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습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 제55강은 한양(漢陽)의 외사산(外四山)의 동쪽 봉우리인 아차산(峨嵯山)에 올라 고구려의 보루에서 호쾌한 고구려의 기상을 품고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고자 합니다.
아차산은 신내동의 봉화산(烽火山), 망우동의 망우산(忘憂山), 면목동의 용마산(龍馬山), 그리고 아차산을 총칭하여 아차산군(峨嵯山群)이라고도 부르며 이런 연유로 옛 기록에는 이 산들을 모두 아차산으로 적고 있는데, 봉화산은 아차산의 봉수대로, 용마산은 아차산의 용마봉으로, 망우산은 망우리라는 지명만 있지 산 이름으로는 기록에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학교 제55강은 2017년 1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망우리공동묘지)관리사무소 앞에서 모입니다[지하철 7호선 상봉역 5번 출구 또는 중앙선 망우역에서 내려 경기도 구리시 방향으로 버스 타고 5번째 정류장인 남일주유소(딸기원 입구라고도 차내 방송함)에서 하차, 100m 후진해 포장도로 언덕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관리사무소입니다.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 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망우리공원(망우리공동묘지)관리사무소앞-애국지사묘역(만해 한용운묘/죽산 조봉암묘)-삼거리-망우산3보루-망우산2보루-망우산1보루-핼기장-아차산4보루-아차산3보루-아차산2보루-아차산6보루-아차산5보루-아차산1보루-해맞이광장-고구려정-점심식사 겸 뒤풀이-중곡동골목길-유강원터-화양리(건대입구역)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월 답사지인 <아차산군의 유적들>에 대해 들어봅니다.
봉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이 모여 아차산군 이뤄
백두대간(白頭大幹) 능선의 분수치(分水嶺)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漢北正脈)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대성산, 적근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을 일구며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주엽산에 이릅니다. 여기서 한 줄기는 서쪽으로 포천의 축석고개를 넘어 불곡산, 도봉산으로 뻗어가고,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천보산, 송산, 깃대봉, 숫돌고개를 거쳐 수락산에서 높이 솟구치고는 그 여맥이 불암산, 검암산, 봉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으로 뻗어가다가 아차산성 끝자락인 워커힐호텔 아래 광진나루[廣津橋]에서 한강으로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합니다.
이날 둘러볼 봉화산(烽火山, 160m), 망우산(忘憂山, 282m), 용마산(龍馬山, 348m), 아차산(峨嵯山, 287m)을 총칭하여 아차산군(峨嵯山群)이라고 부릅니다.
아차산군의 산줄기는 조선 초기에는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산줄기와 이어져 있는 검암산(儉岩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원릉을 조성한 이후 계속해서 현릉, 목릉, 숭릉, 휘릉, 혜릉, 원릉, 경릉, 수릉 등 여덟 개의 능이 더 모셔졌는데, 동쪽에 있는 아홉의 왕릉군(王陵群)이라고 해서 동구릉(東九陵)이라고 부르며 같은 이유로 검암산을 구릉산(九陵山)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한양(漢陽)에 새롭게 도읍을 정한 태조 이성계는 검암산 아래 지금의 건원릉(建元陵)에 자신의 묘 자리를 정하고 한양도성으로 돌아오다가 망우리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이제야 한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고 해서 ‘망우리(忘憂里)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곳 공동묘지에 사람이 죽어 묻히면 비로소 삶으로부터의 모든 근심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망우리’라 부른다고도 합니다.
