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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환상, 동백섬 보길도 비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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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겨울의 환상, 동백섬 보길도 비경 여행

2017년 1월 섬학교 <새해특집>

다시 동백의 계절입니다. 동백은 늦가을부터 봄까지 물경 6개월 동안 피고 지기를 거듭합니다. 그래서 가을에 피면 추백, 봄에 피면 춘백, 겨울에 피는 꽃만을 동백이라 합니다. 그러니 한 겨울이라야 진짜 동백을 볼 수 있지요.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섬이지만 동백의 화원이기도 합니다. 겨울의 한복판, 진짜 동백을 보러 보길도로 떠납니다. 2017년 새해를 맞는 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55강은 1월 7(토)∼8(일)일, 1박 2일 여정으로 <보길도 동백꽃 기행>을 떠납니다.

▲공룡알처럼 커다란 갯돌들이 해변 가득한 보옥리 해변과 풀무섬Ⓒ섬학교

또 이번 여정에서는 보길도를 좋아하는 이들도 잘 알지 못하는 숨은 비경을 찾아 갑니다. 도치미가 그곳입니다. 사방이 툭 트여 왕복 4킬로미터 내내 바다와 섬들만을 보고 걷을 수 있는 도치미. 도치미는 도끼날이란 뜻의 절벽인데, 도치미에 서면 그 환상적인 풍경 앞에 숨이 탁 멎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도치미에서 우리는 절벽 같은 삶에도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번 보길도 답사에는 보길도의 진짜 토속 음식의 보고인 민박집에 묵게 되는데 이 집에 숙박을 해야만 이 집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여행의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민박집 규모상 참가자 30명까지만 선착순으로 모십니다.

배는 떠나고
흰 동백 피었다 지네

배는 떠나고
사랑은 가고 오지 않네

바람아 불어라
폭풍우 몰아쳐라

배는 떠나고
한 번간 내 사랑 돌아오지 않네

배는 떠나고
흰 동백 피었다 지네
(강제윤 詩 <비가>)

▲가을에는 추백, 봄에는 춘백, 겨울에 피어야 진짜 동백이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보길도 동백꽃 비경 여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동백의 화원 보길도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이름난 동백섬이기도 합니다. 동백이 집니다. 꽃 세상의 저녁, 천지는 온통 핏빛입니다. 피어서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동백이 아름다운 건 질 때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꽃 시절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온 목숨 던져 꽃 다이 지는 꽃. 사람이 아름다울 때도 그 때가 아닐까요. 동백이 집니다. 오늘 보길도에 동백이 집니다.

동백은 이름처럼 겨울에만 피는 꽃이 아닙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물경 6개월을 피었다 지기를 거듭하니 백일동안 핀다는 백일홍도 동백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지요. 그래서 동백은 피는 계절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입니다. 가을에 피는 것은 추백(秋柏), 봄에 피는 것은 춘백(春柏), 겨울에 피어야 비로소 동백(冬柏)입니다. 동백과 춘추백은 낯빛부터가 다릅니다. 추백이나 춘백에서는 뜨거운 정열이 느껴지는 반면 동백은 서늘한 결기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겨울이 진짜 동백을 볼 수 있는 시간들입니다.

하지만 겨울에 피는 동백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꿀을 만들지 않으니 당연히 벌, 나비나 동박새도 날아들지 않지요. 누구를 유혹할 생각도 없이 오로지 온 에너지를 꽃 피우는 데만 집중합니다. 겨울 동백의 꽃에 결기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꽃 피우고 열매 맺지 못하면 또 어쩌겠습니까. 이름값을 하고 죽는 것이 열매를 얻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책 없이 타오르다 붉게 지는 목숨, 그 선연한 동백꽃으로 인해 겨울은 비로소 겨울답습니다.

동백은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선비들의 사랑받아온 꽃이지요. 이규보,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노래했고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평하며 동백이 도골선풍을 지녔다고 찬탄했습니다.

