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의 2017년 1월, 백두대간 종주 5구간은 <새해특집 : 지리산권역 수정봉 구간>입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지난 9월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며, 참가자 전원이 9월 <천왕봉 구간>, 10월 <벽소령 구간>, 11월 <금산 구간>, 12월 <만복대 구간>을 완주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1월 산행은 14일(토), 지리산 권역의 마지막 구간인 고기리에서 여원재입니다. 백두대간 마루금 위에 있는 유일한 마을인 노치마을을 지납니다. 물맛 좋은 노치샘과 소나무당산을 지니고 있는 유구한 마을입니다. 또한 백두대간 종주 중 유일한 평지가 산이 되는 구간입니다. 고기리에서 덕치리까지의 편편한 도로가 물을 가르는 평지의 산입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을 지나 수정봉의 설화(雪花)를 보고 여원재의 설화(說話)를 찾아 갑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7년 1월 14일(토)
-산행출발 : 2017년 1월 14일(토) 오전 6시
-산행코스 : 고기리-노치샘-수정봉-여원재
-산행거리 : 약 8.3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5시간
-난 이 도 : 하중(★)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7년 1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 지리산 만복대를 지나 큰고리봉에서 단숨에 내려온 마루금은 고기리에 당도하며 숨을 고릅니다. 장엄하게 이어진 산줄기를 이곳 고기리에서 갑자기 평지가 됩니다. 고기리에서 덕치리를 지나 노치마을 입구까지는 거의 평지입니다. 그냥 무심코 이곳을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도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백두대간 중 유일한 평지가 산인 구간입니다.
이 평지의 너른 신작로가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계(分水界)가 됩니다. 이곳 도로에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은 서로 다른 여행을 떠납니다. 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흘러흘러 섬진수계를 굽이쳐 남해로 여행을 합니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지리산을 감고 흘러흘러 낙동강수계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남해로 흘러내립니다.
곧 우리의 전통 지리학의 산자분수령(山自)을 정확하게 기키는 구간입니다. 조상들의 정확한 분수계(分水界) 설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며 백두대간의 의미가 온전히 스민 구간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입니다.
그리고 이 구간에는 일제강점기의 또 하나의 민족정기 말살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2004년 녹색연합이 주관한 ‘백두대간환경대탐사팀’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백두대간 지리산 정령치(1172m)를 지나 고리봉(709m) 아래 노치마을에서 백두대간 환경 대탐사팀(녹색연합 주관)은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대 이곳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백두대간과 지리산의 맥을 끊은 사실이 밝혀졌다.
행정구역상 남원군 주천면 덕치리(회덕마을과 노치마을이 합쳐짐)에 속하는 노치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덕음산은 남으로 고리봉을 연결하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데 노치마을을 지나 고리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에다 일제는 백두대간과 지리산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곳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3~4m의 규모로 능선을 가로지르는 웅덩이를 판 후 돌로 만든 볼트형(여섯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개 1조로 이를 연결할 경우 거대한 잠금장치가 되어 능선의 맥을 차단함) 잠금장치를 하여 백두대간과 민족정기를 끊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돌은 2개 1조로 되어 있으며 두 개를 합칠 경우 가로 1,6m×세로 1.6m의 사각형이 되며 가운데는 둥근 원형이 되는 잠금장치이다. 일제가 이러한 방법으로 백두대간과 지리산 사이의 맥을 차단한 것은 이곳의 지형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부터 이곳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덕음산-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이곳은 지리산이 사람으로 비유하면 머리에 해당되고 이곳이 바로 목 부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바로 목 부위에 숨통을 옥죄는 거대한 석물로 제작한 잠금장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가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능선을 가로질러 파헤친 후 그곳에 돌을 채워 넣는 작업을 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석물은 능선의 주요 기가 흐르는 곳을 차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이를 ‘방죽’, 또는 ‘울대’라고도 부르는데 그 지점이 바로 사람의 목울대와 비유해 그렇게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1910년대부터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의 주요 지점에 쇠말뚝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길을 낸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정기를 차단했으나 이번에 밝혀진 것처럼 대규모로 거대한 석물장치를 이용한 것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흔적은 9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였으나 90년대 중반 이후 이 지역에서 대규모 경지 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울대’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서 나온 석물장치 5개만 수거되어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신수일 씨가 정원석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탐사단의 탐문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정확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확실한 정리를 통해 우리의 백두대간을 온전히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비가 내려 빗물이 서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노치마을에는 시원한 노치샘이 있습니다. 암반을 뚫고 나오는 석간수입니다. 한 모금 목축이고 마을을 올라서면 아름드리 소나무 네 그루가 수정봉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서 있습니다. 당산제의 신목이 되는 소나무들입니다. 매년 1월 노치마을 당산제가 이곳에서 열립니다. 또한 많은 종주팀들이 ‘백두대간 종주 무사기원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음속으로 백두대간학교의 무사종주를 기원해 봅니다.
