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비구비 흑산도 고갯길은 인생길처럼 굴곡 많고 가파르다. Ⓒ섬학교 |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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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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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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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학교 제14강은 2013년 4월 6(토)∼7(일)일, 1박2일로 서남해의 절경 흑산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답사지인 흑산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흑산항 밤거리
흑산(黑山)은 홍어의 고장입니다. 홍어의 고장답게 흑산도는 여객선터미널 입구부터 잘 삭은 홍어와 막걸리 냄새로 여수(旅愁)에 지친 나그네들의 후각을 자극합니다. 흑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여객터미널이 있는 예리마을입니다. 대부분의 상업시설이 이 마을에 몰려있지요. 거의 모든 식당이 홍어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흑산의 새로운 특산물인 전복 또한 함께 취급합니다. 길가에는 홍어횟집뿐만 아니라 각종 수산물 판매점과 건어물 노점 등 관광 어촌의 면목이 여실합니다.
저녁이 되자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떠났던 유람객들이 서둘러 포구로 돌아옵니다. 비가 오시려는가. 빗방울 한두 방울 툭툭 떨어집니다. 흑산항 밤거리를 걷습니다. 마을 노인들도 바닷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거립니다. "외국인"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길 가던 마을소녀군요. 소녀는 "아닌가?" 중얼거리며 황급히 뛰어갑니다. 무안했던 모양이지요. 시커멓게 탄 피부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나그네는 섬에 오면 자주 외국사람 대접을 받습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횟집에서 삭힌 홍어나 전복회를 먹습니다. 흑산 앞바다에서 대량 양식하는 전복은 흑산의 새로운 특산물입니다. 과거에는 주낙으로 홍어를 잡았지만 요즈음 흑산의 홍어잡이는 '걸 낚시'라 합니다. 이 또한 주낙의 일종이지만 미끼를 끼우지 않는 공갈낚시라는 점이 차이지요. 수많은 낚시바늘이 촘촘히 매달린 주낙줄을 홍어가 다니는 길목에 길게 깔아놓고 거기에 걸리는 홍어들을 잡아 올립니다. 일종의 덫입니다.
▲ 저 건너 섬의 정상은 람사르협약에 가입된 장도 습지다. Ⓒ섬학교 |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 안 먹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손암(巽庵) 정약전 선생 관련 자료를 전시한 자산문화관을 둘러보고 나서면 흑산면 보건지소 앞에서 길은 두 갈래입니다. 왼쪽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영산도가 보이는 해안 길. 축항리에서부터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관광객들이 많은 섬이지만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는 드문 편입니다. 거리가 멀어 관광객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오기 어려운 까닭이지요.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 흑산의 고갯길은 구비구비 첩첩산길입니다. 창촌마을의 폐가를 기웃거리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옛날에는 집들이 살았는데 다들 나가빌고 쪼금만 살고 있소."
마을은 멸치잡이에 생업을 의존합니다. 마른 멸치와 멸치액젓. 멸치는 주로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잡습니다. 봄 어장은 짧지요. 5월 한 달뿐. 여름에는 자연산 미역을 채취해서 말립니다. 멸치철이면 선주들은 육지의 직업소개소에서 선원들을 구해다 어장을 운영합니다.
"옛날에는 일 년 내내 멸치잡이 했는데 이제는 잘 안 잡혀요. 수온이 높아져서 그런지. 해파리 새끼가 많이 들어가서 힘들어."
흑산의 홍어가 유명하지만 예리항을 제외한 흑산도 대부분의 마을은 홍어잡이와 무관합니다.
"배가 30톤 이상은 돼야 홍에 잡이를 할 수 있어. 돈이 몇 억 들어요."
가까운 바다에 홍어가 사라지니 홍어배들은 먼 바다로 나가 조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큰 배가 필요해진 홍어잡이는 자본이 많은 일부 선주들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도 노인은 홍어 이야기가 나오자 흥이 오릅니다. 옛날 흑산도 앞바다에서 목선으로 잡을 때는 홍어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컸었다 합니다.
"홍어는 잡으면 배에서 바로 숙성을 시켰어요. 육지로 나가면 구더기가 날 정도로 썩었었지."
