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 그냥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 제 영화 속엔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드라마나 서사도 없고 교훈이나 메시지 뭐 이런 것도 없거나 불확실 하고 예쁘거나 좋은 화면 없습니다. 제 능력과 기질은 하나뿐이 못하는 겁니다. 정말로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정말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제가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과정이 나로 하여금 계속 뭔가를 발견하게 하고 저는 그걸 수렴하고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 뿐 입니다.… 저는 세상의 귀중한 것은 다 공짜로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고 싶은 겁니다."<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영화감독 구경남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부터 최근에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까지, 홍상수 영화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상한 방식으로 꿈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경우, 보경은 자신이 죽는 꿈을 꾼다. 그녀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주요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꿈 장면을 활용해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던 인물들을 모아 넣는 아이디어를 보면서, 기대할만한 신인 감독이 등장했다는 생각을 했다. 꿈 장면이 인상 깊은 또 다른 영화로는 <극장전>(2005), <밤과 낮>(2007),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 등이 있다. <극장전>에서, 상원은 '붉은 옷을 입은 금발의 백인 여자가 사과를 권하는 꿈'을 꾼다.(장면1) <밤과 낮>에서 성남이 꾸는 꿈에서는, 멧돼지가 여자목욕탕 창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장면2)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에서는 경남이 후배 부상용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될 때, 꿈 장면이 나온다. 꿈에서 부상용이 갑자기 죽자 그의 아내 유신이 경남 때문에 죽었다고 원망을 하는데, 경남은 자기가 유신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밤과 낮>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꿈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 시작과 끝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밤과 낮>의 경우, 성남이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참새가 등장한다.(장면3) 그러므로 이 지점부터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는 경남이 첫 장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졸거나 자고 있다가 깨어나기 때문에, 제천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전체를 꿈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또 음악의 사용으로만 판단한다면, 꿈 장면의 시작과 끝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렇게 홍상수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매우 모호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도 같은 맥락에 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두 편의 영화처럼 배우들의 크레딧이 두 번에 걸쳐 각각 명시된다. 1부에서, 여배우 영희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헤어진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을 기다리며 지영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2부의 영희는 강릉에서 지인들을 만나고 해변에 나갔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꿈에서 영화 찍으러 온 상원 일행을 만난다. 잠에서 깨어난 영희가 해변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경우처럼 이 영화의 꿈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영화에서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1부에서,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공원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묻는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남자는 해변의 영희를 들쳐 메고 사라진다. 2부에서, 그 남자는 영희가 머무르게 될 호텔방의 창문을 닦고 있다. 그러나 인물 중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장면4) 영희도 그 남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 질문하자, 홍상수는 "왜 그런 인물이 나오는지 설명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 한다"고 답했다(<씨네21> 2017/03/23).
이전에 <극장전>의 꿈 장면에 대해 홍상수는 "설명이 안 되는 쇼트를 찍고 싶었다.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예순 살 먹은 거구의 아르헨티나 남자가 자두 같은 걸 먹는 거였다"고 말했다(<필름2.0> 231호). 따라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출현은 위에서 언급한 백인 여자, 멧돼지, 참새 등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여기에 1부와 2부를 다른 영화처럼 연결하고 그 사이에 알 수 없는 공백을 만들어 놓은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 전체가 영희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다(제목과 달리 ‘밤의 해변’ 장면이 나오지 않는 점도 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홍상수 영화에서 꿈은 흔히 죽음과 맞닿아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시간을 물은 다음 영희를 데려간다는 점, 그를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은 그를 저승사자로 해석하게 만든다. 또 꿈속이어서 그런지, 영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다짐하고 결심한다. 그녀의 대사는 일종의 고백 같다("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아. 가짜로 하는 건 없어야 돼.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고 싶어").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에서 주인공은 두 사람밖에 죽지 않았지만, 죽음은 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주인공의 주변을 맴돈다. 주요 인물들이 살해당하고(<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주인공이 살인 사건의 범인을 알게 되고(<강원도의 힘>), 자살을 시도하거나 죽어가는 선배의 문병을 가고(<극장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영희가 계속 늙음과 죽음을 언급한다("감독님도 늙으셨고 저도 늙었어요", "죽을 때 죽고 싶어. 계속 후회하면서 죽고 싶어"). 또 어떤 남자가 해변에서 잠든 영희를 깨우면서,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죽었는지) 걱정이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홍상수는 꿈과 현실, (이 글에서 사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억과 실재를 모호하게 겹쳐 놓으면서, 자신이 깨달은 장자의 호접몽 같은 세계를 영화로 구현해왔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그의 인물들은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환상을 통해 구원을 희구한다. 따라서 그들이 뻔 한 거짓말처럼 보이는데도 나름 진지하게 '사랑의 맹세'를 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반면 이전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게, 지난 해 개봉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영수는 이들과는 정말 다른 태도로, 민정에게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리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는 이에 대한 응답처럼, 주변 남자들과 어떤 사건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욕망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해보고 싶어 한다. 그녀의 꿈에서, 상원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통념에 의한 선과 악이란 분별, 행복과 불행, 그런 분별보다 더 고귀한 무엇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고, 그게 안 된다면,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영희가 뒷모습을 보이며 어둠이 내려오는 해변을 정처 없이 걸어갈 때, 새로운 출발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1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면서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기이하게 불길한 느낌이 든다.
P.S.) 여전히 홍상수 영화답게 이 영화에도 인상적인 대사가 아주 많다. 그 중 하나로 "공부는 깨끗하지"라는 대사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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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영화평론가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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