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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형님의 추억, 그리고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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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하 형님의 추억, 그리고 작별

[김지하를 추도하며] 3

1. 담시 '오적'이 준 충격

1970년 가을 어느 날, 마침 정주동 교수의 '홍길동전' 수업을 마치는데 진보적 서클 현대사상연구회의 멤버인 동기 K가 상기된 얼굴로 무언가를 돌렸다. 그것은 프린트 등사본으로 된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五賊)'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거친 갱지에 인쇄된 작품의 어법은 당차고 소름이 돋았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담시 '오적'의 서두

1970년 '사상계'지에 발표된, 세상과 통치자를 깜짝 놀라게 한 작품 '오적'. 시인이 ‘오적(五賊)’이라고 못 박은 것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들이다. 말하자면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 독재시대로 접어든 시기,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비리에 젖은 특권층이다. 나는 강의실에서 이 작품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김춘수 류의 순수시, 박목월 등 청록파, 미당류의 생명파, 기껏해야 소월 ‧ 만해의 시작품에만 익숙한데, 이처럼 폭탄과도 같은 파괴력을 지닌 격정적 시가 가능한 것일까? 충격도 충격이지만 내부의 그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붕괴와 해체, 갈등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소중한 체험이었다.

사실 우리가 분단 이후 배워온 문학사란 것이 대개 왜곡 변조되고 일부의 특성만 강조된 기형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김춘수 시인이 주장하는 순수문학론의 위선과 허구도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문학에 정치적 관념이 끼어드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비판했다. 따라서 가장 혐오하는 단어는 민족 ‧ 민중 ‧ 사회 ‧ 평등 ‧ 혁명 ‧ 현실 등 이런 낱말들이었다. 자신이 일본 유학시절, 불온서적 소지 혐의로 도쿄 세다가야 헌병대 감옥에 갇혔을 때 너무도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었는데, 같은 감방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교수는 사식으로 들여온 빵을 혼자 돌아앉아 맛있게 먹었다. "남들이 달라고 할까봐 등을 돌린 그를 보며 사회주의 ‧ 공산주의가 모두 거짓이고 위선임을 깨달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민족문학 ‧ 민중문학을 비판할 때마다 그 비유를 평생 단골로 거론하곤 했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4월혁명 이후 촉발된 민중적 자각이 신동엽 ‧ 신동문 ‧ 박봉우 ‧ 신경림을 거쳐 마침내 김지하에 다다른 것이다.

장시 '오적'의 파괴력은 놀랍고 대단했다. 낡은 고정관념을 일시에 허물어버리고, 문학의 현실주의 ‧ 역사주의를 심어주었다. 집에 돌아와 읽고 또 읽었다. 내부의 무엇인가가 크게 요동치며 꿈틀거렸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내 문학의 방향과 가치관도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낡은 것과는 과감히 작별하자." 이런 상념이 강렬히 끓어올랐다. 그리하여 김지하란 청년시인의 위상은 한 시대의 물줄기를 선도하고 바꾼 영웅적 문학인이 되었다.

그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어 오랜 감방생활을 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전국 여러 곳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이 열렸다. 주로 가톨릭 천주교회에서 열렸다. 행사장 주변엔 사복형사들이 좍 깔렸다. 그들은 실내에도 들어와 흘끔거리며 사찰했다. 영등포성당, 동대문성당 행사가 뜨거웠다.

그 가운데 몇 집회를 참석하여 놀랍고도 격정적인 분위기를 직접 경험했다. 어떤 참석자는 펑펑 흐느껴 울었다. 그의 존재는 하나의 신화였다. 그는 당시 청년들의 별이었고 우상이었다. 적어도 70년대의 김지하는 그러하였다.

2. 지하 형님과의 가요대전(歌謠大戰)

1985년 무렵이었다. 시인 김지하는 유신시대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생활을 하다가, 박정희 시해 이후 해제조치로 풀려나 전국을 떠돌며 낭인생활을 했다. 그 숱한 유린과 상처, 피멍으로 얼룩진 심신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었으리. 마시느니 술이요, 부르느니 노래였다. 서울 종로의 탑골 주점은 그의 단골아지트로서 낮과 밤의 구별이 따로 없었다. 시인의 주변을 거두고 시종하는 후배들은 이런 술 상무를 하느라 고초가 많았으리라. 한 맺힌 노래를 쏟아놓으면 ‘장강’과 ‘폭포’가 바로 그것을 일러 하는 말이었으리. 한번 부른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면 아무리 잘 부르는 노래도 신선함이 없고 취객의 넋두리로 지겹게 들리기도 했을 것이니, 어느 날 후배 하나가 기어이 김지하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형도 잘 부르지만 저어기 충청도 어드메에 형보다 더 옛노래를 잘 부르는 후배가 있답니다."

