학교 탈춤교육으로부터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체육이나 춤 수업에서 의무적으로 해야 된다고 본다. 단순히 1회성 체험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탈춤뿐아니라 풍물(농악) 등 다른 전통예술교육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아리 활동, 문화재 전승학교 등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 어릴 때부터 우리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우리 전통예술은 조만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결국 정부의 문화정책과 교육정책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12. 진주의 문화예술 과제
이 부분은 짧게 이야기될 부분이 아니니, 일단 예산만 보자. 지자체의 진주시 2023년 세출예산은 1조 9700억인데 그 중 문화예술예산은 23억 9000만 원으로 전체 예산 대비 0.12%로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진주는 예술의 도시이며 유네스코 창의도시이다. 적극적인 예산 증액이 필요하고, 최소 1%는 넘어야되지 않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과거보다 예산은 늘었는데 과연 필요한 곳에 제대로 지원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많은 부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많은 부분을 지자체가 먼저 결정해서 실행하지 말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민간의 의견을 묻고, 민간에게 실행을 넘긴 다음, 간섭하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 요즘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13. 나는 누구인가
광대를 '딴따라'라고 했다. 광대(넓을 廣, 큰 大)라는 말, '딴따라'가 나쁜 말이 아니다.
나는 춤을 좋아하는 게으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은 딴따라다. 이제, 나의 노모는 나를 보고 '가문에 없는 광대가 났다'고 하면서도 공연 등으로 팔도로 다니는 것을 은근히 부러워하신다.
나도 후회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나이에 후회를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나. 이것 저것 고민이 많으면 좋은 딴따라가 될 수 없다. 오로지 딴따라만 하고 살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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