뭍의 사람들은 홍어 하면 그 톡 쏘는 삭힌 맛을 떠올리지만 실상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습니다. 홍차처럼 삭힌 홍어는 먼 바다 뱃길이 만들어낸 문화지요. 흑산 홍어배의 종점이었던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본고장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삭혀서는 잘 안 먹어요. 바로 싱싱한 놈, 그렇게 먹어야 더 맛있고."
태생이 섬사람인 나그네 또한 삭힌 것보다는 싱싱한 홍어가 더 좋습니다. 홍어 애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에서 삭힌 홍어 애탕을 먹어본 사람들은 실망이 큽니다. 하지만 생 홍어의 간과 내장으로 끓인 홍어 애탕은 고소하고 달디 답니다. 흑산도 사람들에게는 홍어가 음식인 동시에 약이기도 했다는군요. 식약동원(食藥同源).
"옛 어른들은 홍어가 소화제라 했어요. 껍데기에 낀 미끌미끌한 꼽을 삭힌 뒤 먹으면 소화도 잘 되고 가래도 잘 삭는다 했지."
팔순의 할머니 한 분은 지팡이에 의지해 마실을 나오셨습니다.
"아이스크림 사묵을라고 기다렸는데 안 오네."
노인은 농협 차량을 기다리십니다. 농협 하나로마트의 식품 차량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들을 순회하며 이동 판매를 합니다. 이동이 수월치 않은 노인들을 위해서지요. 200여 명이 살던 마을에 지금은 18명의 노인들만 삽니다. 마을에는 구멍가게도 하나 없으니 노인은 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리십니다.
▲ <자산어보>의 산실 모래미마을은 해안 또한 절경이다. Ⓒ섬학교 |
<자산어보>의 산실 모래미마을
사리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거북제를 지내던 신성한 바위'라는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거북은 바다 쪽을 보고 있습니다. 신석(神石). 오랜 옛날 만삭의 바다거북이 표류중인 어부를 등에 업고 이 마을로 와서 목숨을 살렸다 합니다. 거북은 세 마리의 새끼를 순산했으나 산후통으로 목숨을 거두었다지요. 그 후 주민들은 거북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습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거북제를 지냈다는군요. 신이 된 거북은 마을의 안녕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 왔습니다. 이 돌거북은 대주가입니다. 막걸리를 6말 5되 5홉을 마셔야 취기를 느끼며 가볍게 움직인다는군요. 그때부터 거북이 영험을 나타낸다고 주민들은 믿어왔습니다.
고갯마루에서 모래미마을(사리)로 넘어가는 길가는 상록 활엽수인 잣밤나무 군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다도해의 섬들에서도 이제는 상록 활엽수 군락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 상록수 군락은 무엇보다 소중한 섬의 자산입니다. 사리는 손암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저술했던 마을이지요.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면서 손암은 그의 아우 다산 정약용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다산은 강진으로 가고 손암은 우이도를 거처 흑산도까지 왔습니다. 1816년 손암은 흑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16년 형극의 세월 동안 손암은 흑산도와 흑산진의 위수지역인 우이도만을 오갔을 뿐 끝내 뭍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세월 손암은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고, 흑산 바다의 어류연구에 매진해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손암이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 복성재입니다. 새로 복원된 복성재 마루에 앉으니 사리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당시에도 이 섬에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흑산도는 태어나 태를 묻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어떤 이에게는 감옥이기도 합니다. 유형이 아니었더라면 존재조차도 몰랐을 세계에서 손암은 살다 갔습니다. 그가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 세계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은 결코 손암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가 몸을 의탁했던 흑산 섬사람들과 함께 이룬 업적이지요.
사리마을 입구에는 '손암 정약전 선생께서 통한의 세월을 꿈으로 승화시켰던 마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읽힙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보다 뭍에서 온 유배객만을 추앙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손암 또한 <자산어보>에서 이 마을 '창대'라는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술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자산어보>는 손암 개인의 연구가 아니라 장창대(덕순)와 손암의 공동 연구 성과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마을은 또한 손암의 유배지로만 기억될 것이 아니라 창대의 마을로도 기억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 다음에야 비로소 타인의 존중을 받는다 했습니다. 흑산 사람들에게 창대는 어제의 나입니다.