망우리에 공동묘지가 생긴 것은 1933년의 일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2년 일제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제정하여 미아리와 수철리(지금의 금호동) 그리고 신사리(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에 공동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이 세 곳으로 부족하자 1933년에 망우산에 추가로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는데, 일제가 신설하는 공동묘지의 장소를 망우산으로 하려는 의도는 조선의 초대 임금이 묻힌 왕릉의 산줄기에 가장 하층민들이 이용하는 공동묘지를 조성함으로써 조선 군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음흉한 음모가 배경에 깔려 있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망우(忘憂)의 내력
일제의 이러한 흉계는 조선을 합병하고 나서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에 해당하는 전국의 산천(山川)에 신작로(新作路)를 내고 쇠말뚝을 박는 파렴치한 행위로 나타났으며 그 저의는 금수강산에 가득한 조선의 힘찬 기운(氣運)을 쇠잔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연들을 종합해 볼 때 망우리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일제 때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의 사연보다는 조선 초 태조 이성계의 ‘시름을 잊게 한[忘憂]’ 내력이 더 설득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또 망우리고개의 원래 위치는 봉화산과 망우산 사이에 있는 중앙선이 다니는 터널 위에 있었습니다만 일본강점기 때 신작로를 내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넓게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망우리공동묘지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독립애국지사를 비롯한 유명인사 17분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과 오세창,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 방정환, 민족사학자 문일평, 종두법을 널리 보급한 한글학자 지석영, 독립유공자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유상규, 서광조, 장덕수와 독립유공자이면서 이승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된 진보당의 조봉암의 묘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한 오긍선,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문인 박인환과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의 묘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묘도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강남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서울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던 묘 자리인 망우리공동묘지가 1973년 3월 25일에 2만 8천여 기가 되면서부터 더 이상 이곳에 묻힐 수가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까지 주변의 산자락을 잠식하며 계속 묘가 늘어나 약 3만 3천여 기가 되자 서울시와 중랑구에서는 ‘망우묘지공원종합정비계획’을 발표하고 이장(移葬)과 납골(納骨)을 장려한 결과 2005년에는 1만 7천여 기만 남게 되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는 계속 줄고 있으며 지금도 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차산은 한강을 서로 차지하려고 삼국이 서로 싸울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부여(夫餘)에서 떨어져 나와 처음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漢城百濟)는 남하(南下)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해 아차산에 산성을 쌓았으며 이 산성을 아단성(阿旦城) 또는 아차산성(峨嵯山城)이라 합니다.
아차산 지키기 위해 혼신 기울인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아차산까지 쳐 내려와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의 목을 베고 아차산을 차지하고는 이곳에 여러 개의 보루(堡壘)를 설치하였습니다. 아차산에 설치한 고구려 보루는 한강 유역을 경계하는 성채(城砦)로서 이곳에서 온돌과 우물이 발굴된 것을 보면 고구려 병사들이 숙식을 하며 주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 유적들은 1989년 발생한 아차산 산불의 진화작업을 하다가 발견되었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돌무지들과 그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넓은 구덩이가 확인되어 이것이 곧 지금의 장성(長城)과 작은 성(城)들인 보루였습니다.
장성은 아차산 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한 번을 감쌌고 다시 북쪽의 용마산과 망우산의 능선을 따라 이 또한 반달 모양으로 감싸 안아 한강 하류의 위쪽 북변(北邊)을 두 겹으로 쌓은 석성이었습니다. 여기에 대략 500m의 간격을 두고 20여 개의 보루들이 산봉우리의 지형에 맞게 돌로 축조되어 있었습니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은 쌓는 방법에서 고구려 양식의 여러 가지 수법들을 엿볼 수 있는데 성벽을 두룬 곳곳에 장방형으로 툭 튀어 나오게 쌓은 치성(雉城)은 고구려 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릇에서도 고구려 토기의 대표적인 유형인 입이 벌어진 나팔입항아리와 다리가 셋 달린 원통형세발토기의 파편들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後部0兄'의 글자가 새겨진 그릇 조각을 발견했는데 ‘후부’는 고구려의 5부제의 하나이며 '0兄'은 고구려 관등으로, 이로서 고구려의 성곽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고구려 보루는 아차산 능선에 7개소(홍련봉 2개소 포함), 용마산 능선에 7개소, 망우산 능선에 2개소로 총 16개소가 사적지로 지정되었지만 사적지로 지정 받지 못한 것과 소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30여 개소의 보루가 아차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의 아차산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강 유역에는 주로 백제와 신라의 역사만 전해져 왔으나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이 발견되면서 한강 유역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고구려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역사, 문화 공간이 대부분 북한과 중국에 치우쳐 있기 때문으로,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중요한 증표가 되었습니다.
한편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자 한성백제는 한강 유역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방어하기 용이한 금강 유역에 공산성(公山城)을 쌓고 웅진백제(熊津百濟)의 깃발을 새우게 됩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 유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장군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고 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전쟁 등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왕이 피난하여 계속해서 정사를 돌볼 수 있도록 삼경체제(三京體制)를 갖추었는데, 도성(都城)은 개경(개성)으로 삼고 이궁(離宮)으로는 북쪽에 서경(평양) 남쪽에 남경(서울)을 두었습니다.