동양뿐일까요. 서양에서도 동백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지요.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백열매는 실용성도 뛰어났습니다. 요즘 들어 동백기름을 함유한 화장품이 인기지만 옛날부터 여인들은 동백씨앗을 짜 머릿기름으로 사용했고 식용이나 등잔불 밝히는 데도 썼습니다. 과거 보길도 인근의 섬들에서는 섣달그믐 저녁이면 동백꽃 우린 물로 목욕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백꽃 물로 목욕을 하면 종기도 치료되고 피부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또 동백의 주술적인 힘을 신봉하기도 했습니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볼기나 엉덩이를 치면 그 여자는 사내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을 묘장(卯杖) 또는 묘추(卯錐)라 했습니다. 다시 동백의 시절. 보길도 기행은 동백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가는 동백꽃 기행이기도 합니다.

▲소복 입은 여인처럼 애잔한 흰 동백Ⓒ섬학교

“제주 가느니 보길도”

“영주(제주도) 가느니 보길도라는 민요가 있다.”
1928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최용환(崔容煥)의 보길도 여행기 ‘윤고산의 화원을 차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최용환은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보길도의 부용동 골짜기를 둘러보고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최용환보다 2백년 앞서 보길도를 여행한 고산의 5대손 윤위(1725∼1756)의 보길도 여행기 <보길도지>에도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길도가 명승지로 소문이 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길도의 가치를 가장 뚜렷하게 세상에 드러낸 이가 고산 윤선도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요.

보길도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합니다. 보길도 사람들은 그런 땅을 '안태(안투)고향'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태를 묻은 고향이란 뜻이지요. 유년시절을 보내고 뭍으로 나가 살다가 어른이 된 뒤 귀향하여 산 시간까지 합하면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보길도 구석구석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다시 고향을 떠나 유랑자로 살지만 여전히 보길도는 내 삶의 뿌리가 되는 섬입니다.

고향은 아니었으나 나보다 수백 년을 앞서 보길도에서 살다간 시인이 고산 윤선도 선생입니다. <어부사시사>나 <오우가> 등의 시가와 한국의 3대 정원 중 하나라는 부용동 원림을 만든 이가 바로 고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길도를 고산의 유배지로 기억하지만 보길도는 그의 유배지가 아니었습니다. 보길도는 고산의 은둔지이고, 고산의 왕국이었습니다. 보길도 전체가 고산의 장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산의 주된 주거지는 본처와 자식들이 있는 해남 녹우당이었고 보길도의 집들은 첩실과 그 자식들이 기거하는 집이었으며 고산의 별장이었습니다. 고산은 부용동 원림을 건축하고 일곱 번을 드나들며 13년이란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1637년 85세로 보길도에서 숨을 거두었을 정도로 보길도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습니다.

내가 고산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 염소와 오리, 닭들을 막 지각하고 구별해내던 그 무렵부터였을 겁니다. 지관이었던 할아버지가 늘 윤고산, 윤고산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는 윤고산을 이웃마을 사는 할아버지의 친구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묘 자리를 잡고 집터를 찾는 할아버지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으며, 보길도 주민들 가운데 살아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400년이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보길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한 뒤 내 의식 속에서 고산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 고향에 남은 친구들, 마을 어른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학교 교과서에선가 고산을 조우하고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그것은 고산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지은 유명한 시인이었다 해서가 아닙니다. 고산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니! 그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의식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는 국어 교사들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이라니! 그런데도 그렇게 산 사람들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니! 그 의문만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세연정이며 세연지, 회수담 등 고산이 축조했던 구조물과 연못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에야 새롭게 알게 된 지식입니다. 동천석실이며 낙서재, 곡수당, 낭음계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피라미 낚시를 하던 낚시터가 세연지였으며 미술 시간에 진흙을 퍼다 공작을 하던 놀이터가 세연정 자리였고 민방위 훈련시간에 대피했던 방공호가 봉화대 터였습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만난 고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그는 더 이상 낭만적인 시인이 아니라 섬 주민들 위에 군림한 섬의 지배자였던 것이지요.

