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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간첩' 30년 만의 무죄, 법정은 울음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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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간첩' 30년 만의 무죄, 법정은 울음바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조작 '섬마을 간첩' 피해자들 무죄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조작된 사건 중 하나인 '미법도 간첩 사건' 피해자인 고(故) 정 아무개 씨와 그 부인 황 아무개(92) 씨가 30년 만에 재심에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재판장 김기정, 판사 이영환·이훈재)는 간첩의 공범으로 몰려 1984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정 씨와 황 씨에게 24일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 기관의 불법 구금과 가혹 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허위 자백에 바탕을 둔 유죄 선고는 잘못됐다는 판결이다.

지난해 9월, 법원이 '미법도 간첩 사건'에 휘말려 15년간 감옥에 갇혔던 A 씨와 그 가족들에게 25억 원을 배상하라고 한 지 1년 3개월 만에 다시 이 사건 피해자들의 누명을 벗긴 판결이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노구를 이끌고 법정에 선 황 씨와 그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점에 대해 사과하고 위로했다.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전 민변 사무차장)는 "수사 기관의 잘못뿐만 아니라 사법부가 범한 과오까지 청산한 획기적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검찰이 판결 후 7일 이내에 상고하지 않으면 이 판결은 확정된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간첩 사건에 휘말린 작은 섬, 미법도

미법도(인천광역시 강화군)는 강화도 인근의 작은 섬이다. 1965년 집단 납북됐다가 돌아온 적이 있는 미법도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간첩 사건에 휘말렸다. 미법도와 그 주변에서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다섯 차례나 간첩 사건이 터졌다.

무고한 민간인을 간첩으로 만들던 독재 정권 시절 만연했던 전형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었다. 힘없는 납북 어부와 그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간첩으로 엮인 사건 중 하나였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물론 고문 경찰의 대명사인 이근안 등이 경쟁하듯 주민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미법도 사건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박정희·전두환 '섬마을 간첩' 조작, 25억 배상 판결> 참조)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여러 공안 조작 사건을 조사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8년 <한겨레21>에서 미법도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사건을 제보한 간첩인 황○○ 사건에 관한 자료를 들춰보니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65년 같이 납북돼 이북에서 같은 여관, 같은 호실에 머문 사이였다. 황○○을 제보한 안○○, 안○○을 제보한 안△△ 역시 모두 같이 납북됐던 '납북 동기'였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납북 어부들이 차례차례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미법도의 마지막 간첩 정○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납북 어선의 선장 안△△을 처음 간첩으로 만들러 미법도에 들어왔을 때, 이근안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또 안△△의 재판에 나가 증언까지 한 예비군 소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몇 년 뒤 간첩이 된 것이다."

▲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는 숱한 공안 조작 사건의 주역이었다. ⓒ연합뉴스

힘없는 60대 섬마을 노인들을 간첩단 일원으로 만든 국가

고 정 씨와 황 씨 부부도 공안 당국이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터뜨린 간첩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다. 두 사람은 1983년 사건에 휘말렸다. 그해 9월 6일 두 사람은 안기부 인천분실로 끌려갔다. 정 씨가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한 동생에게 포섭돼 간첩 활동을 했고, 황 씨는 이를 도왔다는 혐의였다. 구속 영장 같은 건 없었다. 불법 체포·구금이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무소불위이던 안기부의 '간첩 만들기' 작전에 맞서 힘없는 60대 섬마을 노인들을 보호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해 10월 21일 구속 영장이 청구될 때까지 45일 동안 두 사람은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강요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할 때까지 가혹 행위가 계속된 공포의 시간이었다. 간첩과 접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자, 수사관들은 황 씨를 거듭 폭행했다. 황 씨를 가운데 두고 한 수사관이 황 씨의 뺨을 때려 쓰러뜨리면, 맞은편 수사관이 황 씨의 뺨을 또 때려 다른 수사관 쪽으로 다시 쓰러뜨리는 일도 자행됐다. 정 씨는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으며, 한쪽 구석에서 팔을 벌리고 다리를 들고 서 있는 기합을 받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안기부에서 불러주는 대로 허위 진술을 해야 했다.

