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자신의 마음이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마음 간수를 잘 못하고 살아갑니다. 늘 어떤 일엔가, 또 누구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기 일쑤지요. 내 마음 같지만 결코 내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작 내 마음이 필요할 때는 마음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자은도 섬길, 그 느리고 소박한 오솔길에서는 마음을 빼앗길 염려도 없이 차분히 내 마음과 동행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세파에 시달렸던 마음도 모처럼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6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48강은 6월4(토)∼5(일)일, 1박2일로 신안군의 보석 같은 모래섬 ‘자은도’로 갑니다. 백길, 분계 해변 등 모래 해변이 9개나 될 정도로 섬 곳곳이 아름다운 백사장 천국입니다.
자은도에는 빼어난 해변 트레일인 <해안누리길>이 있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보면 걸을 수 있습니다. 해안누리길에서는 전통어법인 개막이로 어로를 하는 어부와 재래식 김 양식장인 마장발의 풍경도 볼 수 있습니다. 원시어로인 독살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길을 걷는 일 자체가 어촌 생태 탐방길이기도 합니다. 초여름, 마음의 행로를 따라 걷는 섬 길에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섬학교, <신안 자은도 1박2일>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섬으로 가는 배
“총각은 어디서 왔어?”
“대구요.”
“자은으로 가, 암태로 가?”
“몰라요.”
“자은으로 간 갑서. 자은이 일이 많해.”
“무슨 일 하러가? 양파? 대파?”
청년은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이내 두 팔을 벌려 길다는 표시를 한다.
“대파네 대파.”
자은도행 여객선 선실 안에서 초면의 할머니와 청년은 밑도 끝도 없이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청년은 일거리를 찾아 섬에 들어가는 중이다. 아마도 직업소개소에서 소개를 받았을 것이다. 내륙인 대구에서 온 청년은 자신이 가는 섬이 암태도인지 자은도인지도 모르고, 일하는 곳이 대파밭인지 양파밭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긴 그런 것 따위 상관할 바가 아닐 것이다. 어차피 품팔이 가는 길, 대파밭이면 어떻고 양파밭이면 어떤까. 암태도면 어떻고 자은도면 어쩔 것인가.
할머니도 섬에 사는 사람은 아니다. 고향이 자은도다. 젊은 시절 섬을 떠났고 지금은 고향 에 “친정 엄마 아부지 제사 지내러 가는 길”이다. 1년에 한번은 꼭 가는 고향 길이 오늘이다. 그래서 기분이 들떠 있다.
“제사라도 없으면 갈 일이 없어요. 결혼식도 다 목포나 광주에서 해버리니깐.”
부모님 제사 덕분에 일 년에 한번이라도 고향을 찾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총각도 할머니도 이제 모두 잠잠하다. 여객선이 암태도 오도항으로 입항한다. 자은도와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네 개 섬이 다리로 연결된 뒤 자은도에 가기 위해서는 암태도나 팔금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야 한다. 암태도 선착장에서는 자은도까지 뱃시간에 맞춰 공영버스가 오간다.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온 시원의 어부
오늘도 어김없이 기적이 일어났다. 썰물 때가 온 것이다. 하루에 두 번은 바다이고 두 번은 땅이 되는 갯벌. 두 개의 시간을 가진 한운리 바다는 날마다 모세의 기적이 연출된다. 그러므로 서남해의 섬에서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일상이다. 성스러움 또한 일상이다. 무수한 생명들의 거처인 갯벌은 오랜 세월 사람을 살려온 생명의 탯줄이다. 오늘은 한운리 앞 무인도 옥도까지도 바닥이 다 드러났다. 갯벌은 김을 기르는 마장발이 숲을 이루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이 마치 물이 가득 찬 바다처럼 투명하다. 매끈한 갯바닥에 반사되는 빛 때문일 것이다. 광활하게 드러나 갯벌 위로 웬 사내 하나 나뭇단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 간다. 갯벌 가운데 나뭇단을 부린 사내는 긴 나무 막대를 들어 하나씩 힘껏 꽂아나간다. 사내는 막대에 그물을 걸기 시작한다. 개막이 그물이다.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갯벌어업의 원형이다. 사내는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온 시원의 어부다.
