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령한 기운의 태백산 천제단 Ⓒ백두대간학교 |
[교장선생님의 산행지 설명]
한반도의 등줄기 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이 백두산이라면, 1정간 13정맥을 비롯한 수많은 기맥과 지맥들 그리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강줄기들 품어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의 터전이 된 백두대간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긴 곳은 태백산입니다.
백두산이 지리적 의미에서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면 태백산은 생명의 터전이 되어준 백두대간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심의 시작이요 상징이 되는 산입니다. 백두산이 이 땅에 백두대간을 풀어 놓은 하늘의 뜻을 상징하고 있다면 태백산은 그 하늘에 감사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이 백두산을 통해 드러낸 뜻에 대해 사람들이 태백산을 통해 반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백산은 하늘과 땅(자연, 산)과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로운 삶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인 삼재(三才)사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태백산의 황홀한 여명 Ⓒ백두대간학교 |
태백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이 곳밖에 없습니다. 천제단은 장군단과 천왕단과 하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봉 정상에 있는 천왕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고, 장군봉 정상에 있는 장군단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영봉에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하단은 땅(자연)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 세 개의 단이 삼재사상에 기초해 있습니다. 즉 하늘의 뜻을 받들고 땅(자연)을 경외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백산은 백두대간이 상징하고 있는 생명사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생과 조화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아 2013년 새로운 해의 첫 산행은 태백산으로 들어갑니다. 하늘의 뜻과 자연의 가르침에 맞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마음을 저마다 담는 산행입니다.
태백산은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청옥산과 두타산을 지나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맥이 크게 용트림한 산입니다. 다른 산들과 달리 태백산의 주능선 일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평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부드러운 능선입니다. 마치 하늘과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이 흐르는 영봉 정상의 한 가운데 천제단(天際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은 "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이름이 된 산입니다. 태백산(太白山)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크게 밝은 산'의 순우리말은 '한밝뫼' 또는 '한밝달'입니다. '한밝달'이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 지내던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고 부르며 숭앙했습니다. '밝은 산' 중에서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입니다.
산행은 태백과 영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는 화방재에서 시작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어평재라 부릅니다. 어평이란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땅(御坪)이다"라고 한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합니다.
화방재에서 사길치(사길령)을 지납니다. 사길치는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했지만 가장 가까운 길이어서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넘었다는 곳입니다.
사길치를 지나면 바로 태백산 천제단을 향합니다. 걷다보면 이내 자연의 경이로움과 황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주목 군락지를 만나게 됩니다. 주목 군락지를 지나면 장군봉이고 영봉입니다. 영봉에 올라 하늘을 만지고 산을 느끼며 걷다보면 단군의 아들 부소의 이름이 붙여진 부소봉입니다. 문수봉을 지나 다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겨 있는 영험한 산입니다. 이러한 태백산의 의미로 인해 태백산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백산행은 영혼과 함께 걷는 산행입니다. 눈 덮인 영험한 산 태백의 길을 자신과 함께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 산행코스 : 화방재-사길치-태백산(장군봉)-천제단-부소봉-문수봉-당골주차장
- 산행거리 : 약 12.5km(도상거리)
- 소요시간 : 약 8시간 30분(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 난 이 도 : 중하(★★)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백두대간학교 |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 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00 화방재 도착
<산모퉁이>에서 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기
06:30 산행 시작(화방재 출발)
07:30 사길치 도착
08:30 유일사 갈림길 도착
09:30 주목 군락지 - 주목과 설경의 어울림
10:00 태백산(장군봉) 도착
10:10 천제단 도착
10:30 만경사 도착(점심식사)
11:20 만경사 출발
12:00 부소봉 도착
13:00 문수봉 도착
15:00 당골주차장 도착
버스 이동
<태백산숯불갈비> 도착 (저녁식사 및 뒤풀이)
맛있는 숯불갈비와 막걸리로 뒤풀이
17:00 서울로 출발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태백산 산행지도 Ⓒ백두대간학교 |
[산행준비물]
방한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 랜턴, 아이젠, 스패츠.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 세트를 가져 오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27강 <태백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참가신청 바로가기
▲ 천제단 가는 길 Ⓒ백두대간학교 |
[산행자료]
