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금도와 도초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섬에는 시목(枾木)해변, 명사십리, 원평, 하누넘해변 등 10개도 넘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특히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던 하누넘해변은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연인이나 부부들이 하누넘에 가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심장에 남는 사람이 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두 섬은 천일염의 메카이며 겨울 시금치의 대명사인 '섬초'의 원산지이기도 합니다. 비금도는 바둑왕 이세돌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이세돌기념관'도 있습니다.
▲ 밝고 맑은 비금도 명사십리해변 Ⓒ섬학교 |
섬학교는 지난 3월 개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비금도 하누넘 앞바다의 무인도들 Ⓒ섬학교 |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답사지인 비금도와 도초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섬의 시간이 끝나간다
섬 왕국, 신안군은 천사의 섬입니다.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해서 붙은 별칭입니다. 시군 단위로는 가장 많은, 이 나라 섬의 30% 가량이 신안에 모여 있습니다. 신안의 74개 유인도, 섬들도 각각이 하나의 소국처럼 독립적입니다. 섬들은 본래 대부분이 산지였지만 지금은 간척으로 평지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 간척지에서 쌀과 시금치와 대파와 고구마 등의 농작물이 나고 염전에서는 천일염이 생산됩니다.
목포항에서 출항한 배가 압해, 외달, 팔금, 안좌, 노대, 사치 등의 섬 사이 해로를 통과해 도초도에 기항합니다. 여객들을 내려주고 쾌속의 여객선은 최종 목적지 흑산도를 향해 떠납니다. 도초, 비금은 목포에서 40여 km나 떨어진 섬이지만 수 만년 이어져 온 섬의 시간도 이제 곧 끝이 날듯이 보입니다.
안좌와 팔금, 자은과 암태, 비금과 도초는 각각의 두 섬들끼리 연도가 되었습니다. 압해도는 목포와 연륙이 되었지요. 서로 떨어진 섬들 사이에도 머지않아 다리가 놓여질 예정입니다. 마침내 섬들이 모두 목포로 연결이 되고 나면 국도 1호선의 시작은 도초도가 될 것입니다. 황해 바다에 물이 들기 전에는 이곳 또한 육지였으니 섬이 뭍으로 이어지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도 수만 년 이어져온 섬의 시간이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바위의 옷으로 만든 해초묵, 바옷
도초도는 화도 선착장 부근에 횟집과 식당이 몰려 있습니다. 어디나 선창가는 나고 드는 사람들로 인해 상업 활동이 활발합니다. 그러나 도초도 선착장의 활력은 횟집들에서 멈춥니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섬의 경제가 육지에 종속된 결과지요. 중앙사진관 주인은 택시 영업도 병행합니다. 본래는 사진관이 주업이었지만 이제는 택시가 주업이 되었습니다. 골목에도 상점들이 여럿 있지만 주인들은 모두 출타중입니다. 미성전자, 평화선구철물점에도 주인이 없습니다. 선박용품을 판매하는 선구점 유리문에는 청거시, 홍거시, 그린새우 판매 안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청거시, 홍거시는 갯지렁이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그린 새우는 또 뭐지요. 낚시 미끼로 쓰는 크릴새우를 그린 새우로 잘못 표시한 것인 듯합니다.
광명이발관은 불이 켜져 있습니다. 이발소 안에는 손님이 하나쯤 있나봅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광명양행에서는 신발, 내의, 가방, 기타 일절, 만물을 다 취급하지만 이 집도 주인은 출타중입니다. 도초양조장도 문을 닫았습니다. 폐업한 지 여러 해 돼 보이는 양조장. 무엇보다 나그네는 술을 만드는 지역의 양조장이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 부러웠던 것의 하나가 시골은 물론이고 도시에도 소규모의 전통 양조장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을마다 전통술이 살아있었습니다. 가증스럽게도 자기 나라의 전통은 그대로 살려두고 식민지 조선의 오래된 전통들, 전통술 제조법 같은 것을 말살해버린 것이 일본제국주의였지요. 하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도 우리는 일제의 그 못된 버릇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우리의 전통을 아주 말살해버린 것은 권력을 잡은 친일파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종합화장품도 문이 잠겼습니다. 광명당시계점에도 주인은 없습니다. 광명방앗간에서는 참기름 짜는 냄새가 고소하게 새어나옵니다. 가을이라 고춧가루를 빻으러 나온 노인 몇이 차례를 기다립니다. 땅거미가 지는가. 선창가 평화약방에 불이 들어옵니다. 서남문대교 가로등에도 불이 켜집니다. 도초도에 밤이 찾아듭니다.
