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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8세 아이의 죽음…"우리 모두 살해 방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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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8세 아이의 죽음…"우리 모두 살해 방조자"

[복지국가SOCIETY] 또 다른 '이서현'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내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농담처럼 '너희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의사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전생이나 인연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분이지만 환자를 대하다 보면 하도 답답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앞으로 평생 환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힘든 삶을 억울해 하지 말고 겸손하게 환자들을 잘 대하라는 뜻일 것이다. 범죄자 만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검사나 판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의사들도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실제로 매일 대하는 사람들이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이기에,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힘든 직업에 대한 소명을 찾으려 노력하라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의사라는 직업의 또 다른 나쁜 것 중의 하나는 환자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명만 들어도 환자들이 겪게 될 고통이 눈에 선하고, 엑스레이 사진 한 장만 보아도 대강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경우가 많다.

8세 아이가 받았을 아동 학대의 끔찍한 고통

울산에서 계모의 아동 학대로 타살된 8세 이서현 양의 보도를 접하면서 의사인 내가 받는 느낌은 일반인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부검 결과 16개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다는 보도를 듣는 순간 가슴이 꽉 막혀왔다. 아직 성장 단계에 있는 아이들은 뼈가 약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연골 성분이 많고 유연성과 탄력이 높아서 잘 부러지지는 않는다. 그러한 아이 가슴의 갈비뼈들이 한두 개도 아니고 대부분이 부러질 때까지, 그 아이가 받았을 고통이 느껴져 며칠 동안 계속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었다.

최근에는 이서현 양의 좌측대퇴골이 골절된 방사선 사진과 화상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이 두 건 모두 상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질렀다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 언론 보도이지만, 보험 사기 여부를 떠나 아이에게 얼마나 학대를 가했기에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가해자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맞았기에 엉덩이 근육이 괴사할 정도가 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이가 그렇게 점점 수척해지고 말라간다면 친척들은 그동안 왜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는지, 이서현 양이 심하게 맞으면서 울며 소리를 지를 때 이웃에 사는 분들은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는지, 아이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온몸에 멍이 들어 학교에 오는 것을 매일 보는 교사는 왜 적극적으로 학부모와 면담을 하거나 학대 아동 보호 기관에 알리지 않았는지, 무척이나 답답해진다.

우리 사회의 어린이 안전 시스템은 왜 작동하지 않는가

이서현 양이 치료받으러 간 병원의 의사나 직원들은 이것이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진료 현장에서 발견한 아동 학대는 환자 비밀 보호의 원칙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신고하기를 자체 결의하고 보도 자료까지 뿌린 의사들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도 궁금해진다. 이서현 양이 죽음을 넘나들면서 학대를 당하는데도 주위에서 침묵만 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모두 아동 살해의 방조자라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학대받는 아동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이 없는지도 의아스럽다. 각각의 단계에서 필요한 조치를 하였는데도 이서현 양을 구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신고받은 경찰이나 사회복지기관의 담당 공무원이 적법한 조치를 수행하지 않았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단순히 직무 유기나 공무 태만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안전을 지키는 시스템이 붕괴했다면 이를 시급하게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이서현 양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문제를 집중적으로 진단해야 한다.

우리가 이서현 양의 죽음을 계기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아동 학대 보호 기관'을 늘리고, 담당 공무원에게 준사법권을 부여하는 일이다. 먼저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응급조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지금까지의 법원 판결은 친부모이면 자녀를 지속적으로 구타해도 아동을 강제로 분리하거나 보호하는 판결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판사는 여러 다른 경우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판단을 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지금이라도 조사받던 엄마가 풀려나면 다시 아동을 학대하고, 구속된 아버지가 풀려나면 또다시 자녀를 성폭행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한데도 법이 보호하지 못한다면, 행정적으로라도 아동을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경험을 참고해 아동 보호 대책 서둘러야

일본에서는 아동 학대 신고를 접수하면 일단 아동을 위험 지역에서 분리해 보호하면서, 명백하게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에는 부모에게 돌려보내지 않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는 담당 사회복지 공무원이 준사법권을 행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접근 제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법원에서 권고한 거리 이내로 접근하면 바로 경찰이 가해자를 구속 격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건에 대해 사법적으로 규명되기 전이라도 피해자에 대한 보호를 선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국민의 정부' 시기에 집권당 정책위원회의 보건복지 전문위원을 하면서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 설립된 '아동 성폭력 방지 특별위원회'에 참여하여 관계 기관과 함께 대책을 수립한 적이 있다. 당시 제안된 정책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실효성이 없게 되자, 나는 참여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에 들어가 '대통령 직속 어린이 안전 점검단'을 만들었다.

교통안전, 아동 보호와 관련된 전문가들과 씨랜드 화재 사건으로 숨진 아동의 아버지 같은 피해자들을 직접 위원으로 참여시켰다. 전문가들이 공무원과 협의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정책이 결정되면 해당 부처가 그 일을 잘 수행하는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기구였다. 가동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150개가 넘는 정책이 수립되었으며, 분기별로 추진 사항을 점검하고 매년 한 차례 대통령 보고를 통해 이를 대통령이 직접 점검하도록 했다.

당시 아동 성폭력 피해자들을 정신 치료했던 신의진 연세대 정신과 교수와 이재연 숙명여대 아동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고, 경찰에서는 이금형 여성청소년 과장이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많은 업적도 남겼다. 그중 한 분은 현재 새누리당의 보건복지상임위 국회의원이 되셨고, 다른 분은 여성 최초의 치안정감으로 부산지방경찰청장이 되셨으며, 또 다른 분은 지금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이 되셨다.

이제 이분들이 그러한 일을 잘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았기에 근본적인 대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이서현 양의 이름이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지기 전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정부 여당과 국회는 빨리 나서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이웃에서 아이들이 그러한 고통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이웃의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을 신고하는 시민 정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도 곳곳에서 이런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시민 정신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대책을 세워야 할 일이다.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군인들만이 아니다. 항공 식별 구역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데 쓰는 시간의 10분의 1만이라도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길 요청한다. 이런 것이 바로 '복지국가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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