[화방재] 939m. 태백과 영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허리를 넘어간다. 마루금에는 어평휴게소 겸 주유소가 자리한다. 내륙쪽 200m 거리에 만항재에서 내려온 414번 지방도로가 합류한다. '화방'은 '꽃밭'이라는 뜻이다. 진달래 피는 계절에 이곳을 여행해본 종주자에게는 쉽게 납득이 간다. 봄이 되면 도로변의 밭을 제외하고는 온 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장관이 연출되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어평재라고 부른다. 서쪽 기슭의 어평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했다 한다. 어평이란,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御坪)이다"라고 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재'를 어평재라 불렀다는 유래도 있고, <태백의 지명 유래>에는 봄이면 고갯마루 부근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 하여 화방재(花房嶺)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방화선(防火線)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사길치] 사길령이라고도 하며 본래 이름은 새길령.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했지만 가장 가까운 길인만큼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의 인솔 하에 넘어 다녔다. 산이 험해 맹수와 산적들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에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를 올린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존 중인 <천금록>은 200여 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 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태백산] 1567m.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령의 상징인 태백산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청옥-두타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한번 웅장하게 용트림한 산이다. 금강, 설악, 오대,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깊은 협곡을 거느려 명산에 걸맞는 경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은 주능선 일대에 국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듯 크고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육산일 뿐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함백산이나 정암사로 빠지는 고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활등 모양으로 휘어든 평탄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둔중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상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덩어리로 다가온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 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 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이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 어느 정도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그것이 어떤 산이든 일단 민족의 영산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태백산이라는 이름도 있는 백두산이 그렇고 태백산이 그렇다. <동국여지승람>에 태백산은 신라의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되어 일찍부터 명산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太白山'이란 산 이름에 대해서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 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허목(許穆, 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 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 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 등의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천제단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퇴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단으로 태백산 정상에 있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 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300년 기림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우리 땅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며, 녹니편암의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천기(天旗)와 28수기(宿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태백산에 천제를 올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基臨尼師今 三年三月 至牛頭州望祭太白山樂浪帶方兩國歸服
(기림왕 3년3월에 왕이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렸으니 낙랑과 대방 이 항복하여 왔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誌)'
太伯山載府西南新羅擬五岳爲北岳有祠名曰太伯天王堂諸郡人民春秋祀之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 하였다. 산 꼭대기 에는 신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태백천왕당이라 한다. 여러 고을 백성들이 봄가을로 천제 를 올린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太白山 新羅時北岳載中祀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繫牛於神座前狼狼 不顧而走曰如顧之神如不恭而罪之過三日府收其牛而用之名之曰退牛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꼭대기에는 세간에서 말하는 천왕당이 있어 강원도와 경상도의 인접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제사한다. 제사를 할 때 에는 신좌 앞에 소를 매어놓고 3일이 지난 후에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가 쓰는데 이름 하여 퇴우라 한다)
太白山祠 在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이르기를 천왕당이라 한다. 강원도(본도)와 경 상도의 인근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척주지(陟州誌)>
太白山在府西百二十里神羅北岳載中祀風俗信鬼其絶頂作天王祠春秋大祀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쪽 120리에 있는데 신라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린 곳이다. 세 간에 신을 믿는 풍습이 있어 산꼭대기에 천왕사를 짓고 봄 가을로 크게 제사한다)
-장군봉(將軍峰)
1566.7m. 춘양(春陽) 남동쪽 17km 지점에 위치한다. 태백산 최고봉으로 주목과 고사목이 많아 겨울에 흰 눈이 덮이면 장관을 이룬다. 장군봉과 태백산 천제단 사이의 능선에 자란 나무들가지에는 상고대가 피어 마치 흰 꽃밭을 연상하게 한다. 북쪽의 죽미산(竹嵋山, 917m), 남쪽의 일월산(日月山, 1,219m)으로 이어진다. 낙동강의 여러 지류가 여기서 발원하며, 남쪽 기슭의 장군광산에서는 납·아연·망간을 채광한다.