▲ 도초도 성창염전에서 써래질로 소금을 모으고 있다. Ⓒ섬학교 |
도초도 화도 선착장의 작은 허름한 식당을 찾아들어갔다가 나그네는 뜻밖의 별미를 맛봅니다. 바위옷, 바옷 묵. 바위는 사람에게 앉을 자리만 주는 게 아닙니다. 바위도 옷을 입고 사는데 사람이 배고프다고 칭얼대면 자기 옷까지 벗어 먹이로 내주기도 합니다. 바위옷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해안가 바위에 이끼처럼 붙은 해초를 말합니다. 숟가락이나 전복껍질로 긁어서 채취한 뒤 묵을 만들어 먹습니다. 도초도에서는 바옷이라 합니다. 도초도의 바옷 묵은 우무와는 달리 찰지고 단단합니다. 바옷은 결혼식 등의 잔치음식으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합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잔치집이 있으면 한 다라씩 써다 품앗이 하고" 그랬다지요. "길게 두 도막씩 잘라서 썰어 올리면 질로 잘 묵는 게 이거여." 식당주인 할머니의 말씀입니다.
어느 해 동네 혼례식 날이었답니다. 피로연을 위해 바옷 묵을 쑤었겠지요. 신랑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집어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그걸 본 신랑 친구 "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렇지 새신랑이 손으로 집어 묵냐"고 타박합니다. 그러자 신랑이 말했다지요. "그럼 니는 발로 처묵냐." 바옷은 새신랑이 염치를 잊게 할 정도로 매혹적인 맛입니다. 또 이 섬은 새콤달콤한 간재미무침도 그만이고 병어회나 조림, 장어탕도 기막히게 맛이 있습니다. 도초 양조장을 하던 주인이 영암 삼호에 나가 만들어서 보내는 도갓집 막걸리 맛도 일품입니다.
▲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하트 모양의 하누넘해변 Ⓒ신안군 |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돌
갯벌의 간척으로 형성된 도초와 비금의 들은 넓고 찰집니다. 비금도의 해안에는 호남에서 처
음으로 천일염이 생산된 염전이 있고 도초도에는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들, 고란평야가 있습니다. 신안의 섬들에는 거듭된 간척으로 드넓은 땅이 많습니다. 도초항에서 도남염전 길을 걷습니다. 염전에서는 소금을 쓸어 모으는 써래질이 한창입니다. 소금 창고에는 갓 거둬들인 소금이 산처럼 쌓였습니다. 장마 직후인 7~8월에 생산된 소금이 최고의 품질을 유지한다 합니다. 염도가 너무 높으면 쓴 맛이 나서 소금의 질이 떨어집니다. 전 세계 바다의 평균 염분 농도는 35‰(퍼밀). 1‰은 바닷물 1000g 속에 1g의 염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염분 농도 27~28‰ 정도가 될 때 소금은 쓰지 않은 최적의 짠맛을 얻습니다. 7~8월 소금의 품질이 좋은 것은 우기 직후라 염분의 농도가 너무 높지 않고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광물로 취급되던 천일염이 식품으로 지정되었지만 여전히 소금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돌입니다. 소금의 과다 섭취가 고혈압 등 여러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물과 함께 소금은 세포의 기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소금과 물이 부족하면 세포는 양양실조와 탈수로 죽어가고 말 것입니다. 소금의 성분들이 위액인 '위염산'을 만드는 원료입니다. 소금이 부족하면 위액이 만들어지지 않아 소화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우리 혈액의 적혈구는 영양분과 산소를 세포에 운반하고 노폐물을 몸 밖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적혈구의 활동력이 약해지거나 수가 줄면 세포들에게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지 못해 노폐물이 배출되지 못하고 쌓이게 됩니다. 적혈구의 주성분은 철분입니다. 그 철분을 소화시키는 것이 소금이 만드는 위염산입니다. 소금의 부족이 우리 몸을 질병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바다의 소금은 양이온과 음이온의 결합으로 생겨났습니다. 바닷물 속의 양이온인 나트륨이나 칼슘, 칼륨 등은 뭍의 땅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지만 염소나 황산 같은 음이온들은 바다에서 솟아난 화산 연기에서 첨가됐습니다. 금속원소인 나트륨이 치명적인 독, 염소와 반응하면 염화나트륨이 생성됩니다. 자연계는 신비의 연속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독이 생명을 살리는 약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소금을 먹는 것은 바다와 육지가 빚어낸 생명의 결정체를 먹는 일입니다. 소금 알갱이 안에 농축된 수억 년 세월을 먹는 일입니다. 바다는 소금의 저장고. 그러나 소금을 주는 바닷물이 태초부터 짰던 것은 아닙니다. 수억 년 세월, 땅 속이나 바위에 섞여 있던 화학물질들이 빗물과 함께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다는 점차 염분이 늘어났고, 바다에서 생성된 화합물들과 섞여서 마침내 짠 소금물이 되었습니다.
▲ 외계인(?)의 얼굴 모양을 한 비금도의 간재미. 가오리의 사촌쯤 된다. Ⓒ섬학교 |
로마제국 최초의 도로, 소금길
고대 로마제국 최초의 도로는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입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내륙으로 소금을 나르기 위해 만든 길이었지요. 로마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살락스(salax)라 불렀습니다.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흐물흐물한 사람들. 사랑에 빠지면 다들 그렇지 않은가요!^^ 월급을 일컫는 샐러리(salary)도 소금에서 나왔습니다. 한때 로마의 병사들에게 소금으로 급료를 지불했던 데서 유래됐습니다. 흔히 야채를 일컫는 샐러드(salad)는 본디 소금에 절인 야채를 말합니다.