이궁으로서 남경을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다섯 봉우리[五德丘]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으로, 오행(五行)에 따라 중앙에 토덕(土德)인 북악(北岳), 북쪽에 수덕(水德)인 감악산(紺岳山), 남쪽에 화덕(火德)인 관악산(冠岳山), 서쪽에 금덕(金德)인 계양산(桂陽山), 동쪽에 목덕(木德)인 아차산(峨嵯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차산은 고려시대에도 남경 동쪽의 으뜸봉우리로 격을 갖춘 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아차산 서쪽 기슭은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사냥터로 사용되던 곳으로 이곳에 ‘살곶이목장’이라는 국립목마장(國立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그 이후 역대 왕들도 뚝섬에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을 지어놓고 기마군사(騎馬軍事)들의 열무행사(閱武行事)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곶이목장 주위에는 대규모의 뽕나무밭인 아차산 잠실(蠶室)이 있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과 관곽(棺槨)과 가구(家具)의 도료(塗料)로 사용되는 옻나무[漆木], 견직물(絹織物)을 생산하기 위해 누에에게 먹일 뽕나무[桑木], 식용(食用)할 수 있는 과일나무[果木] 등 세 종류의 나무 심기를 권장하였습니다.
5대 잠실의 하나였던 아차산잠실
특히 뽕나무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조성된 잠실이 동잠실, 서잠실, 아차산잠실, 연희궁잠실, 낙천정잠실 등 서울에만 다섯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잠실은 잠실종합운동장과 잠실아파트단지 일원이고, 아차산잠실은 화양리와 뚝섬 일대며, 연희궁잠실은 조선 초기 서쪽 이궁이었던 연희궁 터인 지금의 연세대학교 부근이고, 낙천정잠실은 조선 초기 남쪽 이궁인 대산이궁의 낙천정으로 지금의 한양대학교 앞 행당동 일대이며, 서잠실은 장소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다섯 곳의 잠실에서 뽕나무 묘목을 키워 여의도 옆에 있었던 밤섬[栗道]으로 모두 보내면 그곳에서 봉상시(奉常寺),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제용감(濟用監), 사포서(司圃署)의 다섯 개 기관이 분담하여 뽕나무를 집단으로 키우게 되는데 결국 다섯 곳의 잠실은 묘목장(苗木場)이고 밤섬은 양육장(養育場)인 셈입니다.
아차산 남쪽에는 한강을 건너는 서울의 나루 중 가장 상류에 위치한 광나루가 개설되어 흥인지문(興仁之門)과 광희문(光熙門)을 통하여 도성을 나와 살곶이다리가 있는 전관원(箭串院)과 광나루의 광진원(廣津院)을 거쳐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광나루로 내려서기 전에 워커힐이라는 지명이 호텔과 함께 전해 오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때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워커장군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제3공화국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외화벌이라는 미명 아래 외국인을 상대하는 카지노호텔을 이곳에 지어 도박장사를 한 곳으로 지금도 예나 마찬가지로 성업 중에 있습니다.
아차산 용마봉과 이어져 있는 어린이대공원은 조선의 27대 마지막 왕인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의 정후(正后)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閔) 씨가 세자빈(世子嬪)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위해 마련한 유강원(裕康園)이 있었던 자리로서 1904년 순명효황후가 승하하자 용마봉 아래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장례를 치르고 원호(園號)를 유강원이라 하였습니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남양주 금곡에 있는 고종의 홍릉(洪陵) 왼쪽 산줄기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유릉(裕陵)이라 하고 유강원으로부터 순명효황후를 천장(遷葬)하여 합장하였고 1966년 순종의 계후(繼后)인 순정효황후가(純貞孝皇后) 승하하자 계후도 함께 합장하여 유릉은 동봉삼실(同封三室)의 합장릉(合葬陵)이 되었습니다.
원(園)이라 함은 세자 또는 세자빈의 묘를 일컫는 말인데 유강원 터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권을 잡은 군사독재시절에는 골프장으로 변했다가 다시 어린이대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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