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됩니다(수업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교장선생님의 연세대 일대 근대문화유산 강의 답사
* 최연 선생님의 봉원사 등 안산 일대 역사유적 강의 답사
*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답사
* 서대문의 맛있는 김치찜집 <한옥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 겸 뒤풀이
▲ 음식문화학교 제27강 답사 지도 Ⓒ음식문화학교 |
제27강 답사지는 서울 시내인지라 좀 느긋하게 시작하겠습니다. 오전 9시 50분까지 연세대학교 정문 앞(왼쪽)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제법 긴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걷기에 좋은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준비하시고, 추울 수 있으니 따뜻하게 입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 서울로 천도할 때 어디에 왕궁 터를 잡을지 개국공신 간에 세 가지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정도전은 삼각산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궁을 배치할 것을 주장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 경기관찰사 하륜은 안산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 곧 지금의 연세대학교 터에 왕궁을 짓자고 주장했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이 관철되어 지금의 서울의 얼개가 짜여졌습니다.
조선 초기에 왕궁이 될 뻔한 연세대학교에는 1987년 유월항쟁의 상징이었던 이한열 열사 기념비,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묻혔던 수경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료기관 광혜원, 그리고 세 동의 문화재급 근대 건축물이 있습니다. 이 학교를 28년이나 다닌 교장 선생님과 최연 선생님이 세세하게 안내하며 설명합니다.
10시 30분.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근대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봉원사로 향합니다. 강남에 있는 조계종의 봉은사와 봉원동에 있는 태고종의 봉원사를 혼동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태고종은 조계종과 달리 승려가 결혼할 수 있는 종파이며, 봉원사가 태고종의 총무원이 있는 본산입니다. 태고종은 탱화, 단청, 영산재, 범패, 작법무 등 불교문화예술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 봉원사 대웅전 Ⓒ봉원사 |
[봉원사(奉元寺)]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절로 태고종의 본산이다. 889년(진성여왕 3)에 국사 도선(道詵)이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절을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 공민왕 때 보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396년(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신 반야암을 지어 불교 탄압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중창하였고, 1651년(효종 2)에 다시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 휴암(休巖), 도암(道庵) 등이 중건하였다. 또, 선조·인조·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조정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1748년(영조 24)에는 왕이 절을 지을 부지를 하사하여 찬즙(贊汁), 증암(增巖) 등이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이듬해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절 이름을 봉원사라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팔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를 설치하여 승려의 승풍을 지도, 단속하게 하였다. 1884년(고종 21)에는 갑신정변의 주동 인물이었던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이동인(李東仁)의 지도 아래 정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요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의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瑚碧樓), 이완용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등과 장승업(張承業)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수령 약 500년의 괴목이 있고, 절 뒤에는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이 얽힌 관음바위가 있다.
11시 30분. 봉원사 답사를 끝내고 안산으로 향합니다. 안산(鞍山)은 멀리서 보면 말안장 같다고 하여 안산인데, 산이라 하지만 오르는 길이 평평하여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안산에는 조선시대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에서의 적군의 침입 등 위기 상황을 서울에 알리는 봉수대가 두 곳 있습니다.
[봉수대(烽燧臺)] 봉수대는 옛날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연락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등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였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는 경흥·동래·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었는데,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서울 강동구) 봉수대로부터, 제2봉 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 봉수대로부터, 제3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안산 동봉의 봉수대로부터, 제4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안산 서봉의 봉수대로부터, 제5봉 봉수대는 전라·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천(서울 양천구) 개화산 봉수대로부터 각기 받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를 목멱산 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 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1894년(고종 31) 봉수제도는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바뀌어 폐지되었다.