그 무렵 또 다른 피해자인 A 씨 가족도 안기부 인천분실에서 험한 일을 겪어야 했다. 온갖 고문을 당한 A 씨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A 씨는 뛰어내릴 곳까지 절뚝거리며 가던 중 다시 붙잡혔다.

불법 체포·감금, 고문과 협박을 통해 조직도를 그린 안기부는 검찰로 사건을 넘겼다. 정 씨와 황 씨는 검찰에서도 고통을 받았다. 이들이 허위 자백에 대해 이야기하자, 검사는 '다시 안기부로 보내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은 안기부에서 강요당한 허위 진술을 반복했다.

허위 자백을 번복하거나 고문 사실을 끝까지 이야기하면 언제든 안기부로 다시 끌려가 가혹 행위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재판 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국선 변호인마저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공포를 더 키우는 발언이었다. 그렇게 이들은 안기부의 그림에 따라 간첩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84년 4월 4일, 인천지방법원은 정 씨(간첩 혐의)에게 징역 5년 및 자격 정지 5년, 황 씨(간첩 방조 혐의)에게 징역 3년 6월 및 자격 정지 3년 6월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항소했다. 검찰도 항소했다. '형이 너무 가벼워서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같은 해 7월 6일 항소심에서 서울고등법원은 황 씨와 검찰의 항소를 기각했다. 서울고등법원은 항소심 과정에서 공소 사실이 '간첩'에서 '간첩 방조'로 바뀐 정 씨에게는 징역 3년 6월 및 자격 정지 3년 6월을 선고했다.

울음바다가 된 법정…"아버님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모진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드러날 시간이 다가왔다. "미법도와 그 인근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간첩 사건에 상당한 조작 의혹이 제기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는 국정원 과거사위 보고서가 나왔다. 재심을 청구한 A 씨는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2년 11월 28일, 90대 노인이 된 황 씨도 자녀(고인이 된 정 씨 대리)와 함께 재심을 청구했다.

그로부터 1년여 만인 이달 24일, 황 씨와 다섯 자녀는 법정에 섰다. 3남 3녀 중 외국에 나가 있는 한 자녀를 제외하고 황 씨 가족이 모두 모였다. 무죄 판결을 듣는 순간 법정은 울음바다가 됐다.

황 씨 자녀 중 한 사람인 B 씨는 26일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판결을 듣는 순간 가족들이 다 울었다"고 말했다. A 씨가 앞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보았기에 이번에도 무죄 판결을 기대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눈물이 쏟아졌다는 말이다.

B 씨는 판결을 들으며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참 많이 났다"고 말했다. "감옥에서 나오신 후 아버님은 진지도 제대로 못 드셨다. (국가 기관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임에도) 아버님은 모든 일을 당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셨다. 동생이 (북한에) 그렇게 가 있는 것에 대해서도 형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셨다. 아버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B 씨의 어머니 황 씨에게도 이번 판결은 특별했다. "법원에 가기 전에도 '(누명을 벗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나라도 살아서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걸 공식 인정받으면,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편안하실 거다'라고 하셨다."

간첩 사건에 휘말린 후 B 씨 가족은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B 씨 가족은 대부분 미법도를 떠나야 했다. B 씨 남매 중 지금도 미법도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공안 당국이 조작한 사건이 거듭 터지면서 미법도 분위기가 흉흉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의 비극 중 하나는 간첩 사건에 휘말린 주민들이 공안 당국의 강요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하면 그 허위 자백이 빌미가 돼 또 다른 주민이 피해자가 되는 일이 거듭됐다는 것이다.

"그 일 이후 마을에서 180도 다른 대우를 받았다.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판결이 난 그날, '내게 발언 기회를 준다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 (그리고) 섬에 있었던 사람들을 앞으로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 상황 때문에 만들어진 일이고 (섬에 같이 있었던) 그들도 피해자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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