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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가 시대에 역행한다고?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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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가 시대에 역행한다고? 아니!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10

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 일단 우여곡절 끝에 폐지하지 않고 현행을 유지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도서정가제의 쟁점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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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즈니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며 온라인 스트리밍 사업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디즈니 '눈물의 정리해고'…인력 25% 구조조정, 한국경제)요점은 간단하다. 대규모 자본을 들여 제작하는 영화 사업에 주력하지 않고, 소비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스트리밍 플랫폼에 더 많이, 더 빠르게 유통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 오늘날의 콘텐츠 산업은 누구나 유행하는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옷을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유통한다는 패스트 패션과 유사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패션에 관심은 없었지만, 어쩌면 이게 지금 출판 시장과 가까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정가제 이후를 패스트 패션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도서정가제 이후 할인 판매 시대가 끝나고 기획 출판 시대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출판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은 '취향', '소확행' 등의 단어였다. 나는 그것들이 출판계가 유행에 민감해진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기획'이라는 말 뒤에는 항상 패스트 패션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다품종 소량 생산’에 대한 고민이 따라왔다. 책의 판매가 줄어들고, 안 팔리는 책을 할인으로 팔 수 없게 되며 자연스럽게 나온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인들은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을 뺀 가벼운 책들이 성공했고, 저렴한 문고판이 귀환했고, 온갖 시리즈 기획이 나왔으며, 다른 산업군에 있는 기업과 콜라보하거나, 온갖 굿즈를 끼워 책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은 할인 판매로 많이 팔아서 많이 남긴다는 규모의 경제 논리가 끝나고 나온 시도들이다. 의식했든 안 했든 범위의 경제를 출판인들이 실천하면서 낸 답들로 봐야 할 것이다.

대량 생산, 대량 판매와 소비 트랜드

출판은 제조업이고 제조업인 이상 대량 생산, 대량 판매가 되지 않으면, 결코 이익을 남기기 어렵다. 의류 업계처럼 출고가 기준 마진율이 60%에 육박하는 산업(아웃도어 제품 왜 비싼가, 중앙일보)이라면 이 제조업의 법칙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출판은 어림도 없다. 출고가 기준 마진율이 10% 내외에 불과한 출판계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은 힘들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답을 찾아서 성공하고 있다. 우리는 그 점에 좀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대량 생산, 대량 판매를 하지 못해서 어렵다는 것이 정말 도서정가제를 폐기할 이유가 될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이미 콘텐츠 산업은 패스트 패션처럼 되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도서정가제를 폐기할 수는 없다. 그건 출판사에게 시대에 역행하라는 것과 같다. 그것이야말로 출판을 죽이고, 독자를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결국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자(소비자)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종이매체일까. 아니다 온라인 미디어다. 유행하는 혹은 취향에 맞는 수많은 온라인 콘텐츠 소비에 익숙해진 독자에게 이미 익숙해진 소비 패턴을 버리고 책만을 위한 별도의 소비 패턴을 가져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능할까? 싸게 팔 테니, 취향을 버리고 일단 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당장 돈 몇 푼이 궁한 것도 출판의 현실이다. 누구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도서정가제 폐지도 답은 아니다. 쌓여 있는 책들, 기획에 실패한 책들, 팔지 못한 책들 이것들을 소비자에게 넘기는 것이 도덕적인 출판일까? 이게 오늘날 기업윤리를 강조하는 소비자들을 대하는 출판사의 기본자세로 삼아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처: http://www.openads.co.kr/content/contentDetail?contsId=5182

구글과 네이버의 검색 관련 데이터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고객들은 복잡한 구매 여정 속에서 어떻게 구매 결정을 내릴까요?, 오픈애즈) 구글 트렌드와 네이버 트렌드를 조회하면 오늘날 소비자들은 저렴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찾으려고 검색하고 또 검색한다. 이런 소비자에게 우리는 어떤 책을 어떻게 팔아야 할까. 무엇이 독자가 찾는 최고인지를 인지하고 그에 맞는 책을, 콘텐츠를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도서정가제 이후 출판은 다른 산업의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랜 시간 출판의 변화를 막아 주던 할인 판매라는 보호막은 사라져 버렸다. 출판사들도 변화하고자 기존에 없던 말들을 쓰면서 몸부림치고 있다. 편집자는 갑자기 기획 편집자가 되었고, 영업자는 마케터가 되었다가, 최근에는 기획 마케터로 불리기 시작했다. 저 명함에 각자 어떤 역할을 집어넣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무엇이든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도화하고, 브랜드를 선진화하고, 자생하기 위해 팔 수 있는 콘텐츠를 연구하라는 것이다.