▲ 안산의 동봉수대 Ⓒ서울학교 |
12시 30분. 안산 정상에서 잠시 호연지기를 맛보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향합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경성감옥, 일제 때는 서대문형무소, 해방 후에는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기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던 애환과 악몽의 현장입니다. 흔적도 없이 몽땅 부숴 쓰레기로 버린 중앙청에 비하면 건물과 시설 일부라도 남겨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삼은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해설사의 현장 안내에 교장선생님의 생생 체험담이 더해질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있었던 구(舊) 서울구치소는 일본 강점기 때의 민족독립운동 역사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 정치적 격변 등 우리나라 광복 40여 년의 사회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융희 원년(1907), 인왕산 기슭 이곳에 근대적 감옥을 건축하여 경성감옥이라 칭했고, 1912년에는 서대문감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 때 이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가 모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갇혀 있다가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고, 특히 1919년 3.1운동 때에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됨에 따라 수용시설을 초과해서 수감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이 시기에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갇혀 있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되었다. 4·19, 5·16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 발달로 인해 구치소 위치로는 부적합하여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김구 선생, 강우규, 유관순 열사 등이 옥고를 치른 제10, 11, 12사의 감옥 건물과 사형장 등을 사적 324호로 지정,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높이 5m의 벽돌담이 쌓여 있는 사형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오후 2시. 음식문화학교는 제27강 답사를 모두 끝내고 랄랄라 점심식사 겸 뒤풀이 하러 서대문 <한옥집>으로 향합니다. <한옥집>의 김치찜과 김치찌개는 착한 가격에 새콤하고 구수한 맛으로 밥도둑이라 소문나 있습니다. 점심식사가 좀 늦기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가기 전에 김밥과 따끈한 오뎅 국물로 애벌점심을 할 생각입니다.
음식문화학교 제27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 (강의비, 입장료, 식사대, 운영비 등 포함). 참가 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나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하시면 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유명한 음식칼럼니스트로, 음식 칼럼집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와 술 칼럼집 <태초에 술이 있었네>를 펴냈으며, 네이버 블로그 '김학민이 꿈꾸는 세상'에 음식, 술, 건강, 문화, 시사 관련 글을 활발하게 올리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음식문화학교를 열며> 이렇게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
최초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의 발견을 계기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슬기를 발휘하여 서서히, 또한 독특하게 식생활 체계를 세웠으니, 이것이 음식문화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로 진화되어, 각기 살고 있는 곳의 기후와 풍토에 따라 제각각의 음식문화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자연스런 분화와 발전이 있었으므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규범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한, 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또 특정한 먹을거리를 특별하게 먹게 된 것도 그 공동체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므로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밀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닙니다.
흔히 "모두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원초적 과제들을 의·식·주로 나누어 그럴 듯하게 분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사실은 식(食)의 문제, 곧 먹을거리 문제가 인간 실존의 근원입니다.
먹을거리 문제는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조절돼 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사회면 기사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모두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 사이의 전쟁, 민족 사이의 분쟁도 땅과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맛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먹을거리 문제의 극단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거리의 질과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속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거대 식품산업이나 외식사업 등에서 양산되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도전해 오고 있고, 세계 각국의 먹을거리들도 그 나라의 문화요소들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서 음식문화학교는 우리 전통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특정 먹을거리와 그를 갈무리하는 맛깔스런 음식점, 그리고 그 주인과 공동체에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곧 '먹을거리 이야기'를 넘어 '이야기가 있는 먹을거리'를 찾는 여정이 음식문화학교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 유홍준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 교수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음식도 아는 만큼 맛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음식문화학교는 요리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음식문화학교는 문화 속의 음식, 음식 속의 문화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음식문화학교는 음식의 현장을 찾아가 문화를 즐기거나,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기행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곧 '금강산과 식후경의 조화'가 저희 음식문화학교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김치, 젓갈, 된장, 두부, 등심, 갈비, 불고기, 육회, 토종닭, 홍어, 비빔밥, 산나물, 막걸리 등 숱한 우리 전통 먹을거리의 명품, 명소를 찾는 기행이 쭉 이어집니다. 전문가 또는 교장의 음식문화 강의 후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되며, 재래시장 장보기, 산나물 뜯기, 쭈꾸미 잡기, 콩 털기 등의 체험행사도 함께 하며 유명 음식축제 여행으로 변화를 꾀하기도 하겠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월 1회, 매월 셋째 토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명절, 연휴, 장날, 음식축제 등)에 따라 날짜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수도권은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당분간은 당일 코스로 한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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