밀물의 시간이면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들이 저 그물에 꽂혀 사과처럼 주렁주렁 매달리게 될 것이다. 사내는 다시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사과를 따듯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따다가 내다 팔고 곡식을 사올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오랜 세월 어부인 저 사내와 사내의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워왔을 것이다. 사내의 개막이 그물 뒤로 늘어선 재래식 김양식장인 마장발의 수천, 수만 개 말뚝들도 사내 같은 어부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꽂아나간 것들이다.
그 자신은 깨닫지 못하지만 풍경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풍경과 분리되지 않고 풍경 속에 녹아들어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 한운리 갯벌의 풍경은 마침내 저 어부로 인해 완성된다. 과거에 흔했던 갯벌의 풍경은 이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매립과 간척으로 갯벌이 사라져가는 시대. 갯벌이 사라지면서 그물을 치는 어부들도 사라져버렸다. 갯벌의 저 어부는 끝내 알지 못하리라. 그 자신이 갯벌 어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저 풍경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 같다. 저것은 필시 갯벌의 ‘만종’이다.
마음과 함께 걷는 길
자은도의 진짜 <해안누리길>은 갯벌이 아름다운 한운리 솔숲으로부터 시작된다. 솔숲은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조성됐을 것이다. 또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재앙을 막아주는 우실로도 기능했을 것이다. 해안길은 내내 바다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굴곡진 해안을 따라 풍경도 시시각각 변해간다. 하늘로 이어질 듯 길게 뻗어나간 오솔길은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평화롭다.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오늘 이 길을 걷는 이는 나그네 혼자뿐이다. 겨울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남녘의 섬은 바람만 불지 않으면 겨울에도 따뜻하다. 그런데도 이 아름다운 길을 독차지하고 걸을 수 있다니 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자동차도 사람도, 어떠한 인공적인 장애물도 없는 해안길. 마음이 번잡스럽지 않으니 마음 빼앗길 일이 없다. 그러니 길은 자연히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는 내면의 여행길이 된다. 들뜨지 않고 저 심연의 끝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마음의 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 자신의 마음이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마음 간수를 잘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늘 어떤 일엔가, 또 누구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기 일쑤다. 내 마음 같지만 결코 내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작 내 마음이 필요할 때는 마음을 쓸 수가 없다. 빼앗겨버린 마음을 찾아오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오늘은 마음도 따라왔다. 이 느리고 소박한 오솔길에서는 마음을 빼앗길 염려도 없이 차분히 내 마음과 동행하며 걷는다. 세파에 시달렸던 마음도 모처럼 휴식을 얻는다. 마음과 대화하며 가다보면 진정으로 마음이 가고자 하는 행로를 찾게 된다. 참으로 고마운 길이다.
향기로운 몬치 구이
길은 한운리에서 둔장리로 이어진다. 둔장리 삼거리에 서자 비로소 해변백사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둔장리 해변에서 할미섬까지는 긴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독살이다. 독살은 돌그물이다. 바닷가에 돌담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가두어 썰물 뒤 잡아들이는 함정어법이며 원시어로다. 둔장리 백사장은 거침없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해변. 해변의 솔숲 길은 사철포까지 이어진다. 둔장리 해변에서는 사내들 몇이 그물질을 하는 중이다. 몬치 그물질이다. 몬치는 작은 숭어를 이르는 이 지역 말이다. 여름에는 뻘 냄새가 나서 맛이 없는 숭어지만 겨울이면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것이 참숭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겨울 참숭어를 천하 삼대 진미 중 하나로 꼽기까지 했었다.
동네 사내들은 판매 목적이 아니라 반찬거리를 마련할 요량으로 그물을 끈다. 하지만 수확은 예전 같지 않다. 예전에는 한두 번 그물질에도 한 광주리씩 들던 몬치가 지금은 겨우 몇 마리씩 잡힐 뿐이다. 그물질은 보통 썰물과 들물의 중간 시간대인 중사리에 한다. 허리쯤 빠지는 바다에 나간 사내 둘이 긴 그물의 양쪽 끝을 잡고서 ‘그냥’ 끌고 들어오면 되는 일이다. 겨울 몬치는 회도 회지만 나무불에 구워먹으면 향이 너무 좋다. 수박향이 나는 은어처럼 향기로운 생선이다. 그래서 남모르게 먹을 수 없는 생선이 몬치라 했다. 그물질 하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솔숲 길을 걷는다. 구운 몬치 향내가 풍기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길은 사월포 입구에서 끝이 난다.