▲ 흑산도의 새로운 소득원인 전복 양식장 Ⓒ섬학교 |
흑산보다 더 깊은 지프미마을
산으로 둘러싸여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심리(深里, 지프미)마을 당산나무 아래 동네 노인들이 둘러 앉아 술을 자십니다. 마을은 언덕에 있고 당산나무는 주민들의 쉼터입니다. 아끼는 후배의 고향마을이라 더욱 정겹습니다. 그도 어릴 적 저 당산나무 그늘에서 많이 놀았을 것입니다.
"여가 무지 시원한 곳인데, 웬만하면 바람이 있는데 오늘은 바람이 없네."
노인은 나그네를 불러 소주 한 잔을 권합니다. 갈증이 심해 술보다는 마실 물이 급하지만 물은 없습니다. 종이컵 가득 따라 주는 소주를 마시니 술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노인들은 평상에 둘러 앉아 찐 생선을 드십니다. 상어와 우럭, 삼치 등의 물고기와 떡과 술. 잔치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어느 집에 제사가 있으면 당산나무 아래로 음식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과 나눈다 합니다. 공동체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할머니 한 분이 상어고기 한 토막을 건네주십니다.
"상여 괴기도 있고 제사를 크게 지냈구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제사 음식 안 묵는다믄서."
"영감들은 꼬리만 주는구만. 간데 토막을 줘야지."
마을 앞바다에서는 휴가차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배를 몰며 그물을 끌고 있습니다. 횟감이라도 잡을 요량이지만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모양입니다. 노인들은 뭍에 앉아서도 바닷속 사정이 훤합니다.
"옛날에는 요 앞바다에서도 조기랑 갈치도 많이 낚으고 그랬제. 요새는 없어요. 서대, 장대나 멫 마리 걸리면 다행이제. 미역 양식 한다고 바다 길을 막아 놓으니까 괴기가 못 들어 와요. 그라제, 사람이나 괴기나 길을 막으면 못 다니제."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마을은 고기잡이보다는 해조류 양식에 기대고 산지 오래인 것을요.
▲ '피리 부는 소년'의 구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진리당 Ⓒ섬학교 |
피리 부는 소년
옛날 어느 해 옹기장수의 배가 흑산도에 입항했다 합니다. 옹기 배에는 네 사람의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지요.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했습니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피리소리에 홀린 듯 넋을 잃었습니다. 진리 처녀당에 거처하는 처녀 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해 돛을 올리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거세지고 역풍이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었습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했습니다. 선원들은 이유를 알기 위해 마을의 무녀를 찾았습니다. 무녀는 진리 처녀당의 당신이 소년의 피리에 홀려서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선원들은 소년을 섬에 남겨두고 가기로 작당했습니다.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이 배에서 내리자 선원들은 급히 배를 돌려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슬픔과 외로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었습니다. 그러다 소년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묻히고 처녀 당신 옆에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저 진리당입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당 근처 길로는 다니지도 못했다 합니다. 그만큼 당신을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섣달 그믐날 밤에 돼지를 잡고 떡을 해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영검했어." 길 가던 할머니 한 분이 진리당의 영험을 증언합니다. 지금은 건물을 새로 지어 반듯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새로 짓고 나서는 영검이 없어요." 당제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 수천 척의 배가 몰려와 흥청이던 흑산도 조기파시 Ⓒ신안군 |
고대 해양도시와 옥섬
우리가 기억하는 흑산도의 이미지는 홍어, 파시,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섬 정도입니다. 하지만 흑산도는 동아시아의 해상교류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섬입니다. 흑산도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동아시아 횡단 항로의 중간 기착지이자 해상교역의 중간 거점이었습니다. 읍동에는 사신이나 항해자들의 숙소와 편의시설로 활용되던 관사 터가 남아 있습니다. 상선의 선원이나 사신 등 항해자들이 제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던 제단이나 절터도 있습니다. 상라봉에는 산성의 흔적과 제단의 흔적이 있고 그 아래는 무심사선원 터가 있습니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에서는 1999년부터 1년 동안 진리 읍동 마을과 상라산성 일대의 조사를 통해 관사 터와 절 터, 철마와 주름무늬병, '무심사선원'이라 새겨진 기와편 등 다수의 유물,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거문도에서 한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된 것처럼 고대, 중세 동아시아의 해상교류사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들의 현장입니다. 발굴 조사로 고대부터 흑산도 읍동 마을에 해양도시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왔습니다. 해양왕국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이 명나라를 추종하면서 해양국가를 포기하고 해금정책을 썼던 까닭입니다. 조선의 폐쇄성은 해양정책의 폐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지요.
