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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땅콩 회항'에 분노했나?

[복지국가SOCIETY] 땅콩 회항과 자유권, 그리고 보편적 복지국가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개국 공신인 국 씨 집안의 무남독녀이다. 너와 나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음을 명심하여라."

이 말은 최근 방영된 한 사극에서 "소인은 가마꾼이 아니라서 가마 메는 일을 도와드릴 수 없으니, 여기서부터는 아씨께서 직접 걸어가시죠"라고 병판 대감 댁의 노비가 말한 데 대해 양반가의 규수가 근엄하게 꾸짖듯이 내뱉은 말이다. 이 대사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한 사람은 양반가의 규수이고, 다른 사람은 노비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양반가의 안방마님과 재벌가의 자녀들

이 두 사람의 신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졌다. 그냥 운이 좋았거나 나빴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행운의 요소가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규정해 버린다. 한 사람은 온갖 혜택을 누리고 수많은 기회와 행복을 보장받는다. 반면에 노비로 태어난 사람은 온갖 고생을 다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는 원천적으로 거부되고 죽도록 고생만 한다. 이런 신분제 사회는 우리 인류의 긴 역사적 시기 동안 존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정의롭지 못한 사회 질서로부터 우리 인류가 벗어나서 자유권(공민권)을 처음으로 확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누가 보더라도 자유권(공민권)이 확립된 민주국가이다. 신분제 사회가 무너진 지는 100년쯤 지났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출범하면서 우리나라의 헌법은 온 국민의 자유권(공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1987년 민주항쟁의 성과로, 이후 대한민국은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권(공민권)을 향유하는 정치적 민주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최근 대한항공의 조현아 전 부사장이 마치 몇 백 년 전의 신분 사회로 시간여행을 간 것 같은 잘못된 행태를 보임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대한항공의 땅콩 리턴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연일 세간의 화제다. 국가 이름이 붙은 국적 항공사라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고 분노를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 이번 사안이 미국의 <CNN> 등 세계의 주요 언론에 비중 있게 보도되면서 나라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일부 미국 한인단체들은 대한항공 탑승권 불매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번 일은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른 기내 서비스 담당 부사장의 잘못된 언행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대하다. 대다수의 국민이 그렇게 보고 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땅콩 서비스 문제로 사무장과 승무원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기내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까지 함으로써 직원들에게 인격적 모멸감을 주었고, 심지어는 탑승교를 이미 떠난 비행기를 되돌리는 불법까지 저질렀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런 행태는 조선 시대 양반가의 안방마님이 화가 나서 자신의 노비들에게 행하는 것과 모양새가 많이 닮았다.

▲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연합뉴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런 행태는 우리 사회에서 엄청나게 많이 일어난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한 재벌가 2세 또는 3세들의 잘못된 언행들이 더러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지만, 이런 일들은 재벌 등 우리 사회의 힘 있는 곳에서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신분제적 '갑질'에 가까운 이런 사회적 행태는 과거의 양반이라는 신분 대신에 최근에는 경제력(부자)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가진 자들에 의해 너무도 자주 저질러진다. 그래서 마치 새로운 신분제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

이번 땅콩 리턴 사건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사무장을 공항에 내려놓고 가기 위해 비행기를 되돌리자고 요구했을 때, 항공기의 기장은 왜 그런 불법적인 요구에 응했을까? 그것은 명백하게도 규정 위반이다. 그럼에도 항공기의 최고 책임자인 기장은 불법을 감행했다. 아무리 회사의 부사장이라고 해도, 부당하거나 불법적인 요구는 기장이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것은 양반가 안방마님의 부당한 요구를 노비가 거부하기 어려웠던 것과 유사할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국가가 노동의 권리와 안정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 그럴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부실한 곳에서 재벌과 자본가 등 경제적 강자의 신분제 사회에 버금가는 '갑질'이 오늘도 수없이 행해지고 있다. 복지국가의 보호가 없는 곳에서 노동자는 패권적 자본가의 눈치를 보며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권과 함께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