자은도(慈恩島)란 지명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던 두사춘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언론의 자은도 소개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다. 두사춘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작전에 실패하자 처형당할 것이 염려돼 자은도로 숨었는데 목숨을 구한 두사춘은 난세에 생명을 보존하게 해준 자비로운 섬의 은혜를 못 잊어 자은도라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이런 유래는 명백히 오류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자은도는 자은도(慈恩島)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 공민왕 22년(1373년) 11월 5일 기사에는 “명에 보낸 사신들의 배가 파선해 주영찬 등이 자은도 앞바다에서 모두 익사했다”는 기사가 있고 <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1436년 7월 25일 기사에도 “자은도 목장은 감목관을 혁파하고 다경포 만호가 겸하게 한다”는 기사가 있다. 두사춘이 자은도에 은신한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은도란 이름의 유래가 두사춘과는 무관한 것은 명확하다. 더 이상 그릇된 정보가 유통되거나 기자들이나 여행작가들도 사실 확인 없이 글을 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고장리 사월포는 파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사월포 앞바다는 임자도 전장포에 버금가는 새우잡이 어장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사월포는 파시로 성황을 이루었다. 부서가 많이 잡혀 부서파시가 서는 4∼6월이면 사월포에서 할미도 사이 바다는 부서를 잡으려는 어선들로 곽 들어찼다. 한참 성어기 땐 인천, 서산, 여수, 마산, 군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어선들이 3천 척이 넘은 적이 있었다. 파시가 쇠락해 갈 무렵까지도 파시촌에는 작부를 둔 술집인 색시집이 10여 곳 넘게 성업을 했고 선구점과 잡화점이 있었다. 파시가 성할 때는 색시집이 수십 곳은 넘었을 것이다. 어선들이 잡아온 부서들은 간독에 저리거나 얼음에 저장해서 내륙의 도시들로 팔려갔다. 동네 여자들도 물동이에 물을 이고 나와 어선들에 팔아 소득을 올렸다. 파시는 사라지고 이제 사월포는 한적한 어촌으로만 남았다.
대파 대파 대파
여객선에서 만난 자은도 친정에 가는 할머니는 가난했던 섬 자은도가 이제는 부자섬이 됐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었다. 옛날에는 논농사가 많은 암태도가 부자였지만 이제는 대파나 양파를 심어 큰 소득을 올리는 자은도가 부자섬이 됐기 때문이다. 모래섬인 자은도는 논이 없어서 예전에는 산비탈까지 개간해 밭을 일구었지만 소득이 변변찮았다. 하지만 그 모래땅 덕분에 이제는 자은도가 오히려 돈섬이 됐다. 대파를 키우는 데는 모래땅이 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은도 중에서도 서부지역이 대파를 많이 키운다. 그래서 자은도 한운리가 친정인 그 할머니는 “자은 섬 재벌가들은 그쪽에게 다 살아. 안좌 암태 사람들도 다 자은으로 돈 벌러 다녀” 그랬었다. 예전에는 논이 많은 동부가 부유했는데 이제는 역전되고 만 것이다.
자은도는 1970년대만 해도 인구가 각각 2만 명이 넘을 정도로 융성했었다. 지금은 십분의 일인 2450명으로 줄었다. 2014년 기준, 면적 53.54㎢ 자은도에서 재배중인 대파밭만 397ha, 무려 120만평이다. 양파밭이 160ha, 마늘밭이 153ha로 그 뒤를 따른다. 대파, 양파, 마늘 세 작물이 밭농사의 거의 전부다. 한때 성행하다 사라졌던 땅콩 재배 면적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31ha가 땅콩 농사를 짓는다. 섬이지만 어선은 불과 56척. 전체 주민 1314가구 중 970가구가 농사를 지으니 자은도는 어촌이 아니라 농촌이다.