무심사선원 터를 지나 해안길을 따라 걷습니다. 읍동 앞 바다에는 작은 무인도 하나가 있습니다. 옥섬(獄島). 과거 흑산도 관아에서 죄수들을 수용하던 감옥 섬. 마피아 대부 알카포네를 가두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섬과 유사한 천연감옥 옥섬입니다. 절벽이 둘러싼 옥섬은 쉽게 탈출할 수 없는 구조지요. 섬에는 별다른 건물도 없이 죄수들이 비바람을 피해 지낼 수 있는 동굴만 하나 덜렁 있었다 합니다. 죄수들은 짐승처럼 섬에 가두어졌던 것이지요. 몇 달씩 식량 공급을 하지 않아도 죄수들은 낚시를 하거나 해초를 뜯어 먹고 생존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아무 흔적 없는 무인도에 불과하지만 저 섬 또한 잊혀져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 유적입니다.
하루를 꼬박 걸어서 흑산 섬을 일주했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수십 번은 족히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단 기간에 이토록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험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이 섬은 마치 생의 압축판 같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은 끝에 결국 도착한 곳은 처음 그 자리, 예리 마을입니다. 그곳은 또한 섬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높은 곳에 있다가 아무리 낮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처음 그곳이 아닌가요. 사람은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흑산, 참으로 위로가 많은 섬입니다.
▲ '호쟁이'라 부르는 흑산도 앞바다의 무인도 Ⓒ섬학교 |
섬학교 2013년 4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6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4강 여는 모임
11:00 목포 도착
11:20-12:20 점심식사(목포 최고의 남도식 한식백반)
13:00 목포항 출항
14:50 흑산도 도착(예리항 <황금모텔> 숙소 배정, 다인실)
15:20-18:00 흑산도 버스 일주
숙소 출발→진리당→읍동 옥섬→무심사지→상라리 열두굽이고개→흑산도아가씨 노래비, 상라산성→마리→비리(지도바위)→심리→사리 사촌서당(복성재, 정약전 선생 유배지)→천촌(최익현 선생 유허비)→청촌→예리항
18:30-20:30 저녁식사 겸 뒤풀이(흑산도 뒷골목 토속음식점에서 자연산 생선회와 흑산 홍어 및 매운탕, 흑산도 할머니가 담근 막걸리로...맛있는 시간)
20:30 자유시간 및 취침
<4월 7일 일요일>
06:00 기상
07:00 아침식사(속풀이 매운탕백반)
08:00-10:00 흑산도 걷기(4km)
예리항→동골→목장→흑산도 기상대→새나리 해변→고래판장→천사방파제→예리항
10:10-10:30 자산문화관 탐방
11:00 흑산항 출항
12:50 목포 도착
13:00 점심식사("봄 서대, 장대 앉았던 자리는 뻘도 맛있다"는, 귀하고 큰 서대로 끓인 서대탕요리)
14:00 서울 향발, 제14강 마무리 모임
▲ 섬학교 제14강 흑산도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14강 답사 참가비는 26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 깊고 검푸른 흑산 바다. 손암은 이 바다가 무섭다고 기록했다. Ⓒ섬학교 |
☞참가신청 바로가기
[학습자료]
[흑산도]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본섬이다. 면적 19.7㎢, 해안선 길이 41.8㎞. 목포 남서쪽으로 97.2km. 홍도·다물도·대둔도·영산도 등이 흑산면의 부속 섬이다.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서 흑산이라 했다. 828년(신라 흥덕왕 3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난 뒤 서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이 섬에 반월성을 쌓았다. 본래는 월산군에 속하였으나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흑산진이 설치되면서 나주목에 속했고, 1914년에는 무안군에, 1969년부터는 신안군 소속이다. 최고점은 문암산(400m)이며, 깃대봉(378m) 선유봉(300m) 상라봉(227m) 등이 있다. 1월 평균기온 0.8℃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844㎜ 정도.