콘텐츠 경쟁 시대, 도서정가제는 출판을 자본주의에 걸맞게 바꾼다

그렇게 진정한 콘텐츠 경쟁 시대가 왔다. 비록 나의 출판 경력이 얼마 되지 않지만, 요즘처럼 모든 것이 경쟁자로 보인 적은 최근 몇 년의 일이다. 유사 도서, 기사, 유튜브, 블로거, 팟캐스트, SNS, 오픈마켓의 상품 소개 등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콘텐츠가 다 경쟁자 같다. 물론 때로는 협력자가 되기도 한다.

이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된 자사 플랫폼도 없이, 그저 서점이라는 동아줄 하나에 매달려 책을 알리고 있는 출판 관계자들이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인력과 자본 문제로 고작 이 정도 마케팅밖에 하지 못하는 이 산업의 상품을 찾아서 구매하는 독자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콘텐츠가 가진 힘이 아닐까. 필요한 콘텐츠는 어떻게든 독자들이 찾아낸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다. 패스트 패션 시대의 콘텐츠에 익숙한 독자들은 도서정가제 이전 시대 독자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온라인 시대가 되며 마케팅에서 소비 패턴의 변화를 언급할 때 이제는 깔때기 구조가 아니라 물고기 구조를 말하는 것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똑똑한 소비자를 위한 고객 중심 전략, LG디지털디자인연구소) 나는 도서정가제가 없어진다고 해서 이 소비자가 다시 이전 소비자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출처: 캘리 무니의 구매물고기 모형 http://www.resource.com/2012/07/updating-the-outdated-consumer-journey/

도서정가제 시행 이전에도 신간 밀리언셀러는 대부분 할인 판매를 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밀리언셀러가 있었나? 신간, 할인 없음이라는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도 요즘은 밀리언셀러가 없다. 나는 이 답을 독자가 사라졌다에 보지 않는다. 그냥 콘텐츠 시장에 패스트 패션이 온 것뿐이다. 많이 팔리는 책만을 콘텐츠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여러 종류의 책과 각종 온라인 콘텐츠를 소비할 뿐이다. 시청률 60% 이상의 허준 같은 드라마가 다시 나오지 않는 이유도 매한가지라고 본다.

그러니 도서정가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소비자를 위한 정책이 맞다. 기업 윤리를 중시하고, 취향 소비를 하고, 필요에 따라 값에 구애받지 않는 소비자를 위한 정책이 맞다. 출판사는 어떤가.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 실패에 대한 책임감은 전에 없이 높아졌다. 도서정가제를 한다고 해서 출판계에 정부 지원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기에, 출판인이 기업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전에 없이 높다. 전에 없이 비즈니스화 되고 있다. 이게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도서정가제 시행을 원하는 출판계, 스스로 힘든 길 가는 이들을 지지해 줄 수는 없을까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은 도서정가제를 출판계 스스로가 원한다는 것이다. 할인 판매라는 어쩌면 더 쉽게 책을 팔 수 있는 길을 두고 더 힘든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독자에게 더 냉정히 평가받고, 다른 콘텐츠 산업과 싸우겠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 의지라면 도서정가제를 더 지지해 주는 것은 어떨까. 더 노력해서 더 강한 원천 콘텐츠를 개발해 보라고, 더 나은 유통환경을 만들어서 산업 전체를 선진화해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자리가 생기면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닐까? 도서정가제 이후 생긴 독립서점과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독립출판의 생산성도 잘 들여다 봐주면 좋겠다. 이렇게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주면 좋겠다.

▲출처: 네이버 데이터랩 독립서점 검색 추이, 해마다 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이 비싸다는 말을 하지만 책의 마진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소비자가 싫어하는 책값이 적당한 값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늘날에는 책을 다양하게 만날 여러 길이 있으니까. 출판 콘텐츠가 발전하여 송곳처럼 독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날이 온다면, 그 길은 자연스럽게 열릴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은 책을 온라인 강좌로 만들 수 있고, 웹툰이나, 드리마 혹은 영화로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독자가 책값에만 시선을 둘 필요는 없게 될 것 같다. 책은 책이 담고 있는 콘텐츠가 제공할 수 있는 많은 서비스 중 하나가 될 것이니까. 독자도 취향에 맞게 서비스를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

결국 중요한 건 독자니까. 가격으로 독자를 속이지 않고, 좋은 콘텐츠로 독자를 유혹하고, 서비스로 독자를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서점에게는 밀어내기가 아닌 협업을 부탁해야 할 것이다. 서점도 출판사도 콘텐츠를 바른 값에 팔지 않으면 자생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아마 이 모든 것은 서로에게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조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합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윈윈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당장 나 자신에게도 그리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합리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나는 도서정가제라는 법 아래서 출판계가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지 않는 법을 배워서 성공이라는 빛을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도서정가제를 응원한다.

김영수는 출판사 직원으로 10여 년을 일했다. 출판사에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와 같은 책의 출간을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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