▲어부사시사의 산실이자 한국 3대 전통 정원중 하나인 보길도 부용동 원림의 세연정Ⓒ섬학교

어부의 풍경만 있고 어부의 현실이 없는 어부사시사

광해군 시절, 30세 백면서생의 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이첨 등 권신들의 부패와 전횡을 탄핵하다 귀양살이를 떠난 실천적 지식인 고산. 쉰한 살의 나이에 13세 소녀였던 설씨녀를 만나 평생을 사랑한 열정적인 로맨티스트 고산.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설계한 건물을 세우고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꾸민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임진, 병자 양대 전쟁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자기 왕국을 꾸미는데 허비해버린 이기적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속을 초탈했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칠십이 넘어서까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앙 정계의 권력 투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다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지극히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고산이 보길도로 들어 간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적 전쟁이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종결된 직후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은 가노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서해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향합니다. 하지만 배가 강화도에 당도하기도 전에 강화도는 청나라에 함락되고, 고산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남하 하게 됩니다. 배가 해남 인근을 지나갈 무렵 고산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당시 고산의 나이 51세. 고산은 제주도에 은둔하기 위해 바로 뱃길을 떠납니다. 항해 도중 바람 길이 바뀌자 보길도 대풍(待風)기미에 배를 정박하고 범선을 날라 줄 바람을 기다리다 문득 보길도의 산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바로 그 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고산은 보길도에 별서(별장)를 짓고 해남과 한양, 유배지였던 함경도 삼수, 경상도 영덕 등을 들락거리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합니다.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해 들어가며 꿈에 그리던 낙원[仙界]을 발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고산은 낙원을 얻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고산에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보길도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버릴 수 없었고, 어쩌면 낙원일 수도 있었던 땅을 도피와 쾌락의 은둔 공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실상 그의 낙원은 왕이 기거하는 한양의 왕궁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집인 낙서재를 북향하여 왕이 있는 한양 쪽으로 세웠고, 세연지 연못가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과는 달리 끝내 부름을 받지 못했고, 부름을 받을 만하면 정치적 반대파들의 방해로 좌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요. 그가 꿈꾸던 왕궁이라는 낙원으로의 출사가 좌절되었을 때 그는 전혀 새로운 낙원을 꿈꿀 수는 없었을까요.

만약 고산이 출사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사를 염원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했을 때 한양이 아니라 저 본토로부터 버림받은 땅, 보길도, 소안도, 노화도, 당사도, 넙도, 흑일도, 백일도 등의 섬들, 그 섬 안의 민중들을 부축하여 함께 낙원을 세울 수는 없었을까요.

임진, 병자 양대 전쟁이 끝나고,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비단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권력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이 땅의 민중들은 기아와 역병으로 또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까. 하지만 고산은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민중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만의 '낙원'을 만드는데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보길도의 세연정이고 낙서재며 동천석실입니다. 그것이 또한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 별서들입니다. 그것을 시대의 한계만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은 그보다 앞서거나 동시대에 부패한 세상을 뒤엎으려던 선비들, 정여립, 허균 같은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신음소리 그치지 않을 때 고산의 정원, 세연정에서는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어부사시사> 가락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어부사시사>에는 어부의 현실이 없고 어부의 풍경만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고산을 배반한 것은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왕들이나 정적들이 아니었습니다. 고산을 배반한 것은 무엇보다 고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산은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이라는 '낙원'을 세웠으나, 결코 낙원에 이 수 없었습니다.

▲보옥리 동백 숲에서 요정처럼 튀어나온 아기염소Ⓒ섬학교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지금은 노화도란 섬과 보길도가 다리로 연결되어 여객선은 노화도의 동천항이나 산양항으로 입항합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길도의 관문은 보길도 청별항이었습니다. 고산이 사람들을 배웅하며 작별을 했다는 데서 유래된 청별(淸別). 청별항에서 세연정 방향으로 5백 미터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호수처럼 아늑한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이 황원포입니다. 윤위가 <보길도지>에서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고 기록했던 그 황원포입니다.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논이 생기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만조 때면 비할 데가 없이 그윽합니다.

