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수림과 갯돌밭과 코발트빛 바다가 아름다운 소안도 미라리 해변ⓒ섬학교 |
비밀의 섬, 소안도는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항일의 땅'이기도 합니다. '남해의 모스크바'라고도 불렸지요. 일제시대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메카였지만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그 사실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백 명 이상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형무소에 끌려간 주민이 있으면 그들을 생각하며 섬에 남은 주민들은 한겨울 추위에도 이불을 덮고 자지 않을 정도로 의리가 깊었다 합니다. 그래서 삼일절에 출발하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의 소안도행은 특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이번 소안도 여행길에는 횟감 중 최고로 치는 소안도 어부가 직접 잡은 자연산 감성돔회의 그 고운 빛깔과 맛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 제13강은 2013년 3월 1(금, 삼일절)∼2(토), 1박2일로 아름다운 소안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3년 3월 답사지인 소안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섬은 육지를 열망한다
떠난다 떠나 간다 나는 가노라
세월의 꽃동무를 남겨 두고서
쌍죽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때분을 못이겨서 나는 가노라
만남도 뜻 있으니 믿음도 큰데
마음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이별로 애를 끊는 이 웬일인가
눈물이 앞을 가려 말 못하겠네
(이시완 작사 작곡 <이별가> 중에서)
소안도를 떠나며 독립운동가 이시완 선생이 불렀다는 노래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때분을 못이겨' 식민지 조국을 등지고 떠났던 이가 어디 이시완 선생뿐이었겠습니까. 1923년 조선노농대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이시완 선생은 신간회 간사였던 송내호 선생 등이 세운 소안학교 교사로 일하다 '마음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다시 소안도를 떠나야 했을 때 그 슬픈 정을 <이별가>로 대신했었지요. 이시완 선생처럼 식민지 조선의 많은 청년들이 조국해방을 그리며 만주로 상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끝내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요.
나그네는 오늘 완도 화흥포항에서 '항일의 섬' 소안도행 여객선에 오릅니다. 과거 소안도는 인근의 노화도, 보길도 등과 한 생활권이었습니다. 완도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소안도는 자연히 완도 생활권으로 편입됐습니다. 고립된 섬이 육지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낭만적 흥취를 자아내지만 섬사람들은 늘 육지를 지향합니다. 섬의 육지에 대한 열망은 가히 절대적이지요. 과거 섬사람들은 고립으로 인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지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사람들은 스스로 남3면(완도 남부에 있는 세 개의 면)이라 부르며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교통이 좋아진 지금은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사라졌지요. 하지만 나그네의 고향 보길도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소안도는 여전히 나그네에게 노스탤지어를 주는 추억의 섬입니다.
▲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어부림 미라리 상록수림. 천연기념물 339호ⓒ섬학교 |
목선과 늙은 어부
소안항에 내리면 섬의 역사를 알리는 비석 하나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항일 성지 소안도.' 비석에서는 어떤 긍지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소안항에서 2킬로 남짓 떨어진 면소재지 비자리까지 걸어갑니다. 비자리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비석 세 기가 서 있습니다. 하나는 영세불망비, 두 기는 제주 목사의 것입니다. 제주 목사는 부임길에 소안도에 들러 대체 어떤 치적을 남겼던 것일까요.
비자리 선창머리에는 늙은 어부 한 사람이 낡은 목선을 수리 중입니다. 어부는 부서진 배 후미에 각목을 대고 못질을 합니다.
"통발을 막을라고, 배가 없으께 우선 이놈을 고치요. 보길도에다 쌔내기 한 대를 사 놨는데 아직 못 갖고 왔소."
기관이 배 바깥에 달린 선외기를 여기서는 보통 '쌔내기'라 부릅니다. 일반 기관 배는 경유를 쓰지만 모터가 달린 선외기는 휘발유로 가는 고속선입니다. 노인은 낙지 통발 어업을 합니다. 어부들은 비자리 앞바다 갯벌에 줄지어 서 있는 '마장'에 통발을 매달아 낙지를 잡습니다. 낙지 통발에는 장어도 들고, 게도 들고, 볼락 같은 작은 물고기도 듭니다. 노인은 못질한 각목을 배 후미에 맞춰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습니다. 노를 저어서 가는 배, 섬 사람들이 '노전배'라고 부르는 작은 목선을 아직껏 부리는 어부는 드뭅니다. 목선과 어부는 바다에서 함께 늙어버렸습니다. 펄쩍, 망치질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목선 바로 앞에서 숭어가 뜁니다.
"내다 버릴 것인디, 우선 바닥에 나가서 일할 배가 없어논게. 낼부터 낙지 통발 들어 가께. 이라고 고쳐 쓰요. 이 배만 한 이 십년 썼소."