김지하 시인은 갑자기 자세를 고치고 발끈 정색하며,

"나보다 잘 부르는 놈이 있다고? 즉시 그놈을 꺾으러 내려가자."

1985년 청주에서의 가요대전의 발단은 이런 경과를 거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종강을 앞두고 기분이 느슨하던 어느 날, 철학과 윤구병 교수가 찾아와 서울의 유명한 선배 한 분이 노래시합 차 청주로 내려온다는 전갈을 했다. 시합도 일방적, 날짜도 일방적,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장소는 불문과의 전채린 교수네 아파트 거실. 약속된 날 청주로 내려온 분은 다름 아닌 김지하 시인이었다. 작가 김성동을 비롯한 좌우시종을 여럿 거느렸다. 전채린 교수는 수필가 전혜린의 아우로, 작고한 영화감독 하길종의 부인이며 배우 하명중의 형수이다. 

무심천변 국밥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밤샘 시합 때 먹을 소주 ‧ 과자 등속을 잔뜩 안은 채 시합장으로 당도하여 좌정하였다. 선수 둘은 길게 서로 마주 앉고 좌우 배심원 넷이 양쪽에 앉았으니 제법 시합장의 긴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배심원은 집 주인 전채린 교수, 작가 김성동, 철학자 윤구병, 그리고 또 누구... 하지만 명색이 시합이니 규정이 없을 수 없어서 머리를 짜내어 마련한 규정은 실로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었다.

① 모든 노래는 2절까지 불러야 기본이다.

② 3절 가사까지 완창하면 플러스 1점

③ 만약 가사를 잊어서 1절만 부른다면 감점 1점

④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실격

⑤ 동요, 가곡, 팝송, 찬송가류는 절대 불인정

⑥ 상대방의 가창 후 3분 이내에 즉시 이어받을 것.

몹시 엄격한 룰이 아닐 수 없었다.

명색이 말 그대로 시합인지라, 여러 날 전부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긴장이 몰려왔다. 복통 ‧ 헛기침 ‧ 숨 가쁨 ‧ 빈뇨 ‧ 허리 결림 ‧ 눈 깜빡임 따위가 한꺼번에 발생하여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로서도 어떤 대비가 없을 수 없어서 시합 전날 밤 명함 크기의 백지 앞뒷면에 내가 알고 있는 노래의 제목을 줄여서 적었다. 이를테면 <비 나리는 고모령>이라면 '고모령' 세 글자만 메모하였다. <홍도야 우지 마라>는 당연히 '홍도'였다. 잘 아는 노래라도 시합의 긴장 속에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제목과 가사의 실마리를 잊어버리기가 십상이었던 것이다.

이 방법은 그날 시합 중 크게 도움이 되었다. 초저녁 8시경부터 시작한 노래시합이 이튿날 새벽 5시 반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그야말로 장엄하게 펼쳐진 것이다. 한 곡 끝나면 바로 이어받아 또 한 곡, 아마도 추정컨대 2백곡은 충분히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줄기차게 이어가니 중간에 멀쩡히 알던 노래가 첫 대목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메모를 슬쩍 꺼내보며 다음 부를 곡을 찾았던 것이다. 처음엔 장난기를 머금고 시작한 시합이 자정을 지나고 새벽 두세 시가 넘었을 때 방안에는 승부를 가리는 두 선수의 팽팽한 초긴장으로 가득하였다. 그런데 나는 시합에 이기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그 시각에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김 시인의 가창은 온몸을 쥐어짜듯 팔과 머리를 휘저으며 무리한 큰 동작이고 땀도 줄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보이는데, 나는 앉음새 하나 고치지 않고 낭창하게 소리의 결도 시종일관 잔잔하고 차분히 펼쳐가니, 김 시인은 이런 내 모습에 한 순간 피로의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기어이 새벽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잔인한 시합은 계속되었는데, 5시 반이 가까울 무렵 김지하 시인이 뒤로 쌓아놓은 이불에 등을 기대고 뒤로 벌러덩 쓰러지면서