다시 500여 미터를 가면 세연정 정원입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누정 공간, 말하자면 위락시설인 셈입니다. 고산 스스로 놀거나 친구들, 조정의 관리들이 왔을 때 접대하던 장소가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펼쳐진 세연지, 회수담, 연희무대였던 동대와 서대, 산중턱의 옥소대 등입니다. 고산 당시에는 3천여 평의 공간이 세연정 정원이었다는데 지금은 일부인 1천여 평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바로 옆 건물은 보길초등학교입니다.

세연정과 옥소대를 둘러본 뒤, 큰 도로를 따라 부용리 마을로 향합니다. 정면에 보이는 큰 봉우리가 해발 425m인 보길도의 주봉 적자산입니다. 적자산 앞의 조그맣고 둥근 봉우리는 미산이지요. 산들에 둘러쌓인 마을의 생김이 그대로 연꽃 봉우리 모양입니다. 어째서 고산이 그 마을을 부용(芙蓉)동이라 이름 지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이, 숙제의 수양산에서 따온 미산(薇山)이라는 이름은 무언가 어색하기만 합니다. 고산은 백이, 숙제처럼 고사리나 뜯으며 산중에 은거하겠다고 '고사리산'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보길도에서 고산의 삶은 기실 고사리 뜯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부용리에 들어서면 그대로 산중입니다. 더 이상 바다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 갯냄새 나지 않는 첩첩산중. 부용리 마을회관 앞에서 이정표는 낙서재와 동천석실 양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마을회관부터 부용리 마을 전체가 동백나무 숲속에 들어 있습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면 벌치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트럭 가득 벌통을 싣고 와 꿀을 따가곤 합니다.

낙서재 쪽으로 들어섭니다. 근래에 복원이 된 낙서재 권역은 고산의 주거공간이었습니다. 3천여 평의 공간에 낙서재, 곡수당, 곡수대, 동와, 서와 등의 건물과 연못 등이 있었는데 고산은 이곳에 기거하며 보길도에서 얻은 자식들과 제자들을 길러냈다 합니다. 고산이 낙서재에 기거하며 지은 시 한 편입니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세상의 무슨 일이 내 마음에 이르리요
가슴 가득한 호연지기를 아는 이 없으니
한 곡의 미친 노래를 홀로 읊어 보노라
(고산 윤선도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 전문)

낙서재 등의 건물은 고산 사후 자식들이 기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낙서재에서 내려와 동천석실로 향합니다. 석실에 이르려면 계곡을 건너야 합니다. 계곡의 물이 말라 있습니다. 한때 빼어났던 이 계곡은 우기 한 철만을 제외하고 늘 바짝 말라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다 저 위의 상수원댐 때문입니다. 고산이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은 물소리가 난다하여 낭음계라 이름한 계곡. 그 빼어난 계곡미는 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일입니다. 당시 부용리 마을 주민들은 크게 반대했습니다. 댐을 건설하지 않아도 사철 계곡에 넘치는 물로 식수나 농업용수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 섬 노화도 상업지구에 상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군사정권은 부용리 주민들의 항의 시위를 무장경찰을 들여보내 진압하고 댐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돌다리를 건너 개울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됩니다. 고요한 동백나무 터널 아래 한적한 오솔길이 20여 분간 지속됩니다. 고산은 51세 때 13세였던 설씨녀를 만나 셋째 부인으로 삼고 보길도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현재 보길도의 윤씨들은 그 후손들입니다. 고산은 설씨녀와 둘이서 이 길을 자주 올랐다 합니다. 팔순이 된 고산도 보름날 밤이면 달구경을 위해 올랐던 가벼운 길이지만 자동차 문화에 오염된 현대인들은 이 잠깐의 거리도 견디지 못해 투덜거리기 일쑤입니다.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 있는 천연의 바위들을 이용해 만든 바위 정원입니다. 위태로운 절벽 위에 단칸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팠습니다. 우기에는 연못자리에 아직도 연꽃이 핍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선계 공간이지요. 석실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적자산 줄기의 능선이 비단결처럼 부드럽습니다. 이곳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천석실이 가진 조경의 뛰어남은 절벽의 정자도, 바위 위의 연못도 아닙니다. 적자산이 품어안은 부용리 마을의 안온함으로 인해 이곳은 비로소 명승이 됩니다. 석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에 취해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일어설 생각이 없습니다. 보길도 여행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도 좋지만 섬에 온 사람들은 바다가 그리워 해변으로 갑니다.