비자리 어민들은 주로 마을 앞 바다에서 통발 어업에 종사합니다. 수협의 입찰이 시작되면 도시의 중간상들이 들어와 낙지를 사갑니다. 어부의 손을 떠나면 낙지의 몸값이 열 배 스무 배씩 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낙지는 어부가 잡지만 이익을 챙기는 것은 중간상이나 횟집 주인들입니다. 통발을 매는 마장은 해마다 제비뽑기를 통해 새로 분배됩니다. 낙지가 잘 드는 곳이 있고 덜 드는 곳이 있기 때문이지요.
"좋은 디가 있고 나쁜 디가 있고, 잘 난 디가 있고 안 난 디가 있지라우. 그래 제비뽑기를 안 하요. 그래야 무법천지가 안 되지라우."
노인은 낙지 통발이 끝나면 바다에서는 별달리 해먹을 것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양식으로 큰돈을 벌지만 노인들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인들은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낙지 통발에 기대고 삽니다. 노인은 통발이 끝나는 철이면 건축판에 막노동을 나갑니다. 섬에서도 노인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합니다.
"아이고 생활하기 힘들어요. 힘들어."
▲ "내다 버릴 것인디..." 낡은 목선으로 어업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순박한 노어부ⓒ섬학교 |
항일 성지 소안도, 인구 6천에 불령선인이 8백
소안면 가학리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백 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됩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지요.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습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하는 참극을 겪었습니다. 이준화 선생은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선생 등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배달청년회는 이 땅에 최초로 생긴 근대적 청년회입니다. 후일 송내호 선생은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화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선생 등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중화학원이 사립소안학교의 모태가 됐습니다.
감옥 간 이웃들 생각 겨울에도 이불 덮지 않고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 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습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습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지요.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합니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었습니다. 1920~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 인물은 수백 명에 달합니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일의 열기가 짐작되지요.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습니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시켜버립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오랜 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습니다. 송래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어서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습니다. 해방이 결코 해방이 아니었던 셈이지요.
완도 향교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하므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所安)이라 했다"고 소안도의 지명 유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안도 사람들의 그러한 기질이 소안도를 항일 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 '항일의 메카' 소안도의 가학리 항일운동기념탑ⓒ강제윤 |
섬주민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완도해상지구에 속하는 소안도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상록수 숲이 산재해 있습니다.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39)과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40)은 드물게 잘 보존된 상록수 숲입니다. 또 미라리해수욕장을 비롯해 과목해수욕장, 소강나루해수욕장, 진산리해수욕장, 부상리해수욕장 등이 있어 피서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한가롭게 쉬다 갑니다.
하지만 최근에 일부 해변은 주민들이 해수욕장을 폐쇄해버리기도 했습니다. 피서객들이 들어와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 해변을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피서객들은 주민들 소득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먹을 것을 차에 싣고 오기 때문에 피서객들이 섬에서 쓰고 가는 돈은 거의 없지요.
"주민들은 관광객들 별로 안 반가워해요. 갖다 주는 것도 없고. 흔적이 너무 커요. 그런 흔적 치우다보니까 짜증만 나는 거죠. 전복, 김발 해서 안 그래도 먹고 살 만한디."
주민들은 섬에 보탬이 되지 않는 피서객들이 마뜩치 않습니다.
"지금은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서울서 싣고 와요. 물 한 병도 안 사먹고. 보리차물 끓여와 빌고."
설령 관광객들이 섬에 와서 돈을 쓰고 간다 해도 이익을 보는 것은 일부 숙박업자나 상인들뿐입니다. 나머지 주민들에게는 털끝만한 이익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달플 뿐입니다. 피서철이면 마을 도로변의 풀을 베고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모두 주민들 몫이지요. 객에 불과한 관광객들이 섬에 들어와 불손하게 굴며 주민들에게 피해만 입히고 간다면 어느 주민들이 그들을 반기겠습니까. 그러니 육지 사람들은 수백 년 섬을 지키고 가꿔온 주민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섬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을 테지요.