"에익, 누가 이 따위 시합을 하자고 했나~~ 징그럽다 징그러워~~"

옛 가요 청주대전은 이렇게 장엄한 막을 내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김지하 시인과 형언할 수 없는 정이 듬뿍 들었다. 김시인이 원주기독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는 아픈 소식을 듣고 간까지 상했다는 말에 마음이 짠하고 애달파져서 특효약 간 세척제 당두중을 보내드리기까지 했었다. 그리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우리는 서로를 오래 잊고 살았다.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그가 연재했다는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1980년대 중반 청주 노래시합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조용필 아우와의 노래시합을 끝내고 충북 청주까지 내려가 충북대학의 시인 이동순 아우와 밤을 꼬박 새우며 노래시합을 벌인 결과 내 스스로 항복을 선언했으니, 이동순 시인이 뽕짝의 2, 3절까지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하여 그것을 들고 설치는 통에 그의 승부심에 항복해버린 것이다."

사실 그날 이후로 김 시인은 노래시합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시인 이재무가 인터뷰한 글 하나가 유일한데, 가요대전 패배에 관한 소감을 묻자 "그는 노래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 당할 도리가 없었지."라고 웃어넘긴 것이 다였다.

가요대전이 있은 후 얼마 지난 어느 날, 윤구병 교수가 내 연구실로 찾아와 무언가 전할 게 있다고 했다. 누런 봉투 안에서 꺼낸 것은 지하 시인이 특별히 그려서 화제까지 쓴 아담한 난초 한 폭이었다. 화제의 글귀는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즉 "암자 속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암자 밖의 현실을 전혀 모른다"는 경구였다.

나는 몇 번이고 그 화제를 곱씹어 음미해보며 그걸 보낸 뜻을 헤아렸다. 내가 그간 암자 속에만 갇혀 지낸 고립적 ‧ 폐쇄적 삶에 대한 반성의 촉구이기도 했다. 낙관은 따로 없고 오른쪽 무인(拇印)을 그대로 빨갛게 찍은 생생한 작품이었는데, 나중에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난초를 보니 지하의 난초는 영락없는 무위당 필법의 전승이었다.

3. 독서회 '명이(明夷)'의 추억

1987년 가을이던가. '명이(明夷)'란 이름의 독서회가 발족했다. 멤버는 최원식, 송기원, 김성동, 이시영, 그리고 청주의 나, 이렇게 다섯이다. 그 인물의 선정과 독서회 명칭까지 정성껏 지어준 이는 김지하 시인이다. 유신시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차디찬 감방에서 가혹한 옥중생활을 보내던 그는 독재자 박정희가 시해된 후에야 감옥에서 나왔다. 그 기간 동안 전국 도처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이 열렸고 국제 엠네스티에선 석방을 줄곧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투옥된 시인을 더욱 억압하고 옥죄어들며 가파른 죄수생활을 연장시켜갔다. 그 고난의 세월이 무려 7년이나 되었다.

출옥한 김지하 시인은 원주에 머물며 지학순 주교와 자주 만나고 격려를 받았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난초 필법을 수련하면서 해방의 자유를 누렸다. 가끔 바람처럼 서울 나들이도 하며 문단후배들과도 즐겁게 술자리에서 어울렸다. 그런 어느 날 김지하 시인이 문단의 쓸 만한 후배 다섯을 가려 뽑고 민족문학 발전을 위한 재목이 되기를 갈망했으니 위의 다섯 명단이 그 주인공들이다.

'명이(明夷)'란 이름은 주역에 등장하는 36번째 괘로 해가 뜨기 직전의 시간, 즉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있는 밝음을 뜻한다. '지화명이(地火明夷)'에서 유래된 말이다.