숲으로 들어섭니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숲입니다. 겨울 소나무 숲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며 안온함을 선사합니다. 켜켜이 쌓인 솔잎을 밟으며 한발 한발 숲을 오릅니다. 움막을 지나며 숲은 능선으로 이어집니다. 은빛 눈가루가 뿌려진 숲길 위로 푸른 소나무와 시린 겨울하늘이 산객을 반겨줍니다. 조심스레 암봉을 지나고 사르락 사스락 눈길 걷다보면 수정봉입니다.
백두대간 수정봉을 사이에 두고 우측의 남원시 운봉읍과 좌측의 남원시 이백면은 지형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운봉읍은 평평한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고, 좌측의 이백면은 낭떠러지를 방불케 하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인 이유로 예부터 백두대간은 나라는 구분하는 국경이 되었습니다. 수정봉 구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정봉 주위에 남아 있는 성터의 흔적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옛 성터의 흔적을 따라 걷습니다.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잇는 작은 고개, 입망치에는 인적은 사라지고 태양광 반사판들만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눈 쌓인 조릿대 사이로 발을 옮깁니다. 조릿대 스치는 소리가 여울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한겨울 조릿대가 전해주는 개여울의 이야기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습니다. 포근한 백두대간입니다. 임도를 따라 걷다 산길로 들어서도 또 임도를 건너기를 몇 차례, 밭두렁이 보이고 밭두렁 사이로 길이 이어집니다. 빠알간 양철지붕이 보이고 곧 여원재입니다.
여원재에는 설화(說話)가 내려옵니다. 여원재 주막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고려 말 혼란의 틈타 이곳까지 침략한 왜구의 손길이 거쳐 간 자신의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자결한 이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 중이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통두란 등과 함께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군을 대파하고 큰 승전보를 울립니다. 황산대첩 후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여원재 주막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기울이고 백두대간 수정봉 구간을 마무리 합니다. 설화(雪花)가 활짝 핀 백두대간 수정봉 구간, 또 다른 설화(說話)를 찾아 백두대간을 걷습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함께 백두대간 걸으러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여러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1월 14일(토) 오전 6시
06: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6: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6: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6: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07: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10:20 고기리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10:30 고기리 출발 – 산행 시작
11:00 덕치보건소
11:20 노치샘
11:30 노치마을 소나무 제단 - 점심식사
13:30 수정봉
13:50 입망치
14:10 700봉
14:50 갈림길
15:30 여원재 도착 - 산행 마감/스트레칭
버스 이동. 운봉허브흑돼지전문점 – 지리산 허브흑돼지 삼겹살로 뒤풀이
17:00 운봉 출발
20: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재킷,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버프, 아이젠, 스패츠, 도시락 2개(아침-행동식, 점심) 등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7년 2월 백두대간 종주 6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백두대간 백운산권역 고남산 구간
-산행일시 : 2017년 2월 18(토) - 당일 산행
-출발일시 : 2017년 2월 18일(토) 오전 6시
-산행코스 : 여원재-고남산-매요마을-유치재
-산행거리 : 약 10.5km
-소요시간 : 약 6시간
-난 이 도 : 중하(★☆)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다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고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고촌리(高村里)와 내기리(內基里)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高基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다.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노치(蘆峙)마을]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은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다. 동쪽은 남원시 운봉읍, 서쪽은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해 한 마을 안에서 행정구역이 갈린다. 예전에는 주천 부엌에서 밥을 지어, 운봉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물 또한 노치마을에서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나뉜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던 아픔을 간직한 마을에는 물맛 좋은 노치샘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으며, 한 모금을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이 스님들이 판 것으로 여긴다. 6.25가 터지고 장티푸스가 돌 때도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에게 인사하지 않은 사람, 노치샘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백두대간을 지났다고 할 수 없다 한다.