▲ 가학산 트레킹 길에서 만나는 숲속의 돌담ⓒ섬학교 |
섬학교 2013년 3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1일 금요일>
06:30 서울 출발(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
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3강 여는 모임
11:40 완도 도착
11:40-12:30 점심식사(완도 읍내 식당에서 봄기운 기득한 생선구이정식)
13:00 완도 화흥포항 출항
13:40 소안도 도착
14:00-18:00 소안도 첫째 날 걷기(약 4.8km)
운동장 약수터 위→잔디밭 쉼터→학운정→가학산 정상(359m)→수원지
삼거리→->데크 계단→해도정→맹선재→물치기미 쉼터
18:20-20:00 저녁식사(비자리 어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어부가 직접 잡은 최고의
횟감 자연산 감성돔회와 지리 등으로 저녁식사 겸 뒤풀이)
20:10 미라리 해변 팬션 도착,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3월 2일 토요일>
07:00 기상
07:40-08:00 미라리해수욕장 산책
08:10-09:00 아침식사 (비자리 식당에서 소안도식 백반)
09:00-10:40 소안도 둘째 날 걷기(약 4km)
가학리 항일독립운동기념관→비자리→달목공원→독립운동가 송내호 선생
묘역→소안항
11:00 소안항 출발
11:40 완도 화흥포항 도착
12:30 점심식사(영랑의 고향 강진읍내에서 맛소문난 남도식 한정식)
13:30 서울 향발
▲ 소안도 걷기 지도ⓒ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아이젠, 온수통,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13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 마을 슈퍼 앞에 나와 담소하는 소안도 노인들의 망중한ⓒ섬학교 |
[학습자료]
[소안도(所安島)] 옛이름은 달목도(達木島)다. 완도 남쪽 17.8㎞ 지점에 위치한 전남 완도군 소안면의 본섬이다. 노화도, 보길도, 횡간도, 당사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所安群島)를 이룬다. 면적 23.16㎢, 해안선 길이 42㎞, 최고봉은 가학산(359m)이고 대봉산(338m)·부흥산(228m)·아부산(110m)등 산지가 섬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013년 현재 1,364가구 2,862명이 산다. 이중 65세 이상 노인이 1059명이나 된다. 초·중·고등학교가 1개교씩 있다. 동쪽에는 청산도, 대모도, 소모도가 있고 서쪽에는 보길도·노화도, 북쪽에 완도가 있고 남쪽에는 당사도와 여서도 등이 있다. 1월 평균기온 2.5℃ 내외, 8월 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332㎜ 정도다. 천연기념물로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39)과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40)이 있다. 미라리해수욕장, 과목해수욕장, 소강나루해수욕장, 진산리해수욕장, 부상리해수욕장 등 물놀이 하기 좋은 여러 곳의 해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소안도(달목도) 관련 기사 : 예부터 소안도에는 도망자와 죄인들이 많이 숨어 살았고 왜구의 출몰이 심했다고 한다.
"병조(兵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영암군(靈巖郡)의 달목도(達木島)·노도(露島)·보질길도(甫叱吉島)·백라도(白羅島)에는 인물(人物)들이 도망하여 숨은 자가 많으니, 청컨대 추쇄(推刷)해 내어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조 6년 기사)
"연해(沿海) 부근의 제도(諸島)에는 고기와 해채(海菜)가 풍부하지 아니하므로, 반드시 추자도·청산도(靑山島)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諸島)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 배가 아니고 왜적이며, 영암(靈巖)의 경계는 보길도(甫吉島)·노아도(露兒島)·달목도(達牧島) 등까지이고"
(성종21년, 1490년 기사)
"전 청산 현감 박지번이 왜구의 출몰로 노도·달목도의 목장을 옮길 것을 청하다."(중종 5년, 1510년 기사)
처음으로 소안도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숙종10년(1684) 기사다.
"영암(靈巖) 땅의 소안도(所安島)·비미도(飛迷島)의 두 작은 섬은 밭[田]과 대지(垈地)를 합쳐 70결(結)이 되니, 다른 영(營)의 관례에 의거하여 면세(免稅)하고 간호(看護)하여서 죽목(竹木)의 수용(需用)에 충당하게 하소서."
[빤스고개] 최근 소안도에서는 맹선리재를 스토리텔링을 해서 관광자원화하기로 했다 한다.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고갯길인 맹선리재는 속칭 빤스고개였다. 연합뉴스 보도는 이 고개가 "배고픈 시절, 무거운 지게질로 옷이 땀에 흠뻑 젖어 팬티만 입고 넘었다 해 이름이 붙어진 이 고갯길은 주민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슴 아린 곳"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번 섬학교 소안도 트레킹 길에 지나가게 될 이 고갯길이 빤스고개란 이름은 얻은 진짜 이유는 연합뉴스 보도와는 다르다. 마을 주민들에게 탐문해 본 결과는 이렇다. 중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매일 이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길이 너무 가파르다보니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앞서가면 뒤따르던 남학생 눈에 여학생의 빤스(팬티)가 보였다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빤스고개다. 면에서는 아마도 이런 내용이 상스럽다고 생각됐던 모양이다. 사실대로 스토리텔링 했더라면 더 재미있을 뻔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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