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가 올해 11월 20일까지 재검토를 앞두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변경으로 바뀌는 것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불안한 책의 미래
1964년 유네스코는 책을 이렇게 정의했다. 작년 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제껏 읽어온 책이 이 정의를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정의가 유지될까.
첫 어절 “펼쳐보다”부터가 위태롭지 싶다. “49쪽”이 어떻게 산출된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이기 위한 최소한의 두께를 의미할 것이다. 지금까지 책은 일정 분량의 인쇄된 종이가 묶여서 덮여 있는 모양새였다. 책은 펼쳐야 한다. 한 장씩 종이를 넘겨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사람들은 점점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을 손에 들고 손가락으로 종이를 넘기는 게 아니라 화면을 터치하고 있을 것이다.
“펼쳐보다”만 위태로운 게 아니다. “인류의 사상”, “인간의 지적 활동”. 앞으로 책을 정의할 때 이런 거창한 표현이 필요할까. 이미 책은 수명이 짧은 기호품이 되어가고 있다. 개개인의 욕구와 취향에 따라 그때그때 즐기고 버려지는 소비재가 되어가고 있다.
책이 나를 읽을 것이다
인생의 책. 이런 표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술회할 때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만난 어떤 책으로 이야기가 번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내게도 십대 때 인생의 책과의 만남 이후, 책을 펼친다는 것은 설렘과 혼돈, 모험과 시련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일이었다. 내게만 일어난 일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책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의미를 추구하고 성장을 바라는 이들에게 어떤 통과의례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책을 찾아 나서기 전에 책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미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우리를 향해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고 있다. 이용자가 선호하는 장르, 스토리, 시청패턴을 파악해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눈요기 거리라는 차원에서) 유튜브, 넷플릭스와 힘든 경쟁을 해야 할 전자책에도 머잖아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전자책을 읽을 때 안면인식 기능과 생체센서를 내장한 전자책 리더기의 알고리즘도 우리를 읽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장에서 심박수가 빨라지고, 어떤 부분을 그냥 넘기고, 어떤 책을 주의 깊게 보는지를 데이터로 축적해 우리 대신 다음 책을 골라줄 것이다.
읽다에서 보다로
여기서 ‘펼쳐지지 않음’은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라는 물리적 형태의 변화를 넘어서 책의 의미, 책과의 관계성 자체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사태를 뜻하게 될지 모른다. 과거 우리는 나를 아는 타인에게서 책을 추천받곤 했다. 내가 모르던 책을, 나를 아는 타인이 꼭 읽어보라고 권해줬다. 친구에게서 책을 건네받을 때 나는 그 책을 대하는 친구의 시선도 건네받았으며, 책을 읽으며 친구의 마음도 읽었다. 책과 함께 타인이, 타인의 사고가 나를 찾아오고 흔들었다.
현재는 대체로 미디어가 우리에게 책을 추천해준다. 미디어는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이유로 책을 추천하며, 미디어가 추천하면 많은 사람이 읽는다. 다만 미디어는 딱히 내게만 그 책을 추천한 게 아니라서 막상 읽어보면 실망하는 때도 많다. 하지만 앞으로 똑똑한 알고리즘은 나를 잘 알아 훨씬 만족스럽게 책을 골라줄 것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의 추천에 따를수록 책을 통한 경험세계는 좁아질지 모른다. 알고리즘은 나의 성향과 선택 패턴을 파악해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줄 것이며, 추천된 책은 나의 기호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책은 유튜브, 넷플릭스와 경쟁하기 위해 시청각적 요소를 가미하고 가능하다면 증강현실도 도입해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그때는 ‘읽다’보다 ‘보다’가 책에 더 어울리는 동사가 될 것이다.
펼침과 주름
여기서 ‘펼쳐지지 않음’은 미래의 책-형태의 특성일 뿐 아니라 미래의 책-체험의 속성이 될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책의 ‘펼침’, 그것은 책의 ‘접힘’에서 비롯된다. 여러 낱장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덮여 있다. 낱장들은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접힘, 개념적으로는 ‘주름’이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주름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책-체험이 모험일 수 있는 까닭도 책 읽기가 주름 속 헤매임과 헤어나옴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접힘(implication)과 펼침(explication)이라는 책-운동. 그래서 책은 그 판형보다 넓고 두께보다 깊다.