첫 번째 모꼬지를 인천 율목동 최원식의 댁에서 했다. 텍스트는 슈퇴릭히(H. J. Stoerig)의 "세계철학사(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였는데, 임석진 번역으로 분도출판에서 나온 그 책의 전반부를 미리 읽어서 메모해 갔다. 토론은 진지했고, “세계 철학의 변화와 흐름이 한국의 현실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는가? 우리 시대가 당면한 해법은 무엇인가?” 주로 이런 점에서 접근했다. 최원식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구체적 전거와 자료 제시, 인물에 대한 순간적 평가가 과연 놀랍고 기민하고 정교하였다. 모두들 탄복하며 비평가의 해석에 동의하였다.

이 토론시간보다 훨씬 길고 즐거운 것이 뒤풀이 주흥시간이었다. 최원식 댁에서는 생선회와 박대 찜이 나왔다. 부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솜씨란 말의 유래는 '손+씨'에서 온 것이라 그 댁 부인의 손을 자꾸 보게 된다. 인천, 서해안에서만 잡히는 수산물 요리가 상 위에 그득하게 올랐다. 모두들 대취하고 주흥이 도도해져서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 수지무지 족지도지. 이런 흥취의 동작들도 겸했다.

다음날 새벽, 송기원이 먼저 일어나 잠에 취한 모두를 흔들어 깨웠다. 하던 버릇으로 함께 목욕을 가자는 뜻이었지만, 고양이처럼 물을 싫어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김성동이었다. 다들 가까운 대중목욕탕을 찾아서 입장하는데 그는 굳이 사양하며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하지만 웬걸, 목욕탕에서 말끔한 얼굴로 나오니 소설가의 존재는 표연히 사라지고 없다.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는다. 첫 번째 모임은 그렇게 끝났다.

지하 시인이 명이(明夷)라는 상징적 함축을 가진 모임에 문단 후배 다섯을 고르면서 이동순을 포함시켜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지하 시인은 청주 가요대전에서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자세 하나도 흩트리지 않은 채 목과 어깨에 힘 하나 안 넣으며 호리낭창하게 무수한 옛노래들을 불러젖힌 새까만 문단 후배가 꽤나 맹랑했던가(또는 흐뭇했던가) 보았다.

4. 김지하 시인의 친필편지

김지하 시인이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난 얼마 전, 옛 편지들을 모아놓은 파일북을 꺼내어 보다가 지하 시인의 육필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에 대한 소회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청주 노래시합을 다녀간 지 서너 달 뒤일 것이다. 지하 시인에 대한 소식이 들리는데, 알콜 의존증이 심해지고 정신분열도 찾아와 원주기독병원에 입원 중이며 간까지 급격히 나빠져 위험하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긴급히 보내드린 건 내가 특효를 보았던 당두중이다. 나도 간이 안 좋아서 약을 써봤던 것인데, 그 약을 받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편지였다. 약 일곱 장 분량의 장강대하로 쓴 편지로 거기엔 기상천외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는데 내 무덤은 한반도 중허리에 쓰고자 한다. 그 장소가 아마도 청주 부근이 될 것이다. 청원군 어디메쯤 무덤을 쓰면 내 무덤에 자네가 자주 와서 주변을 보살피고 내 이름이라도 종종 불러다오."

이게 편지의 대강이다. 말하자면 당신 무덤의 능참봉, 묘지기가 되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서찰이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써서 보내놓고도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리라. 무언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일필휘지로 갈겨 쓴 격정의 편지였는데, 왜 그런 서한을 나에게 써 보내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노래시합으로 야릇한 정이 들기도 했고 또 내가 보낸 선물에 대한 화답의 표시였겠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벅차서 나는 한번 읽고 무슨 비밀경전처럼 곧장 깊이 감춰두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긴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옛 편지를 꺼내보는 느낌이 각별하다. 살다보면 이런 불가해한 기록물도 갖게 되는가 보다.

김지하 시인의 친필편지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갖고 있다. 1986년 여름날 새벽, 정신과 병동에서 써 보냈다. 그가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하던 시절의 글이라 이걸 공개하는 일에 많이 주저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르고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아주 떠나셨다. 이제는 공개해도 된다는 판단에서 오늘 이 편지를 내놓는다.

東洵에게

지금 강원도 원주, 새벽 4시 정각, 병원 스테이션에서다.