일명 가재마을로도 불리였던 노치마을의 어원은 蘆 갈대 노, 峙 언덕 치에서 알 수 있듯이 갈대가 많아서 갈대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갈대의 전라도 사투리가 ‘갈재’, 이것이 다시 가재로 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축조된 노치산성이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이어주는 기점이다.
[노치마을 당산제] 7월 백중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마을 뒤 소나무 제단에서 당산제를 올린다. 그 연원을 살펴보면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 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오래 전 자손이 없던 마을 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하여, 마을 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2000년경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마을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밤 12시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 된다. 또 상주집을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수정봉] 804.7m.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은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효기리의 경계에 있는 수정봉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원재와 주촌리 사이에 가장 높은 봉우리다. 서쪽의 남원 방향은 지대가 매우 낮은 반면 동쪽의 운봉은 고원분지에서 지대가 매우 높으면서도 편편하다. 정상 주변에 성터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정은 보석의 일종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수정봉은 귀하므로 지켜져야 할 곳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입망치] 545m. 수정봉 북쪽, 입망치는 동쪽의 운봉읍 행정리 갓바래 마을과 서쪽 이백면 과립리 입촌 마을을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입망치는 과립리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서서 멀리 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수정봉 근처에 성터 흔적이 보이는데 예전에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여원재] 477m.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황산대첩 시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이 노파를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으며, 이곳을 여원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원치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은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
[비전마을] 비전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209번지에 위치해 있다. 비전마을은 본래 운봉의 서면 전촌리(前村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군화동(軍花洞)이 있다.
비전마을은 마을 앞에 비각(碑刻), 즉 황산대첩비각(荒山大捷碑閣)이 있어서 비전(碑前)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곳이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이성계는 황산대첩 다음해 이 마을을 다시 찾아 1년 전 황산의 왜구들을 물리치고자 전의를 불태웠던 이곳 자연암석에 당시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황산대첩비각은 고려 우왕 6년(1380년)의 이성계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년) 운봉현감 박광옥이 세웠다. 이 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광복 후 1957년 10월 27일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운봉현감은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에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각을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민족문화백과 등)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종주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백두대간’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산줄기가 아닙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의 시원입니다. 또한 한반도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땅에 기대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간입니다. 백두대간 줄기 따라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겨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생명의 근간인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백두대간 종주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보따리를 찾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난 6년간 60강에 걸쳐 백두대간 아름다운 산하를 걸었던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결정체인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습니다.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 중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남측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 향로봉까지 701km입니다. 이중 비법정탐방로 79.9km를 제외하면 도상거리 621.1km입니다. 접속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백두대간 종주거리는 약 1,000km에 이릅니다.
2016년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 떠납니다. 마음 한켠 간직해왔던 꿈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힘든 여정이지만 도반들과 함께라면 거뜬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나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모두의 희망인 ‘백두대간 종주’ 힘차게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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