자유권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다.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자유(equal liberties)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통선거권, 공직 등 직업 선택의 자유, 개인 재산을 소지할 자유 등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자유를 온전하게 보장받고 있다. 이런 성격의 자유권은 신분제 사회의 모든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만민을 자유롭게 했다. 그러므로 자유권은 인권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인류 행복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자유권은 불가피하게 사람들 사이의 격차와 불평등을 낳게 되는데, 이런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조현아 전 부사장처럼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재벌가의 자녀들과 노동자나 서민 집안의 자녀들은 애초부터 엄청난 불평등과 격차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마치 "나는 너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노비에게 말하는 양반가 규수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조선 시대의 양반가 자녀와 노비의 자녀에게는 불평등이 신분에 의해 대물림되고 고착화되지만, 자유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시장의 자유(경제적 자유)에 의해 만들어진 불평등과 격차를 국가가 개입해서 교정하는 것이다. 국가가 우리 사회의 모든 직책과 직위들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개방하고, 이것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실질적인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면 된다. 부모가 부자이든 빈자이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한 경제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먼저, 출산, 육아(보육), 교육, 직업훈련, 평생교육, 의료, 요양 등의 사회서비스를 보편적 방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다음으로, 4대 사회보험에서 실질적 보편주의(보편적 가입과 적절한 보장 수준)를 달성하고, 아동수당 등의 사회수당을 보편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일생에 걸친 소득 보장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연합뉴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런 사회를 '복지국가'라고 불러도 좋다. 만약 우리나라가 이런 정의의 원칙이 바로 선 보편적 복지국가였다면, 조현아 전 부사장이 기장에게 아무리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해도 항공기의 최고 책임자인 기장은 결코 회항하는 불법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가가 실질적 자유권과 함께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보장해주지 않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곡된 패권적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재벌과 자본가 등의 경제적 강자 앞에 부당하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양반가 안방마님의 부당한 요구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노비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는 거리가 멀뿐더러, 장차 제대로 발전하기도 어렵다.

보편적 복지국가라야 사회권과 자유권의 실질적 보장 가능

땅콩 회항 파문이 대한항공 측의 거듭된 사과에도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재벌 2·3세들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 같은 행태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재벌가의 구성원들이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하고 종업원을 노비처럼 부리고 있는 데 대해 우리 국민의 정서가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사회의 '자유권'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한 기회의 보장'에 대한 요구도 어느 때보다 높다. 이는 한국의 실질적 민주주의 달성을 위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공정한 기회의 보장'을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이는 매우 큰 기획이며, 기존의 시장만능주의 경제사회 질서로부터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할 때라야 달성할 수 있다. 보편적 복지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제사회적 차이로 인한 기회의 불평등 요소를 상당 부분 제거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불평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능력의 차이'라는 자연적 차이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실질적 의미의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 간의 '공정한 기회 보장'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최소화뿐만 아니라, 자연적 능력(지능, 체력, 외모 등)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의 축소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는 이런 개입적 요소를 '사회권'이라고 불러도 좋다. 만인에게 평등한 자유, 즉 자유권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유권'을 강조하는 데만 머무는 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권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지지는 확고하다. 그래서 이번 땅콩 회항의 경우와 같은 '자유권을 거스르는 듯한' 재벌가의 봉건적인 패권에 대해서는 온 국민이 공분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머물고 만다면, 그래서 사회권에 해당하는 공정한 기회 균등의 보장과 자연적 차이(능력)에 따른 불평등의 최소화와 같은 요구를 제도적으로 담아내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자유권의 실질적 보장'마저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즉, 사회권의 제도화를 의미하는 보편적 복지국가가 건설되지 않는다면,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이번 땅콩 회항이나 직원 구타 등 그동안 재벌가에서 벌어졌던 온갖 봉건적 행태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지나친 능력 지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연적(천부적) 능력도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지능이 매우 높고, 체력도 좋고, 외모도 수려하며, 언변이나 예술적 재능도 좋다. 우리는 이런 장점을 두루 갖춘 사람을 팔방미인이라며 칭송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소유자들은 공부를 잘하고, 그래서 우리 사회의 요직에서 엄청나게 큰 분배 몫을 챙겨간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정규직만을 대상으로 보더라도 하위 10%에 비해 상위 10%가 거의 5배나 많은 임금을 받아간다.

이는 북유럽의 2배에 비해 크게 높은 것인데, 우리 사회의 능력 지상주의가 시장 만능주의와 체계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조합은 결국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자유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권(공정한 기회의 보장, 적극적 자유)의 제도화를 서둘러야 한다. 사회권을 실질적으로 제도화한 '보편적 복지국가'야말로 자유권의 강화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 같은 시장 만능주의와 능력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국가들보다 스웨덴 같은 보편적 복지국가들에서 사회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자유권의 보장이 더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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