▲절벽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을까! 도치미 끝에서 마주한 바다.Ⓒ섬학교

절벽에서 되찾은 안식, 도치미

전국적으로 이름난 보길도의 해변은 단연 예송리 해수욕장입니다. 하지만 보길도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여러 곳 있습니다. 특히 중리와 통리, 두 백사장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깊지 않아 물놀이하기 아주 좋습니다. 특히 중리 해수욕장은 수백 미터를 바다로 나가도 어른 가슴까지 밖에 차지 않는 천혜의 물 놀이터입니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그 청환석의 해변으로 인해 명성이 자자하지만 실제 해수욕을 하기는 적당치가 않습니다. 수심이 깊고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놀기에 좋은 곳이지요.

장쾌한 바다를 보려면 선창리와 보옥리 마을로 가야 합니다. 특히 보옥리 공룡알 해변과 동백나무 노거수림은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뾰족산 아래 공룡알 같이 둥근 돌들이 펼쳐진 해변, 썰물 때의 보옥리 해변은 그 크고 둥근 돌들이 살아 움직이며 들끓습니다. 일몰을 보기 좋은 곳은 겨울철엔 선창리 망끝전망대, 여름철엔 정동리 솔섬이 으뜸입니다. 보길도의 주산인 적자봉에서 보는 풍경도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가 보입니다. 구름 위에 붕 떠있는 듯한 제주도 풍경은 가히 제주가 왜 신선들이 산다는 영주로 불렸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하지만 보길도 최고의 트레일은 아무래도 도치미입니다. 보길도를 여러 번 방문한 사람 중에도 도치미를 가본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오랫동안 숨겨졌던 비경이기 때문이지요. 남도에서는 도끼를 도치라 합니다. 도치미란 도끼날 끝처럼 가파른 절벽이라는 뜻이지요. 왕복 4㎞의 도치미 길은 10분 남짓만 경사일 뿐 내내 평탄한 길이 이어집니다. 능선에서는 다도해의 섬과 바다가 환상처럼 펼쳐집니다. 마침내 도치미 절벽에 다다르면 거기 숨이 딱 멈출 것 같은 절경이 나타납니다. 위태로운 절벽인데 그토록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절벽 같은 삶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해 주는 꿈같은 풍경입니다.

▲봄동은 봄이 아니라 한겨울, 보길도 등 남쪽 섬에서 나온다.Ⓒ섬학교

섬학교 제55강, 1월 7(토)∼8(일)일, <보길도 동백꽃 비경 여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7일(토요일)>
06:10 서울 출발 (뱃시각에 대기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06시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5강 여는 모임
-해남 땅끝마을 도착
-땅끝 출항
-노화도 산양진항 도착
-점심식사(노화도 이목리 섬밥상)
-보길도 부용동 원림 걷기(5km)
세연정 동백숲→(버스이동)→동천석실 동백터널→부용리 동백숲→낙서재
-보옥리 공룡알 해변 탐방과 일몰 감상
-저녁식사 겸 뒤풀이(보옥리 민박집에서 전복요리와 어촌 밥상)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월 8일(일요일)>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어촌밥상)
-숨겨진 비경 도치미끝 걷기
-예송리 해변 탐방
-노화 동천항 출항
-완도 화흥포항 도착
-점심식사 (완도읍내에서 생선구이)
-서울 향발. 제55강 마무리모임

▲<보길도 동백꽃 비경 여행> 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볍고 따뜻한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물통,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 거부당합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전설들을 품고 환상처럼 떠 있는 보길도 중리 앞바다 무인도들Ⓒ섬학교

<학습자료>

[보길도(甫吉島)]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의 본섬이다. 완도읍에서 남서쪽으로 18.3㎞, 해남군 땅끝에서 12km 떨어져 있고, 완도군 노화도와 소안도, 넙도 등과 지근거리에 있다. 동경 126。37′, 북위 34。06′에 위치, 면적 32.99㎢. 인구 4000여명.

