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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ㆍ전두환 '섬마을 간첩' 조작, 25억 배상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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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ㆍ전두환 '섬마을 간첩' 조작, 25억 배상 판결

미법도 간첩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 15년 정 씨

법원이 군사정권 시절 일어난 대표적인 조작 사건인 '미법도 간첩 사건' 피해자 정아무개 씨와 그 가족에게 25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이우재 부장판사)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납북 어부 정 씨와 그 가족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고 4일 밝혔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정 씨를 구속하는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고문과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등 증거를 조작했으며, 검찰도 '고문을 당했다'는 정씨의 호소를 묵살하고 법원도 증명력이 부족한 증거를 토대로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재판부는 "석방된 이후에도 (정 씨를) 계속 감시해 본인과 가족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어렵게 했다"며 "국가의 불법 행위로 피해자들이 상당한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불이익을 입었으므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작은 섬 미법도에 불어 닥친 '간첩 바람'…7년간 5건

'미법도 간첩 사건'은 군사 정권 당시 공안 당국이 무고한 민간인을 간첩으로 만든 사례 중 하나다. 미법도(인천광역시 강화군)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이동한 후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 작은 섬이다. 그런데 이 작은 섬과 그 인근에서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6년부터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까지 다섯 차례나 간첩 사건이 터졌다.

발단은 1965년 10월 집단 납북 사건이었다. 북한 경비선이 서해 해상경계선 근처에 있는 은점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정 씨를 비롯한 미법도 주민 등 100여 명을 끌고 간 사건이다. 끌려간 주민들은 그 다음달에 판문점을 통해 무사히 돌아왔다. 경찰은 이들의 행적을 조사한 후 모두 풀어줬다.

납북된 지 11년 후인 1976년, 문제가 터졌다. 납북됐던 사람 중 한 명이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이듬해에는 두 사람이 간첩으로 지목됐다. 전두환 정권으로 바뀐 후에도 공안 바람은 계속됐다. 1981년 또 다른 사람이 간첩으로 몰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법도 납북 어부 간첩 만들기의 마지막 희생양은 정 씨였다. 정 씨는 1982년 안기부에 끌려가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영장도 없이 끌려간 정 씨는 악명 높은 남산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안기부는 정 씨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정 씨는 13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1년 후, 정 씨는 다시 안기부에 끌려갔다. 안기부는 정 씨를 38일 동안 불법 구금하면서 물고문을 비롯한 가혹 행위를 했다. 정 씨의 혐의는 1965년 납북됐을 때 평양에서 친척에게 포섭돼 강화도 일대의 군경 경비 상황, 주민 생활 실태 등을 조사해 보고하는 등의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혐의였기에 정 씨는 버텼다. 훗날 정 씨가 MBC <PD수첩> 등을 통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때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정 씨가 계속 버티자, 안기부는 정 씨의 아내 등 가족도 끌고 왔다. 그러면서 정 씨를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박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정 씨는 허위 자백을 했다. 정 씨의 가족들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 씨가 간첩 행위를 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수사관들은 혐의 내용과 관련해 정 씨가 잘 모르는 사항에 대해, 정 씨를 교육하며 조서를 썼다. 그 후 정 씨는 검사와 판사에게 '고문을 당해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을 한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84년 대법원은 정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고문 끝에 허위 자백…억울한 옥살이 15년

전두환 정권 때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시작한 정 씨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 씨는 199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옥살이를 한 지 15년 만이었다.

감옥에서는 나왔지만 '간첩'이라는 멍에까지 벗은 건 아니었다. 정 씨는 수사기관의 보안관찰 대상이었다. 직장 소재지와 연락처, 주요 활동 사항 등을 주기적으로 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정 씨는 두 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간첩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 걱정해서다. '간첩' 낙인 때문에 딸이 파혼당할 위기에 놓인 적도 있으며, 남편을 간첩이라고 내보낸 뉴스를 본 정 씨의 아내는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에 자녀들과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미법도와 그 인근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간첩 사건에 상당한 조작 의혹이 제기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 발전위원회')는 보고서가 발간되고, 정 씨 사건이 조작됐으므로 진실 규명을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정 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2010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정 씨가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위법·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해 긴 세월 동안 교도소에서 심대한 고통을 입은 정 씨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정 씨의 가슴 아픈 과거사의 소중한 교훈을 바탕으로 사법부가 국민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정 씨는 법정에서 "만세" 삼창을 했다.

그리고 2012년, 서울중앙지법에서 25억 원 배상 판결이 났다. 1983년 안기부에 두 번째로 끌려가, 고문 끝에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한 지 29년 만이다.

"곶감 빼먹듯 차례차례 간첩으로 만들어진 가난한 어부들"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8년 <한겨레21>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 교수는 간첩 문제 전문가이자,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 발전위원회'에서 3년간 이 사건을 비롯한 각종 공안 조작 사건 조사를 담당했다.

"'미법도'라는 인구 100여 명의 작은 섬이 있다. (…) 처음 내가 납북 어부 정○ 사건을 조사하려 하자 몇몇 지인들은 이 사건이 억울한 점이 많은 것 같다면서도 '간첩이 제보한 간첩 사건'이라는 이유로 걱정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보한 간첩인 황○○ 사건에 관한 자료를 들춰보니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65년 같이 납북돼 이북에서 같은 여관, 같은 호실에 머문 사이였다. 황○○을 제보한 안○○, 안○○을 제보한 안△△ 역시 모두 같이 납북됐던 '납북 동기'였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납북 어부들이 차례차례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미법도의 마지막 간첩 정○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납북 어선의 선장 안△△을 처음 간첩으로 만들러 미법도에 들어왔을 때, 이근안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또 안△△의 재판에 나가 증언까지 한 예비군 소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몇 년 뒤 간첩이 된 것이다."

정 씨 사건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국가적으로 양산한 간첩 사건의 전형이다.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는 정부의 필요에 따라 멀쩡한 사람이 간첩으로 내몰리는 일이 허다했다. 영장 제시 없이 불법 체포해 장기간 가둬놓고 고문해 간첩을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정 씨처럼 납북됐던 어부들도 공안 당국의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1971~1986년에 납북 어부 간첩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한 장기수는 14명이나 된다(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자료). 미법도 어부들뿐만 아니라 개야도(전북 군산)와 위도(전북 부안)의 어부들도 '납북 어부 간첩 사건'에 연루됐다.

이렇게 '조작된 간첩'들은 정 씨처럼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조작 사건의 피해자'로 밝혀졌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당사자와 그 가족이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은 이명박 정부 들어 여러모로 후퇴했다. 대선을 앞둔 요즘에는 새누리당 쪽에서 "미래를 봐야지 자꾸 과거사를 가지고 논란을 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불평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치유되지 않은 아픔은 여전히 많다. '씻을 수 없는 아픔에 눈감으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려는 가벼이 넘길 사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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