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두 번째 국가, 부여(夫餘)!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夫餘史) 700년을 깊고도 넓게, 그리고 처음으로 공부하는 <부여사학교>가 오는 11월 문을 엽니다. 교장선생님은 송호정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입니다.
송호정 교장선생님은 얼마 전 처음으로 부여사를 집대성해 <처음 읽는 부여사>란 책으로 펴내 주목을 받은, 부여사의 권위자입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과 고대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단군, 만들어진 신화> <한국생활사박물관> 2권(고조선) <아틀라스 한국사>(공저)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1(원시), 2(고조선), 6(발해) <처음 읽는 부여사> 등이 있습니다.
부여는 고조선 후기인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등장해 중국 한나라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주변의 유목국가와도 길항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선조 이래 다른 나라에 패해본 적이 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3세기 중엽까지는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력을 소유했고, 494년 고구려에 최종 귀속되기까지 70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긴 역사를 이어간 부여에 대해, 우리는 현재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초기국가의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고조선과 고구려 중심의 역사서술이 이어져 온데다, 문헌자료는 물론 그것을 보충할 고고학 자료 역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는 한국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서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고구려, 백제, 발해는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자랑스러워했고, 신라와 가야문화에서도 부여의 영향이 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여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등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품으려고 노력한 지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국가로, 우리 역사의 각 시기마다 끊임없이 호출되는 이름이었습니다. 부여는 영토확장의 욕망이 표출되거나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해야 할 때마다 주목받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부여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름임을 보여주고 있는 징표입니다.
그러나 지금껏 부여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전의 초기국가로 간략히 언급될 뿐이고, 학계의 연구도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부여사학교>에서는 그동안 한국 고대사의 변방에 있었던 부여의 역사를 한국 고대국가의 출발점이자 원류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문을 엽니다. 부여의 기원부터 성장과 쇠퇴, 제도, 생활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부여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모든 것을 집대성하여 강의할 것입니다.
부여사학교는 11, 12월 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이며 총 8강으로 열립니다.
제1강[11월 1일] 부여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랴오허 문명론’
한국과 중국 간의 심각한 분쟁과 갈등을 일으켰던 동북공정은 지난 2007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중국에서는 ‘랴오허 문명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동북 지역의 역사를 상고시대부터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랴오허 문명론’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랴오허 일대를 중화 문명의 발상지로 본다. 이 지역에서 꽃핀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를 황제(黃帝)의 후예들이 일으킨 것으로 전제하고, 이후 그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은 황제의 자손들이며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발원한 예맥족은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고, 그들이 세운 고조선, 고구려, 부여는 중국 왕조의 정치적 지배를 받은 고대의 지방정권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랴오허 문명론’은 그 실체가 없는 중국 학계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랴오허 문명론’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 실체를 접근해 보려 한다.
최근 중국학자들은 이 논리에 기초해 다양한 견해를 쏟아내고 있다. 그 일단을 중국 선양의 랴오닝성박물관 부여 전시장의 설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소수민족이다. 적어도 한초(漢初)에 이미 중국 동북지역 중부의 쑹랴오 평원에서 활동했다. 이 평탄하고 비옥한 땅에서 부여인은 700여 년간 살았고, 동북 지구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탁월하게 공헌했다. 부여는 건국 이래 한 왕조에 신하로서 복속했으며 그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했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충실히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잘 갈무리해 학계는 물론 대중과 공유하는 일은 한국고대사의 전체상을 복원하고, 그것을 우리의 역사로서 분명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본 강의는 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제2강[11월 8일] 주몽의 고향, 부여 역사의 시작
부여국은 타지에서 내려온 망명자 집단이 쑹화강 중류지역, 길림 일대 토착민 ‘예족’ 집단을 흡수, 동화하면서 성립된다.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성왕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탁리국에서 엄호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해 도읍을 정했다는 이주(移住) 전설이다. 이처럼 부여는 탁리국의 왕자 동명이 세력 갈등을 피해 남하해 와서 세운 국가로, 부여 건국 전에 이미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동명설화는 한반도 북방의 이주민 출신 동명과 부여족의 이주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를 건국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제1쑹화강변의 백금보-한서 문화와 길림 일대의 서단산 문화를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것이다.
제3강[11월 15일] 부여의 자연지리 환경 및 그 영역
부여의 위치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은 <후한서> <삼국지>에 나타난다. <후한서>에 따르면 “부여국은 현도 북쪽 100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며, 북에는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2000리로 본래 예의 땅이었다.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평한 곳으로 오곡이 자라기에 알맞다.”