*보길도(甫吉島) 지명 유래
<고려사> 제113권 - 열전 제26에 최영 장군이 이끄는 전함이 보길도(普吉島)에 도착해 정박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산 윤선도의 입도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보길도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普吉島가 후일 甫吉島로 한자가 바뀐 것으로 사료된다. 보길도의 한자는 유래와 관련해서는 보고래, 배골두, 보고래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인근 섬의 주민들이 보길도를 바구리섬이라고 불렀던 것에 비추어 바구리의 옛말인 보고리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園林)
주택 속에 인위적인 조경을 한 것이 정원이다. 반면에 동산과 숲, 계곡 등 자연을 그대로 조경으로 삼아 집과 정자 등의 건축물을 배치한 것이 원림이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고산이 보길도 부용리와 부황리 일대의 계곡과 바위, 숲과 동산 등 자연을 조경으로 활용하여 정자와 집들을 배치하고 가꾼 것이다. 크게 3대 공간으로 나뉜다. 낙서재, 곡수당 등의 주거공간, 동천석실 일대의 선계공간, 세연정 일대의 위락공간이 그것이다.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4호로 변경되었다. 지정면적은 480,728㎡.
-세연지(洗然池) : 자연 계곡을 판석(板石)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의 돌다리)를 세워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
-세연정(洗然亭) : 1637년,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단을 조성하여 지은 3칸짜리 정자이다.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현판이 달렸었다. 낙기란, 호광루, 세연정 등.
-낙서재(樂書齋) : 거주 공간. 주거하며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도 하던 곳이다. 동천석실과 대각선상에 있다. 무민당(無悶堂) 등 건물 4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집터만 남았었다. 최근에 고증을 통해 복원했다.
-곡수당(曲水堂) :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와 설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조성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이 있었다.
-동천석실(洞天石室) : 동천은 선계를 뜻한다. 산중턱 절벽 위에 지은 1칸짜리 집. 여기서 독서하며 사색을 즐겼다 한다.
-그밖에 옥소대, 소은병(小隱屛),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고산이 보길도 내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판석보로 흐르는 계곡을 막아 세연지 연못을 조성한 것은 기발하다.

*백도리(白道里)
백도리는 속칭으로 부르던 이름은 백두. 우암 송시열이 1689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선백두 글씐바위에 남겨놓은 시에는 백도(白島)로 기록되어 있다. 백도리 주변에 있는 바위들이 흰색으로 되어 있어 하얀 섬같이 보인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백도리에서 맨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을 안백두, 선백두라 한다. 선백두 해안 백도리에서 처음으로 김발을 막았던 곳은 발막금이라 한다.

*중리(中里)
통리, 여항, 백도, 중리의 4개 마을 중 가장 중심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

*여항리(余項里)
보길도 지형으로 보아 주머니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해서 목덜미 항(項)자를 붙여서 여항이라 했다. 옛 기록에는 여복항리라 했다. 여항 마을 옆의 작은 무인도는 목섬이다.

*통리(桶里)
해안선 모양이 물통처럼 생겼고 만조 시에는 통에 물을 가득 담아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덜밑, 북암, 농암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예송리(禮松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년)때 장흥 마씨(長興 馬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해남 윤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검푸른 갯돌 해변과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常綠樹林)이 있다.

*예송리 애들구미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거칠게 부딪치는 곳으로, 고기잡이배가 풍랑으로 육지를 눈앞에 두고 파선하여 어부들이 죽으니 애들업다(억울하다) 해서 애들구미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복생도
예송리 앞의 무인도, 풍란자생지로 유명하다. 오랜 옛날 당사도의 생김이 임금 왕(王)자 모양이라 왕이 날 섬이라 했는데 어느 순간 점 복자를 쓰는 복생도(卜生島)가 생겨나며 당사도는 구슬 옥(玉)자 모양으로 변해버렸고 왕이 나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기섬
예송리 아기장수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섬. 아기장수 군대의 깃발을 들고 달려오다 아기장수가 죽자 그대로 멈춰 섬이 되어버렸다.