자은도는 모래섬이다. 자은도에는 3km 백사장을 가진 백길 해변을 비롯해 무려 9개의 모래해변이 있다. 분계리 해변은 오폐수가 유입되지 않는 청정한 바다이기도 하다. 자은도의 농토는 모래땅이라 해서 버려진 황무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래땅 황무지가 황금땅으로 변신했다. 대파농사가 큰 소득을 가져다주면서부터다. 내륙이나 다른 섬들에서도 대파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겨울에는 자은도와 임자도, 증도를 비롯한 섬들이 대파농사에서 경쟁력이 높다. 이들 섬의 대파밭은 모두 모래땅이기 때문이다. 이들 섬은 어디를 파도 모래밭이다. 그래서 자은도에도 임자도처럼 “처녀가 모래 서말을 먹어야만 시집간다”는 속담이 있다. 모래치에서는 물이 계속 솟아나 농업용수로 쓸 수 있다.
모래땅이 경쟁력 있는 것은 대파가 더 잘 자라서가 아니다. 추위 덕이다. 겨울이 유독 추울 때면 대파 가격은 더 올라간다. 그때는 자은도 등의 대파밭은 호황을 누린다. 흙땅은 얼어서 대파를 뽑아내면 끊어져버려 뽑아낼 수가 없다. 하지만 얼지 않는 모래땅에서는 대파가 쑥쑥 잘도 뽑힌다. 그러니 추운 겨울 대파는 이들 모래섬에서만 출하된다. 당연히 가격은 뛰고 이들 섬의 대파농가들의 소득도 올라간다. 하지만 올해는 겨울이 따뜻해서 자은도 대파 농사도 큰 재미를 못 봤다. 어디서나 출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파밭은 여전히 자은도의 금광이다.
여인송의 슬픔 여인송의 위로
분계리 해변은 무성한 해송숲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들은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분계리 마을의 수호신이다. 이 솔숲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그대로 닮았다. 물구나무를 선 여인이 미끈한 다리와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래서 이 소나무의 이름도 여인송이다. 하지만 이 섹시한 자태의 소나무에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분계 마을에 고기잡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부부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있었고 남편은 홧김에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가버렸다. 남편은 집에 있으면 더 큰 싸움이 벌어질까봐 화를 풀 겸 해서 바다에 나간 것이었다. 옛날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은 무작정 집을 나가 끝없이 걸었다 한다. 화가 풀릴 때까지. 그렇게 걷다보면 화는 자연히 풀렸고 그 때 남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분계리의 남편은 바다로 떠난 것이 화근이었다. 차라리 길을 떠나 무작정 걷기라도 했었으며 좋았으련만 바다는 길처럼 그렇게 평화롭지 않은 곳이다.
여러 날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풍랑을 만나 뒤집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내는 부부싸움을 벌였던 것을 후회하며 날마다 분계 해변 솔등에 올라 남편의 무사귀환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오랜 날들이 지나도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아내는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내가 이 솔등에 올라 물구나무를 서서 바다를 바라보자 남편의 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아내는 솔등의 가장 큰 소나무에 올라 거꾸로 매달려 남편의 배가 귀항하는 것을 보았다. 환영이었다. 그렇게 아내는 점차 큰 슬픔에 미쳐가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내는 소나무에 올라 남편의 환영을 보다 결국 떨어져버렸고 그대로 얼어죽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 남편은 통곡을 하며 아내의 시신을 그 소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그러자 소나무는 거꾸로 선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소나무가 바로 여인송이다.
이 여인송은 부부의 금슬을 좋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다툼에 대한 하나의 경책이리라. 옛날 분계리 마을의 한 여자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나무를 끌어안고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 이후 남편의 바람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이 소문이 퍼져 부부나 연인이 함께 이 소나무를 끌어안으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겼다. 수백 년 살아온 나무 어르신이 전해주는 삶의 위로와 지혜 때문에 생긴 믿음이리라.
섬학교 2016년 6월4(토)∼5(일)일, 제48강 <신안 자은도 1박2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4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8강 여는 모임
-목포 도착
-압해도 송공항 출항
-암태도 도착
-점심식사
-자은도 <해안누리길> 걷기(9km)
한운리해변-해안습지-둔장삼거리-둔장리해변-두모체육공원-사월포입구
-숙소 도착 및 방 배정(<정숙민박> 다인실)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혹은 장어구이 등)
-자유시간 및 취침
<6월5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
-분계 해변 산책(3km)
민박집-여인송-솔숲길-백사장-민박집
-백길 해변 걷기(3km)
주차장-솔숲-견우성 전망대-백사장-주차장
-암태도 출항
-송공항 도착
-점심식사
-장보기(항동시장)
14:30 서울 향발. 제48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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