[상라산성 터] 상라산 북쪽 해변 능선에 있다. 상라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1999년 학술조사시 확인된 천제를 지내던 제사 유적이 있다.
[진리당] 진리마을 당숲에 있는 이곳이 진리 처녀당(일명 진리당)이다. 흑산면 22개 성황당 중 본당으로서 상당과 용신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제는 음력 정초부터 3일간 상당에서 제관들에 의해 주관되었고 하당 갯제에서는 무당의 용왕굿이 지내졌으나 현재는 당제가 열리지 않는다. 진리당에 얽힌 전설은 1978년 7월 26일 KBS TV <전설의 고향>에 '흑산도처녀당과 피리 부는 소년'으로 방영되기도 했었다. 본당 근처에는 영혼을 부른다는 300년 된 초령목이 있었으나 지금은 고사되고 어린 나무들만 몇 그루 남아 있다.
[무심사선원지(无心寺禪院址)] 흑산면 진리 2구 읍동(고을기미) 뒤편 상라산성 아래 탑산골 입구에 있다. 석탑과 석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탑과 석등을 속칭 숫탑, 암탑, 탑영감, 안탑님 등으로 부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했었다. 최근 지표조사에서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이라 새겨진 명문 수키와편이 나와 절의 이름이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인 것이 밝혀졌다. 선종계통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승려들은 당나라를 오갈 때 무심사선원에서 예불을 올리면서 무사 행해를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이 사찰이 장보고의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사촌서당] 사리마을에 있는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 손암은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형을 선고받고 우이도와 흑산도에서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생활했다. 사촌서당은 손암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손암은 사리마을에서 이 고장 출신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순조 14년(1814)에 227종의 어류, 해산물 등을 연구 기록한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면암 최익현 유허비] 천촌 일명 '여티미'라는 마을 입구에는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바위가 있다. 면암 최익현이 흑산도에 유배와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친필로 써서 손바닥바위(일명 지장암)에 새긴 것이다. 면암 선생은 1876년 1월 고종 13년 일본과의 통상에 반대하는 도끼상소를 올리다 흑산도로 유배됐다.
[흑산팔경]
제1경 칠락묘운(七落妙雲) : 칠락봉 위에 감도는 형형색색의 접시모양 구름
제2경 문암창공(門巖蒼松) : 문암산의 하늘을 뒤덮는 소나무 밀림
제3경 송전망월(松前望月) : 정월대보름 달 걸릴 때 방풍림 앞에서 바라보는 달
제4경 영산조휘(永山朝煇) : 읍동 앞 안밖 영산에 찬연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
제5경 명사십리(明沙十里) : 진리마을 앞에 하얗게 펼쳐진 넓은 백사장
제6경 원포귀범(遠浦歸帆) :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 오색 깃발의 돛단 상고배
제7경 강풍어화(江楓漁火) : 여름날 저녁, 고요한 수면 위를 오가는 멸치잡이배들의 불빛
제8경 서산낙조(西山落照) : 모지미재에서 바라보는 홍도 옆 수평선 너머로 잠기는 저녁노을
[장도 습지] 흑산도에서 동쪽으로 2km 거리의 섬. 섬이 길다 하여 장도(長島)라 했다 한다. 섬의 정상 부근 267m 부근 분지에 5만 평 정도의 습지가 있다. 우포늪, 용늪에 이어 국내에서는 세 번째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습지다. 이곳 습지는 고층·중층·저층 습원에서 다양한 동·식물 서식 환경을 담고 있어 가치가 더욱 크다. 약 400여 종의 식물과 30여 종의 나비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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