백두대간 상의 선달산 동쪽 도래기재에서 매봉산(천의봉, 1,303.1m) 동북쪽 피재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인 태백산(太白山, 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루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단군 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그 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 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 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 기슭 옛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태백산의 봉우리들과 문화유적
태백산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 1,560.6m), 그리고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들이 태백산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제단이 있는 현재의 산봉이 태백산 주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대박(大朴)·삼태(三台)·우보(牛甫)·우검(虞檢)·마라읍(摩羅邑)의 봉우리들이 6,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의 차용 표기로, 전음되어 현재는 함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5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으며,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葯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었던 각화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 1,176.7m)이고,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부소봉] 1547m. 천제단 남동쪽에서 1km 지점에 위치한 준봉이다. 장군봉, 천제단과 비슷한 높이다. 그러나 두 봉우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봉우리다. 대간의 중요한 봉우리인데도 기존의 대간로가 옆으로 비껴 우회할 정도로 구박덩이다. 남진해오던 대간이 부소봉을 지나면서 차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경상북도 지경으로 처음 진입한다. 북쪽은 여전히 태백시다. 솥두껑(釜)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단군의 아들 부소왕의 이름이다.
-<환단고기>의 단군팔가(檀君八加)
단군의 여덟 아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맡긴 것. 부루(虎加), 신지(馬加), 고시(牛加), 치우(熊加), 부소(鷹加), 부우(鷺加), 주인(鶴加), 여수기(狗加). 이중 둘째 아들 부소는 응가로 삼아 형벌을 주관케 했다 전한다. (<환단고기> 자체에 대해서는 위서 논쟁이 있다. 참고하시길.)
※ 태백산을 같은 코스로 오르는 것은?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약 10년 전 약 5년간 매년 같은 날에 지리산을 오른 적이 있다. 산은 같은 산이나 산의 모습은 매번 달랐다. 주변의 경치도 다르고 산에 오르는 날의 감정에 따라 산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태백산. 백두대간학교가 이번에 산행하는 코스는 지난 1기 산행에서 태백산에 올랐던 코스를 그대로 다시 가기로 하였다. 태백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군단, 땅에 제사를 지내는 하단이 있다. 대부분의 산악회들은 태백산에 올라 주목 군락지의 주목과 장군단, 천제단만 보거나 망경사를 들러 바로 하산을 한다. 백두대간학교는 장군단, 천제단을 둘러보고 망경사를 거쳐 하단을 지나 부소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능선길을 여유롭게 산행한다. 부소봉 삼거리에서 대간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다. 여기서 대간길 왼쪽으로 발길을 옮겨 문수봉을 거쳐 당골로 하산한다. 눈덮힌 태백의 신령한 기운을 흠뻑 마시고, 아름다운 설경을 눈에 가득 담아오는 산행이 될 것이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걸작선> 3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백두대간을 걸어야 하나요?"
백두대간이 아니더라도 산은 지천이고 발 닿는 곳마다 길인데 굳이 힘들게 백두대간을 걸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본래 산길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길 따라 걷는 것이니 굳이 백두대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백두대간이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큰 산줄기이기 때문에 굳이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길 따라 걷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백두대간이 부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백두대간 1,625km, 남한 구간 684km의 깊은 산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품어 키운 생명의 땅입니다. 생명을 품어 키운 자비심과 지혜가 깃든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의 이름이 백두산이어야만 하고, 남쪽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인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백두산(白頭山)은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지리산(智異山)은 '머물면 사람 사는 세속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은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길입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진 신심과 평화의 길 '산티아고'를 걷는 것처럼 제각기 마음에 담긴 신심으로 걷는 하늘길이다. 평화를 얻고 누리고 지키는 생명길입니다. 그러니 어찌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품고 걷는 자만이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고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의 속살을 보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를 시작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도반들과 함께 산길 걸어 온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백두대간 남한구간 약 684km 중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비법정탐방로로 지정하고 있는 79.9km를 제외하면 걸을 수 있는 구간은 약 604km 정도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제법 많이 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3기를 마치면, 비법정탐방로와 험난하고 힘든 코스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걷지 못한 다른 구간들을 걷고 싶으신 분들은 대간 종주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의 산행 코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초보자 코스와 중상급자 코스를 철저히 분리하였습니다.
둘째, 초보자들을 위한 산행을 늘렸습니다. 산행거리도 이전보다 짧게 조정하였고 상대적으로 쉬운 코스를 선택하였습니다. 트레킹 여행의 의미를 담아 겨울의 끝인 2월에는 초급자들을 위한 1박2일 산행도 계획하였습니다.
셋째, 중상급자들을 위해 1박2일 산행을 3회로 늘렸습니다. 평소에 혼자서는 산행하기 쉽 지 않은 종주 산행을 포함했습니다.(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종주 등)
넷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를 하였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