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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두대간 종주 1구간 출발합니다!

2016년 9월 지리산 천왕봉–하늘의 봉우리에 오르다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가 예고한 대로 2016년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백두대간’.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산줄기가 아닙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의 시원입니다. 또한 한반도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땅에 기대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간입니다. 백두대간 줄기 따라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겨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지리산 산그리메Ⓒ백두대간학교

생명의 근간인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백두대간 종주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보따리를 찾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난 6년간 60강에 걸쳐 백두대간 아름다운 산하를 걸었던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결정체인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 중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남측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 향로봉까지 701km입니다. 이중 비법정탐방로 79.9km를 제외하면 도상거리 621.1km입니다. 접속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백두대간 종주거리는 약 1,000km에 이릅니다.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 떠납니다. 마음 한 켠 간직해왔던 꿈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힘든 여정이지만 도반들과 함께라면 거뜬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나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모두의 희망인 ‘백두대간 종주’ 힘차게 출발합니다!

▲천왕봉 표지석Ⓒ백두대간학교

[산행지 안내]
백두대간학교 제61강 9월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 첫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9월 24일(토) <지리산 천왕봉 구간>입니다.

대망의 백두대간 종주 첫 산행은 백두대간의 마지막이자 처음인 <지리산 천왕봉 구간>입니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智異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백두산이 흘러서 내려온 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는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백두대간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종주의 첫발을 힘차게 내딛습니다. 장중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산에서 하늘길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개천문을 지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에서 대단원의 첫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백두대간 종주! 우리 함께 지금 출발합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6년 9월 24일(토)
-산행출발 : 2016년 9월 23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중산리탐방지원센터-로타리대피소-천왕봉-장터목-촛대봉-세석고원-거림
-산행거리 : 약 16.2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10시간
-난 이 도 : 상하(★★☆)

▲개천문Ⓒ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 종주의 첫발은 중산리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합니다. 헤드랜턴의 불빛을 밝히고 어머니의 산으로 들어가며 종주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바닥에 깔린 산자갈을 밝으며 어둠속 숲으로 들어갑니다.

알싸한 새벽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윽한 나무 내음과 함께합니다. 조선건국 설화가 흐르는 칼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흔들거리는 작은 나무다리입니다. 장터목과 천왕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우측 법계사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이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바위까지 오르는 길은 거친 숨과 흐르는 땀과 함께합니다. 가끔 다리쉼을 하고 체력 안배를 하며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오릅니다. 수차례 휴식 후 망바위 이정표입니다.

망바위에 올라섭니다. 시원한 조망에 가슴이 후련합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영신봉에서 이어진 낙남정맥의 장쾌한 능선을 눈에 담습니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오르막을 오르면 문창대입니다. 하늘봉우리 천왕봉이 보이고 법계사가 지척입니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법계사를 지납니다. 철계단이 이어져 있고 넓은 바위를 지나 개천문으로 향합니다.

천왕봉은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과 하늘로 통하는 문인 통천문을 지나야만 오를 수 있는 하늘의 봉우리입니다. 하늘문을 열고 하늘의 봉우리로 오릅니다. 발아래 펼쳐진 수많은 산들의 중첩을 보면 왜 하늘봉우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위벽 아래 바위틈에서 틈에 졸졸 물이 흐릅니다. 바로 남강의 발원샘 천왕샘입니다. 시원한 석간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입니다. 바로 위로 천왕봉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봉우리는 쉽게 오르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오르막과 계단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념무상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하늘의 봉우리에 닿습니다. 천왕봉입니다. 백두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입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입니다.

천왕봉에 서면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반야봉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마루금이 유장하게 펼쳐집니다. 중봉을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진 신백두대간 능선도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산그리메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백두대간이 그려내는 최고의 예술품입니다. 백두대간 하늘봉우리의 기운을 가득 담고 천왕봉과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제석봉으로 이어진 마루금은 고사목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푸른 초원과 구상나무, 고사목, 그리고 가을하늘이 그려내는 제석봉의 풍경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환상 그 자체입니다.

바람이 전해주는 장터목의 떠들썩한 이야기를 듣고 숲을 지나 올라서면 연하선경(烟霞仙境)이 펼쳐집니다. 구름에 감싸인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처럼 세상사를 잊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선경을 벗어나면 촛대봉입니다.

촛대봉에 올라서면 세석고원이 정원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낙남정맥의 시작인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 30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평원이 온통 구상나무와 철쭉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습지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연진과 호야’의 슬픈 전설과 격동기 수많은 아픔을 간직한 핏빛 철쭉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세석고원입니다.

백두대간 종주 첫 산행은 세석대피소에서 백두대간 마루금과 인사를 나눕니다. 세석대피소에서 함께한 도반들과 점심을 나누고 거림으로 내려섭니다. 삼신능선 갈림길에서 거림으로 조릿대 길을 따라 걷습니다. 거림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 하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걷는 길입니다. 아름드리 풍채 좋은 노송이 보이면 바로 거림입니다. 거림에서 백두대간 종주 첫 산행을 마칩니다.

▲법계사Ⓒ백두대간학교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9월 23일(금)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역 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사당역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양재역 12번 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00: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3:30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03:40 중산리 출발 – 산행 시작
04:50 칼바위
06:20 로타리대피소 - 아침식사
08:20 천왕봉
09:20 장터목대피소
10:00 연하봉
11:10 촛대봉
11:30 세석대피소 - 점심식사
13:40 거림 - 산행 마감/스트레칭
거림산장(경남 산청군 시천면/055-973-4568)
토종닭 요리와 막걸리로 뒤풀이
15:30 거림 출발
19: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1구간-지리산 천왕봉 산행도Ⓒ백두대간학교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자켓,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도시락 2식(아침, 점심) 등

[2016년 10월 백두대간 종주 2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지리산 칠선봉 구간
-산행일시 : 2016년 10월 15(토) - 무박 산행
-출발일시 : 2016년 10월 14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백무동-세석고원-영신봉-칠선봉-벽소령-음정마을
-산행거리 : 약 19.5km
-소요시간 : 약 12시간
-난 이 도 : 상중(★★☆)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세석고원Ⓒ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최후를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적,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정인홍·김효원·최영경 등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혁명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제석봉Ⓒ백두대간학교

[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여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해발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1800m. 남강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천왕봉] 1915.4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제석봉] 1808m.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 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이다.

[장터목] 천왕봉 아래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봉] 1730m. 장터목의 남서쪽 봉우리로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건너다볼 수 있는 위치다. 정상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지리8경’ 중 ‘연하봉 선경’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연기(煙, 연기연)가 노니는(霞, 놀하) 선경’이니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연기는 당연히 구름을 지칭하며 선경이라 함은 좁게는 바로 건너다 보이는 천왕봉이고, 넓게는 천왕봉은 물론 중산리계곡과 거림계곡, 백무동계곡 그리고 겹겹이 둘러져 꿈틀대는 능선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촛대봉] 1703.7m. 옛날에 연진이라는 여인이 남편 호야와 대성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중 흑곰에게서 세석고원에 있는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상의 없이 산신령이 금기시킨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 평소 흑곰과 앙숙이던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일러바쳐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남편과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꿔야 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 여인이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고 촛대봉 바위는 연진 여인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평생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철쭉꽃을 가꾼 여인의 슬픔과 피가 이곳의 철쭉꽃을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었다 한다.

[세석고원] 오래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경남 산청,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 세석고원(細石高原, 1400m~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 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의 철쭉은 ‘지리산 십경’의 하나로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자료출처 : 백두대간학교,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 등)

▲너와 나의 생명길 백두대간을 종주합니다.Ⓒ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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