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는 악화된 상황이 이제 덤덤할 정도로 일상화되어 버렸다.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를 맞교환하더니 박근혜 정부는 군사회담을 비롯한 어떤 형식의 대화도 초지일관 거부하고 있다. 청와대 분위기는 대화라는 말조차도 꺼내기 힘든 모양이다. 남측의 제재국면과 북측의 생존국면이 맞부딪치면서 남북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남북의 평행선은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양측의 핵전략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북은 당 대회 총화보고와 결정서를 통해 핵보유국을 공식화하고 핵 경제 병진노선을 항구적 전략 노선으로 명확히 했다. '선(先) 핵 보유'를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핵전략이 대미 협상용 카드로 활용하거나 한반도 비핵화를 공언하는 등 핵을 포기할 수 있음을 전제로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라면, 이제 당 대회 이후 북한의 핵전략은 핵 포기가 협상의 전제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과거의 전략이 '선(先)협상, 후(後)확산'이었다면 이젠 '선확산, 후협상'으로 바뀌었다. 우선 핵을 보유하고,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미사일 발사능력을 확보하겠다는 심산이다.
이에 비해 박근혜 정부의 북핵정책은 단호한 '선(先) 핵 폐기' 전략이다. 북이 핵 포기를 명확히 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의 대화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북이 핵포기를 결심할 때까지 일관되게 제재를 지속한다는 방침이고 제재국면에서 대화나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중국이 거론하고 미국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평화체제 논의나 북이 연일 제안하고 있는 군사회담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핵 포기 전까지는 협상과 대화 거부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자체도 포기한다는 일관된 제재 전략인 셈이다.
'선 핵 보유'와 '선 핵 폐기'가 충돌하는 지금 한반도에서 핵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은 거칠게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남측의 '선 핵 폐기'를 위한 제재가 작동해서 북이 굴복하거나 붕괴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첫 번째 시나리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제재로 인해 김정은이 무릎꿇고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북이 지속적으로 핵무기고를 늘리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능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경우이다. 이 경우 남측의 선 핵 폐기는 완전 실패하게 되고 북한은 시일이 지날수록 핵 능력이 증대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남북의 치킨게임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북핵문제 악화를 방치하고 있다.
북의 선 핵 보유가 당장 돌이킬 수 없는 조선로동당의 총노선이라면 현실의 북핵문제를 관리하고 상황 악화를 막으면서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전략적 지혜는 선 핵 폐기라는 원칙과 고집만으로는 부족하다. 박근혜 정부의 '선 핵 폐기'라는 원론적이고 단호한 원칙적 입장 천명만으로는 지금 당장 북핵문제를 완화시키거나 해결하기 어렵다. 선 핵 폐기에 따른 일관된 제재국면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와 협상은 항상 병행해서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제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란 핵협상도 제재의 효과가 작동한 측면이 있지만 물밑에서는 협상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석유수출을 해야 하는 개방형 이란경제가 금수 제재로 어려움을 겪은 게 사실이지만 제재 일변도로 이란의 완전 항복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제재는 상대국가를 압박함으로써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것이지 제재 자체를 목표로 해서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고 상대국가의 완전굴복이나 체제붕괴를 꾀하는 것이 아니다.
유엔결의 2270호의 대북제재도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다. 핵실험을 한 북한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당한 제재이지만 이를 통해 김정은 체제가 붕괴하거나 완전히 무릎 꿇고 엎드려 나올 때까지 제재만을 지속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의안에 제재와 함께 9.19 공동성명에 따른 대화 재개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 맥락이다.
대북제재는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유도해서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가동될 수 있도록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일체의 협상을 배제한 채 김정은이 생각을 바꾸고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제재만을 고집하는 것은 본래 의미의 제재에도 맞지 않는 감정적 오기와 고집일 뿐이다.
그래서 제재는 제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현실적인 정책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유엔의 대북제재는 4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게 정치·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하고 더 이상의 추가도발을 억지하기 위한 목표이며 동시에 6자회담을 비롯한 북핵협상이 재개되도록 하기 위한 정책목표에 따른 것이다. 제재와 협상은 동시병행하는 것이다. 제재를 일관되게 하면서도 제재 이후 혹은 제재 국면에서의 대화를 모색하고 준비하고 유도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제재 역시 제재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제재의 목표를 설정하고 차후의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작금의 제재국면을 마치 김정은 정권의 성격변화나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다면 결코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핵실험에 대해 명확한 책임을 묻되 협상의 테이블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해내는 게 작금의 제재국면의 목표여야 한다.
따라서 북의 군사회담 제의나 중국의 평화협정 병행론 등은 무시만 할 게 아니라 제재를 지속하면서도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상을 이끌어나가려는 자신감을 보일 필요가 있다. 대화를 시작한다고 해서 제재를 중단하는 것이 결코 아닌 만큼 제재와 협상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핵실험 도발에 대한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방침 역시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일견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공단 재가동의 조건을 지나치게 높게 잡는 것은 피해야 했다. 상황 변화에 따른 원상복구의 전제조건을 지나치게 높은 목표로 설정해 놓으면 후일 돌이키기 힘든 자폐적 조치가 될 수밖에 없다. 핵실험의 대가로 개성공단을 폐쇄한 만큼 북이 핵실험 유예나 핵동결을 수용하고 북핵 협상에 나오는 조건이면 공단 재가동이 가능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원상복구를 북한의 핵 폐기라는 조건과 연동시켜 놓고 있다. 핵무기 개발에 공단 근로자 임금이 전용된다는 우려라면 무작정 폐쇄가 아니라 현금 아닌 현물지급 등 다양한 방식을 논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외교적 출구를 마련하기보다는 공단폐쇄라는 최종조치를 서둘러 강행했다. 공단 재가동을 위한 퇴로를 스스로 차단해 놓은 것이다.
대북정책을 포함한 외교정책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원칙과 단호함만을 가지고 감정과 오기로 정책 결정을 해서는 안된다. 제재국면에서도 대화는 진행되어야 하고 개성공단 폐쇄에서도 재가동의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한다.
남한의 선 핵 폐기의 고집이 북한의 선 핵 보유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비핵화를 이유로 남북관계를 포기하거나 제재를 이유로 대화를 거부하는 일차원적이고 감정적인 대북정책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외교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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