이제부터 네게 띄우기 시작할 긴 편지의 시작 치고는 꽤나 어울린다. 간 때문에 입원했다더니 치료는 됐는지? 나 역시 간 때문이고 술 때문이고 미친 못남 때문이다. 난 본디 편지쓰기를 싫어했는데, 간절히 편지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 편한 마음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내가 만약 밖에 있다면 <김지하 장례식>부터 치루고 싶다. <김지하>라는 이름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다. 내겐 봄이 시작되는 건가? 허물을 벗게? 나뭇가지를 물어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누워 제 자신을 불 지르고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사막의 불사조가 되려는 것인가? 여하튼 <김지하>라는 이름을 불 질러 버리고 싶다. 그래서 본디 어버이가 지어주신 내 이름, <김영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혼자 해도 좋으나 네가 곁에 있어도 좋겠다. 몇 명 더 있어도 좋고 싸구려 잡지 카메라가 있어도 좋고--.

새로 태어난 <김영일>이 새로 살고 싶은 땅은 청주 어디쯤이다. 한 달 전 문득 술 취해 청주에 갔다가 원주 친구들에게 붙들려 돌아왔다. 나는 영영 청주에 못 가는 것일까? 東洵이를 만날 수는 없는 것, <영일>에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건가? 가고 싶다. 하루에도 몇 백번 씩 가고 싶다. 그러나 나의 땅은 아닐 터. 나는 죽도록 떠돌 것이다. 나는 이미 지옥에 가도록 결정 지워진 사람. 무간지옥이 약속된 슬픈 여생. 만약 앞으로도 글을 발표한다면 <영일>로 할 것이다. 장례식이 필요하겠다.

東洵.

애린은 바로, 죽어 다시 태어나는 애린은 바로 나였다. 나는 땅 끝까지 밀려가 파도처럼 사라졌다. 여기 지금 네게 편지 쓰고 있는 건 <영일>이다. 떠돌이 <영일>로 나는 다시 떠난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무간지옥에 이를 때까지 울며 떠돌 것이다. 삶의 뜻을 물으며. 그 첫 목적지가 淸州인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우선 비밀로 해다오. 그곳에 사글세방을 얻어 명상과 시작(詩作)과 그림을. 떠나야 할 때가 오면 떠난다. 지금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병원이다. 원주가 아니라 병원이다. 모두 낯설다. 슬픈 하루하루 외로운 시간 시간이다. 시를 못 써도 좋다. 그러나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건 아이들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책임이다. 죽지는 않겠다. 데려갈 때까지. 아아, 내가 지금 네 곁에 있다면 수많은 황금강물의 모래와 숱한 푸른 비단실의 시들을 구술할 텐데---

언젠가는 퇴원할 것이고 언젠가는 가겠다. 그러나 그때 가는 건 <김영일>이다. 손이 또 떨린다. 지금이 4시 반, 다섯 시까지만 쓰겠다. 네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네 주위에 틀림없이 '활동하는 빈 눈'이 있어 나를 그 무(無)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나는 반드시 갈 것이다. 나를 끌어당기는 내 속의 활동적인 무(無), 그 신명에게로 내가.

다시 말한다. <김지하>는 죽었다. 이제부터 나를 <김영일>이라 불러다오. 언제일지 모르지만 장례식은 청주에서 하자. 조사(弔辭)는 네가 써다오. 또 새벽에 쓰마. 허나 놀라지 마라. 예상되었던 것이니까. 안녕.

1986년 7월 5일 새벽 4시 35분

영 일

▲김지하의 자필 편지 ⓒ이동순
▲김지하의 자필 편지 ⓒ이동순

김지하 시인은 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민주화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줄곧 추앙되고, 활화산 같은 그의 시는 꾸준히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시인에 대한 독자들의 극진함은 평상을 넘어 거의 독보적 ‧ 신화적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엄혹하던 시대도 지나고(혹은 끝나지 않고) 옥중의 시인도 풀려났다.