때때로 우리는 책의 주름 속에 빠져 자신의 통념 바깥으로 나서는 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주름 속 헤매임과 헤어나옴이 자기 사고의 관성을 응시하도록 유도하고, 사유하지 않았음에 관한 사유를 촉발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때로 자신에게로 깊이 들어가고, 때로는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야 했다. 책의 주름은 자신의 주름과 만나고 책의 펼침은 자신의 열림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책 목록에서 중요했던 한 가지 기준은 책의 주름이 깊은지였다. 주름이 깊을수록 펼침은 강렬하고 책-경험은 깊이 남았다. 하지만 앞으로 알고리즘이 우리의 기호에 맞춰 추천해줄, 눈으로 화면을 가볍게 서핑하며 즐길 책들을 통해 우리의 정신은 과연 깊어질 수 있을까. 펼쳐질 수 있을까.
긴박한 책의 현재 : 도서정가제와 소비자 후생
그런데, 책의 미래를 우려하기에 앞서 책의 현재가 긴박해졌다. 도서정가제 문제 때문이다. 책의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도서정가제는 어디서나 출판사가 정한 책값대로 판매하도록 규율하는 제도다. 현재 한국의 도서정가제는 10% 할인, 5% 적립을 허용하고 있어 부분도서정가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행 도서정가제는 2014년 11월에 마련되었다. 3년마다 제도의 타당성을 재검토하는데, 2017년에는 '유지'로 결정되었고 올해 11월 20일까지 다시 결론을 내야 한다.
작년 7월, 13개 출판·전자출판·유통·소비자 단체가 참여한 민관협의체가 구성되어 논의를 이어왔고 ‘유지’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7월, 문체부가 갑작이 재논의를 통보하며 도서정가제 문제가 불거졌다. 문체부는 ‘소비자 후생 고려’를 재논의의 이유로 밝혔다. 이를 출판계는 '책값 할인 폭'을 높이는 쪽으로 현행 도서정가제를 변경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소비자 후생’이란 무엇일까. 책값 할인폭이 커지면 ‘소비자 후생’이 증진될까. 2019년 9월 10일, 오픈마켓 운영자의 출판문화산업진흥법(도서정가제) 위반 사건(대법원 2019마5464) 결정에서 대법원은 도서정가제의 입법취지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대법원의 해석에 따르면 현행 도서정가제가 소비자를 위해 마련된 것인데, 어째서 문체부는 소비자 후생을 명목으로 도서정가제를 위축시키려는 것일까. 이리하여 초래된 도서정가제 문제를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작아서 깊은 책방
사실 나는 편향적이고 고루하며 소수인 소비자다.
사서 보는 책은 소위 인문사회과학서적 류의 비인기 도서가 대부분이고, 종이책이 발간되었으면 전자책을 고르지는 않으며 웹툰이나 웹소설은 거의 접해본 적 없고, 온라인서점만큼이나 책방에서 책을 구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온라인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위주로 구매하거나 일상적으로 웹툰, 웹소설을 보는 독자와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그런 일개의 소비자로서 도서정가제 문제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고민의 계기는 십년 넘게 드나들던 책방이음이 문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대학로에 오랫동안 거주한 내게 그곳은 동네책방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었다.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고 싶을 때 책방이음에 가서 책방지기 조진석 씨에게 종종 조언을 구했다. 그러면 그가 관련 서적을 추천해줬다. 딱히 어떤 책을 사야지 계획이 없던 날에도 책방을 찾아가 서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다보면 발견하는 책이 생겼다. 내게 이 책을 읽어보라며 권해주는 친구가 지금 곁에 없더라도, 내게는 찾아갈 책방이 있었다.
책방이음만이 아니다. 책방, 즉 작은 서점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고 찾아가면 그 개성을 향유할 수 있다. 분명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작은’ 서점이라서 생겨나는 일이다. 공간이 좁으니 적은 종수의 책만을 둘 수 있고, 따라서 진열할 책을 세심히 선별했을 것이다. 운영자가 책방의 규모, 임대료, 인건비에다가 책방의 지향성, 판매가능성까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꽂혀 있는 책들이다. 책 선정만이 아니라 책 진열에도 운영자의 고심, 따라서 책방의 개성은 담겨 있다. 작은 서점들이 구비한 종수는 500종에서 2000종 사이로 엇비슷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책세계를 펼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독립’서점이다.