*갈마섬
아기장수 설화에 나오는 섬. 아기장수를 태우러 오던 천리마가 그대로 멈춰서 섬이 되어버렸다 해서 갈마섬이다.

*예작도(禮作里)
예송리 앞바다의 작은 섬. 조선 순조(純祖 1801∼1834년) 때 김해 김씨가 제일 먼저 입주하고 그후 다른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섬에재기 또는 도예재기 등으로 불렀다. 감탕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감탕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3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송리(月松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년) 임금 때 강릉 유씨(江陵 劉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철종대에 김해 김씨와 경주 정씨, 전주 이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월송리를 월숭재이, 월숭정이라 불렀다. 방조제를 막아 만들어진 월송리 앞 들녘을 뻘땅이라 한다.

*청별(淸別)리
원래 부황리의 일부였으나 면소재지가 되면서 청별리로 분리됐다. 고산이 지은 이름.

*부황리(芙黃里)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원림 중 유희공간인 세연정, 세연지 등이 있다. 원래 황원동이었으나 일제시대인 1914년 부용동과 황원동을 같은 행정마을로 만들면서 앞머리 한자씩을 따다 부황리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 혹은 환동이라 부른다.

*부용리(芙蓉里)
부용동 원림 중 주거공간인 낙서재, 곡수당 등과 선계공간인 동천석실이 있는 마을. 마을 전체가 분지형으로 부용화(芙蓉花, 연꽃) 같이 생겼다하여 부용동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부용리를 빈동이라 한다. 고산이 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조산이 있다. 낙서재를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비보로 조산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보옥리(甫玉里)
1700년대 전주이씨가 처음 입주하였다. 마을 앞 뾰족산[甫竹山] 해변가에 용이 기거하다가 큰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였다 하여 보옥리라 했다 한다. 선창리와 함께 보길도에서 멸치잡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질 좋은 멸치와 멸치젓을 싼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섬사람들은 뽀리기, 뽀래기라 한다.

*정자리(亭子里)
인조(仁祖 1623∼1649년) 때 김서오가 정쟁을 피해 입주하고 그 후 고씨, 강씨, 심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 좋은 정자나무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 하여 정자리(亭子里)라 하였다고 한다.

*정자리 우두(牛頭)
마을의 지형이 소머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숯구목재
정자리에서 부황리로 넘어가는 옛길. 옛날에 숯을 굽던 곳, 지금도 많은 숯굴터가 남아 있다.

*정동리(亭東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년) 때 창녕 조씨가 해남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그후 임씨, 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처음에는 정자리(亭子里)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주민수의 증가로 분구되면서 정자리의 동쪽에 있다 하여 정동리(亭東里)라고 하였다.

*등문(登門)
정동리의 자연 부락. 고산 윤선도가 처음 보길도에 왔을 때 올랐던 곳이라 등문(登門)이다. 수십년 전만 해도 여객선은 등문 앞바다에서 기항을 했고 종선이라는 작은 나룻배가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솔섬
정동리 마을 앞 선착장 옆 2,000여 평 정도의 무인도. 정동리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섬 위에는 30여 주의 소나무 고목이 자생한다. 일몰이 일품이다.

*선창리(仙昌里)
김해 김씨, 초계 최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후 천안 김씨, 안동 권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 제주도를 드나들던 선박들의 선착장이라 해서 선창리(船倉里)라 하다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창리(仙昌里)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전설에는 제주도 한라산 산신이 지리산 산신에게 초청을 받아 가던 중 마을 남쪽 망매산 망월봉에서 달구경하고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니 인민(人民)이 창성할 마을이라 해서 선창리(仙昌里)라 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경치가 좋아 선인들이 놀던 곳이라 하여 선창리라 했다는 설이 있다.(교장/강제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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