이후로 세상은 급격히 변화했고(혹은 변하지 않았고) '김지하'란 이름은 점차 잊혀져갔다. 청년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더불어 시인 자신은 과거 자신이 짊어졌던 '김지하'란 막강한 이름이 몹시 불편하고 힘들었다. 너무 무겁고 커다란 모자를 쓴 것 같았다. 시인은 자신이 설정한 이름, ‘김지하’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과거시간의 구속과 제약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고정된 필명과 인식, 그 이름이 요구하는 가혹한 관점의 중량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음주, 일탈된 행동으로 숨어도 보았지만, 건강만 상했을 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복되는 극악한 환경 속에서 자학과 파괴의 표현충동이 항시 들끓었다. 어딜 가나 '김지하'란 이름에 대한 요구와 기준은 굳게 설정되어 있었고, 만약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호된 비판이 뒤따랐다. 시인은 그러한 불편과 부담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뜬금없는 탈각충동과 힌두교식 화장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영일’이라는 본명은 때 묻지 않은 본향이며 순결한 세계였다. 시인은 그 본향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랜 관습 속에 살아왔던지라 누군가가 지켜보아야 했다. 이를 확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주변엔 아무도 보증인으로 나설 사람이 없었다. '카메라'와 '싸구려 잡지'란 통속적 도구를 돌연히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돌연히 내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의 연장이다. 낡고 때 묻은 이름 '김지하'를 영결해야 했다. 그 이름을 영구 폐기할 장소로 선정된 곳은 청주, 한반도의 가장 중허리 지점. 그곳에 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간지옥이 약속된 슬픈 여생'

이 짧은 구절에 그의 총체적 심경이 서려있다.

나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다는 ‘애린(愛隣)’ 당시 그는 이 단어의 관념성이 주는 심리적 강박에 줄곧 빠져있었다. 그런 제목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애린’을 방향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복귀와 회복을 갈망한다. 그 덧없고 실속 없는 지향과 충동 속에서 현재라는 시간성은 오로지 고통과 속박의 시간이다. 병실의 시간이며 불구의 환경일 뿐이다.

그런 열악한 터전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내면의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다. 그것을 자신은 '신명'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연결과정에서 문득 떠올린 청주장례식은 다만 충동적으로 설정한 가공의 의례일 뿐이다. 끊임없는 시련과 자해적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원주기독병원 정신과 병동으로 들어갔다.

이 편지는 바로 그 무렵에 쓴 것이다. 심한 고통과 자괴(自愧)가 눈물자국처럼 보인다. 김지하라는 한 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불행이었다.

5. 지하 형님을 떠나보내며 - 조사(弔辭)

느닷없이 지하 형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아우의 가슴 속에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래서 예전 1986년 7월 5일 새벽, 저에게 직접 써 보내신 편지를 꺼내봅니다. 형님께서는 '지하'란 이름의 무게를 대단히 힘들고 불편하게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 이름으로 썼던 여러 시작품들, 그 이름 때문에 겪었던 온갖 고초와 박해의 시간들, 그것으로부터 훨훨 벗어나 홀가분한 자유의 시간을 갈망하셨습니다. 한 인간에게 짐 지어진 이름의 굴레는 너무도 거추장스럽고 무거웠습니다. '김지하'라는 이름에게 요구하는 대중들의 강박은 몹시도 거북하고 불편했지요. 그래서 본명 '김영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소원을 생시에는 이루지 못하고 사시다가 별세 후 드디어 본명 '김영일'을 회복하셨네요. 빈소의 영정사진 밑 '김영일'이란 이름이 오늘 따라 한층 빛나는 광채로 느껴집니다. 형님께서는 당신의 장례식을 제가 살고 있던 충북 청주에서 하고 싶어 하셨고 그 장례식의 조사를 저에게 쓰라고 그토록 이르셨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네요.

드디어 '김지하'라는 허명에서 벗어나 본명 '김영일'로 돌아간 형님!

사진 앞에 서서 눈을 감고 명복을 빕니다. 1985년 그 뜨겁던 여름, 청주의 전채린 교수 댁 거실에서 윤구병, 김성동 둘을 심판으로 앉혀놓고 형님과 둘이 마주 앉아 꼬박 밤을 새며 무려 10시간 동안 노래시합을 펼치던 그날 밤의 뜨겁던 분위기가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언젠가는 김지하문학관이 건립되어야 할 형님의 고향 목포 유달산(鍮達山) 자락 유달동에서 잠을 깨어 이 아침 저는 슬픈 조사를 써서 형님께 바칩니다.

형님! 이 남루한 지구의 삶을 견디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평안히 떠나가소서.....

▲김지하 시인의 영결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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