책방이음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나의 해박한 큐레이터, 나의 묘한 도서관, 나의 고유한 책세계 하나가 사라진다. 그 상실감에 도서정가제 문제를 소비자인 나 자신의 일로 삼아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대폭 할인이 허용된다면
현행 도서정가제의 유지 내지 변경은 나 같은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단 검색을 해보니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한국서점조합연합회 등이 통계청 자료, 문화체육관광부의 '콘텐츠산업통계', 대한출판문화협회 '납본통계'를 바탕으로 밝힌 몇몇 가지 통계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전반적 증가 추세를 모두 2014년부터 시행된 현행 도서정가제의 효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추세에는 경제상황, 도서문화, 사회이슈, 인력구조 등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도서정가제의 기능을 가늠하려면 현행 도서정가제 이전 상황을 참고하면서 “만약 도서정가제가 예전으로 돌아간다면”을 상상해보아야 한다. 다만 도서정가제는 할인율만이 아니라 그 적용범위도 관건이지만, 일단은 “대폭 할인이 다시 허용된다면”을 가정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대법원이 밝혔듯이 “지나친 가격경쟁으로 인한 간행물 유통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고자 2007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과도한 책값 할인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관련 조항을 고쳐서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대폭 할인을 허용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선 책 구입 가격. 이전처럼 대형온라인서점에서 20~30% 할인된 가격에, 덤핑행사를 하는 책은 그보다 더 싸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할인율이 높아진 만큼 앞으로 출판사가 신간의 정가를 애초 높이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책은 마진이 낮은 상품이고, 할인율을 높인다고 책 제작비용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소비자가 신간을 ‘실질적으로’ 더 저렴하게 구입하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조사'에 따르면, 도서 평균 정가 인상률은 2015년 이전 5년보다 이후 5년 동안 절반 정도로 낮아졌다.
대폭 할인이 허용되어도 소비자가 실질적으로 책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출판계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출판사와 서점 그리고 작가와 독자
대형서점의 매대에 놓인 책들, 온라인서점의 상단에 오르는 책들은 모두 해당 출판사가 마케팅 비용을 들인 것들이다. ‘대박’을 치는 상품을 종종 내놓지 못하는 한, 자본력이 작은 출판사는 마케팅 경쟁에서 버티기 어렵다. 특히 자기계발서가 아닌 인문사회과학서처럼 애초 대박을 칠 가능성이 희박하고 할인도 크게 할 수 없는 책들을 펴내는 전문출판사들은 전망이 몹시 어두워진다.
사정은 작은 서점도 다르지 않다. 작은 서점은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의 할인율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애초 공급율이 다르다.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이 도매상에서 정가의 50~60%에 책을 공급받을 때, 작은 서점은 75~80% 선에서 책을 들여온다. 20% 넘게 할인하면 남는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런 작은 서점에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책들을 구경하고는 정작 소비는 할인율이 높은 온라인서점에서 할 공산이 크다.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읽는 내게 특히 심각한 문제는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이 아예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줄곧 기후위기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있는데, 기후위기 문제가 심각한 만큼 깊이 파고들어간 책은 솔직한 인상으로 열 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기후정의에 관한 책은 더욱 드물고, 한국 작가가 한국 실정에 대해 쓴 책도 거의 없다. 베스트셀러 위주의 출판시장에서 기후위기 관련 서적이 활발히 기획되고 출간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는 독자의 푸념에서 그치지 않고 이 사회의 손실이 될 것이다.
책의 내용보다 가격에 민감한 출판풍토가 조성되면, 그 부정적 영향은 출판사와 서점은 물론이고 독자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작가들에게도 미칠 게 분명하다. 상품성이 검증된 소수의 작가에게는 보다 좋은 계약조건이 마련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작가, 아직 책을 내본 적 없는 작가는 원고를 작성해도 책으로 만들어줄 출판사를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작은 출판사와 작은 서점들이 도태되면 작가 입장에서 책을 펴내고 알릴 기회도 더욱 줄어들 것이다.
한편, 출판계 노동자는 어떨까. 영세출판사, 전문출판사가 대체로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대형출판사나 온라인서점이라 한들 과도한 할인 경쟁은 위험을 동반할 것이다. 얼마나 할인할지를 두고 시시각각 경쟁사의 동향을 살피며 책을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노동 현장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할인율이 복잡해지고 수시로 변화하면 창작자, 출판사, 유통사는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하게 될까. 제도와 관행이 어그러지면 이들 사이에도 힘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런데 웹툰과 웹소설은
도서정가제 문제로 모처럼 ‘한국출판시장’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책이 소중한 만큼, 나는 이 참에 사회적 논의가 보다 확장되고 심화되길 바란다. 그 중 중요한 한 가지 쟁점은 ‘완전도서정가제’일 것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앞서 부분도서정가제라고 불렀지만 “정가를 지키자”가 아니라 “할인폭은 여기까지다”를 골자로 하기에 ‘도서할인제한제’가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지난 8월 한국출판인회의, 그리고 10월 한국출판인회의와 작가회의의 발표에 따르면 도서정가제 개정 방향에 대해 출판사는 강화 39.4%/유지 32.2%, 서점은 강화 68.9%/유지 23.8%, 작가는 강화 30.2%/유지 39.7%로 나타났다. 출판사, 서점, 작가 모두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에는 공감 비율이 높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울러 차이도 엿보인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최근에 나온 게 없지만, 분명 양상이 다를 것이다. 이 차이와 간극에 ‘완전도서정가제인가/아닌가’라는 다음 논의를 위한 소중한 논점들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전자출판물에 대한 도서정가제 적용도 중요 쟁점이다. 지금까지 도서정가제 문제를 종이서적의 할인율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았는데, 적용범위도 첨예한 문제다. 하다. 제작과 유통 방식이 종이책과 다른 전자출판물에 대해 도서정가제를 적용해야 하는가,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여기서도 전자책과 웹소설, 웹툰 등 연재 위주의 웹콘텐츠는 조건이 다를 것이다. 포털 기반 대형유통사와 중소형 플랫폼의 이해관계도 다를 것이다.