여기서 현도군은 지금의 선양과 푸순 사이에 해당하는 곳으로 여기서 북쪽으로 1000리에 해당하는 곳은 바로 지린성 중부 일대이고, ‘평평하고 넓은 못이 많은 곳’이라면 쑹화강 유역뿐이다. 부여가 일어난 쑹화강 중류 일대는 만주에서 이례적으로 산이 적고 유수한 대평원 지대로 농경과 목축에 유리한 지역이다.
제4강[11월 22일] 부여의 성장과 발전
부여는 고구려와 세력 경쟁을 통해 국력을 키워 나갔다. 처음에는 둘 사이에 군사적 연맹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고구려가 부여의 역량을 넘어서고부터는 곧바로 부여를 병탄하려고 했다. 그래서 부여는 한의 손을 잡고 고구려에 맞섰고, 그 결과 관계가 점차 약화되었다.
남으로부터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 유목민의 압박을 받았던 부여는, 이 양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이들을 제압하는데 부여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에 걸쳐 부여와 한 왕조는 정상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한 왕조는 부여를 두터운 예우로써 대접하였다. 예를 들면 역대 부여 왕이 죽은 후에는 옥으로 만든 관을 썼는데, 한 왕조에서 “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가져다 놓고 왕이 죽으면 현도군에서 가져다가 쓰게 했다”는 것도 부여와 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제5강[11월 29일] 부여의 통치 제도
부여의 왕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가 아니었다. 왕의 권력은 귀족 합의기구의 제약을 받았다. 왕은 특정 가계 출신 중에서 뽑혔고,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가(加)’들의 대표로 군림해도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수해나 한해가 생기고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한 풍습이 이를 방증한다.
부여는 사출도라는 제도로 지방을 다스렸는데,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을 나눈 뒤 중앙은 왕이 다스리고, 네 개의 지역은 제가들이 관할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열어 왕과 제가들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했다. 이때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를 석방하기도 했고, 풍흉에 따라 왕의 치폐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한 축제 때는 전 부여의 읍락민이 참여해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결속을 도모했다. 부여처럼 전국적인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각 지방부족들의 자치력이 강한 사회에서 영고는 민속행사일 뿐만 아니라 통합기능을 수행한 정치행사이기도 했다.
제6강[12월 6일] 부여의 멸망과 부흥운동
부여국은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에 자리잡은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하여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다가, 급기야 285년 선비족 모용외에 의해 수도를 함락당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부여 왕실은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듬해 진 하감 군대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긴 하였으나, 국세는 전과 같지 못하였다. 부여는 4세기 들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연 가까이에서 고립무원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왕 모용황이 보낸 1만 7천 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부여는 전후로 전연(前燕)과 전진(前秦)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 이후 부여는 410년 광개토왕의 정복에 의해 다수 주민과 넓은 지역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부여는 급속히 약화되어 5세기 말까지 간신히 그 세력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494년에는 국왕과 일족이 고구려에 망명, 항복함으로써 그 여맥마저 완전히 꺼져버리고 말았다.
부여의 수도 길림시 모아산 일대에는 부여 귀족들의 무덤이 수천 기 있다. 그 한 무덤에서 부여인의 얼굴로 알려진 금동제 얼굴 모양 가면 한 쌍이 나왔다. 상투를 틀었고, 길고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부여인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상의와 겉옷․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대인들이 회의나 국외로 나갈 때에는 비단으로 수를 놓은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을 입었다.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levirate)이 널리 행해졌다. 취수혼 풍습은 흉노 외에 고대 중국과 고구려에도 있었고 현재 일본에서도 행해졌다. 취수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죽은 형의 재산 상속과 어린 자식의 분리를 방지하여 가족제도를 옹호하는데 있었다. 부여에는 잘못을 저지르면 12배를 물리는 법이 있었다. 이는 투기죄에 가혹형을 주는 것으로 흉노 등 유목민족과 유사한 것이었다. 부여에서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며,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제8강[12월 20일] 우리 역사 속 부여의 의미
고조선 후반기부터 존재한 부여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연결하는 고대국가의 출발점이자 그 원류에 위치하고 있다. 고조선 후기 단계에 만주지역에 등장하여 고구려, 백제가 세워질 때 그 모체가 되는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고대의 대표적인 왕조인 고구려, 백제, 발해 모두 그 국가가 중흥하였을 때 부여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표방하였다. 기록을 보면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고대 이래로 범(汎) 부여족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여 역사에 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만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다시 부각되었다. 특히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신채호가 일련의 저작을 통해 우리 민족이 부여족의 후손임을 다시 부각시켰다. 이후로는 우리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부여는 고조선사와 함께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주 지역의 역사에 대해 우리 역사로서의 관심이 지속되고, 그 지역에서 역사를 주도한 부여사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부여가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 되었던 나라이자, 우리 민족의 원류라는 인식이 오래 전부터 우리 마음속에 존재해 왔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고조선사와 부여사는 한국 고대국가 성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여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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