나는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웹툰이나 웹소설을 구독한 경험이 없어 실정도 잘 모르고 소비자로서 실감도 부족하다. 다만 이처럼 도서정가제 문제의 구도가 복잡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은 알고 있다. 최근 도서정가제 지지의 신념과 입장을 밝힌 여러 작가들이 다치고 있다. 그들의 발언에 많은 비난이 가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도서정가제 문제가 복잡하고 논의가 뒤섞여 있는 데서 비롯된다. 그 작가들은 주로 종이책의 세계를 상정하며 발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난 댓글을 단 사람들 중에는 웹툰, 웹소설 소비자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도서정가제 논의가 단순 찬반으로 뭉뚱그려져서는 논란만 커진다. 그리고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들이 시민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는 주무 부처인 문체부의 몫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에 따른 여러 방면의 실태조사와 의식조사를 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도서정가제 변경이 초래할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분석해 시민과 공유해야 한다. 그런 정보 제공에 제대로 행정비용을 들이지 않은 채 논의가 여론대결로 치달으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된다. 누군가는 분개하고, 누군가는 상처입는다. 더욱이 생산자이냐/소비자이냐, 온라인서점이냐/오프라인서점이냐, 종이책이냐/전자책이냐 등의 이항대립적 구도로 공방이 오가면 논의는 보다 나은 대안을 위한 합의 형성에 이르는 게 아니라 갈등만 키우게 된다.
우리는 지금 도서정가제 문제를 통해 한국출판시장의 미래, 책의 미래를 두고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일이니 마땅히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며, 당연히 문체부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제로섬게임인가 책의 생태계인가
나는 소비자일 뿐 출판사에서 일하지도 책방을 운영하지도 않는다.
책방이음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도서정가제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다. 책방이음은 지속적인 운영난에 더해진 코로나 사태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했다. 도서정가제 문제로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의 책방지기는 도서정가제 수호를 위해 몇날며칠 일인시위를 했다. 청와대와 문체부를 향한 그 절규를 나도 듣기로 했다. 책을 읽고 쓰지만, 도서정가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소비자로서 생산과 유통 영역에 너무나 어두웠다.
이제 책방이음은 없다. 책방이음이 사라져 나는 무엇을 잃은 것일까. 이제 그곳에 가서 책방지기와 책에 관해 대화할 수 없고, 독특한 책들의 배치를 감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상실 이후 생각해보니 오늘도 여러 책방에서 어떤 노력이 쌓이고 어떤 만남이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공들여 글을 쓰고, 누군가가 고심하며 책을 편집하고 있을 것이다. 책의 생태계는 지금, 생명활동 중이다. 이 현재가 책의 미래를 서서히 일궈가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인 나 역시 이 현재와 미래에 속해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는 이제 이 말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비자 후생을 위해 도서정가제를 재검토하겠다”는 문체부 측 언질은 큰 잘못을 범했다. 소비자 후생을 당장의 ‘저렴한 구입’으로 치환하고, 출판사와 서점과 독자들의 관계를 할인율을 둘러싼 제로섬게임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비자 역시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다. 책의 ‘생태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출판(세)계는 ‘다양성’, ‘상호의존성’, ‘순환성’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출판사와 서점과 독자는 서로의 다양성에 서로 빚진다. 출판사와 서점의 다양성이 훼손되면 어떤 독자에게는 분명 가치 있을 책이 나오지 못하거나 나와봐야 독자에게 가닿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독자로서 앞으로도 이런 책을 만나고 싶다.
나는 독자로서 이런 책들을 향유할 미래의 권리를 잃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미래가 찾아올까 두렵다.
윤여일 사회학자는 제주대 학술연구교수입니다.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하나·둘·셋)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