중국의 사천 지방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소금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해염(海鹽), 즉 바다 소금을 생산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서기 200년경부터 천연가스를 이용해 소금을 굽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옛날부터 소금은 사람살이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신안군은 천일염 생산의 메카입니다. 신안군에서 한국 천일염의 70% 이상이 생산됩니다. 천일염 생산의 중심지에 도초, 비금, 신의, 증도 등의 섬이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고정적으로 도초나 비금을 찾는 피서객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서울이나 도시에서 소금구이 고깃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섬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해수욕도 즐기고 돌아갈 때는 타고 온 화물 트럭에 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가득 싣고 돌아갑니다.
▲ 갓 잡아온 새우를 배 안에서 소금에 저려 새우젓을 담고 있다. Ⓒ섬학교 |
목선은 낡아가고
연도교를 건너 비금도 해안 길을 걷습니다. 비금면 수대리 송치, 남해듸젤 앞 해변에는 폐선 한 척이 정박해 있습니다. 폐선은 목선입니다. 한때는 영원히 정박을 모를 것처럼 떠다녔을 목선. 폐선은 외지 사람이 이곳에 놔두고 간 것입니다. 남해듸젤 집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가지러 오겠다던 배 주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낡은 차를 폐차장에 보내지 않고 외딴 곳에 버린 것같이 목선도 그렇게 버려진 것입니다. 저 목선처럼 정착을 모르고 떠도는 나그네도 마침내 어느 적 어느 해변에 버려져 낡아가게 되겠지요.
도초와 비금 사이 해협에는 두 척의 어선이 떠 있습니다. 한때 조기와 꽃게로 흥청거렸던 바다. 조기와 꽃게 어장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이 바다에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젖새우입니다. 하지만 오늘 떠있는 저 두 척의 배는 새우잡이 배가 아닙니다. 고기잡이 그물배. 멀리서도 배의 용도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배에 실린 선구들 덕분입니다. 저 배들의 선미에는 붉은 깃발들이 꽂혀있고 뱃머리에는 도르레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고기잡이배들은 그물을 내리고 저 깃대를 꽂아 위치를 표시합니다. 새우잡이 배는 깃발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복수라고 하는 부표나 튜브를 싣고 다닙니다. 남해듸젤 집 여자는 35년 전에 비금도로로 이주해 왔습니다. 선박 수리 기술자인 남편을 따라 들어왔다 합니다.
"옛날에는 깡다리, 부서 그런 것이 많이 나왔지라. 인제 부서는 보자도 없어라우. 그래도 봄엔 깡다리랑 갑오징어가 쪼맨치 나긴 합디다만. 이 마을은 어장배도 많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하고 그래라우. 어디나 다 똑같지라. 사람 사는 거시사."
쥐 한 마리가 폐선의 선체로 기어오릅니다. 폐선은 쥐들의 보금자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폐선의 뱃머리는 아주 파손되었고 배의 판자들을 이어주던 쇠도 부식되어 가루가 날립니다. 여자는 더러 육지에 나가기도 하지만 섬이 그리워 이내 돌아옵니다.
"나가면 심심해라우. 여그서는 넓은 바다도 보고 그란디 나가면 답답해라우."
송치마을 경로당 앞에 건립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기념비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비석의 기증자인 마을 노인회장이 손수 비문을 지었습니다.
"노인은 구구팔팔 이삼사 하고 중장년은 사업이 번창하여 마을 전체가 부귀할 것이며 청소년은 전국 각지로 풀려 장래에 나라의 기둥감이 되리로다."
구구팔팔 하고 이삼사. 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숫자가 9988과 234라던가. 노인들은 건배를 할 때도 구구팔팔 이삼사를 외친다더군요.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만에 죽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은 숫자. 건강하게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노인들의 담박한 태도가 부럽습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는 진리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그네는 여전히 이 유한한 삶이, 존재의 사멸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 비금도에서 만난 흑소.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토종 소다. Ⓒ섬학교 |
문절이 낚는 노인
비금 들판의 수로는 송치마을 끝자락에서 바다와 합류합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되는 갯벌은 물고기들의 먹이가 풍부합니다. 수문 다리에서 노인 한 분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노인은 요즘 농어촌의 유행인 사발이(사륜오토바이)에 앉아 있습니다.
"할아버지, 뭘 낚으세요?"
"문절이나 잡지."
그러고 보니 이제 본격적인 문절이(망둥어) 낚시철입니다. 때 만난 숭어들도 수면으로 툭툭 튀어 오릅니다.
"숭어는 안 잡으세요?"
"숭어는 꽉 찼어. 숭어 낚어서 뭣에 쓰게. 바닥에 것도 안 묵는디, 숭어는 안 묵어."
"왜요?"
"해금내 나서 안 묵어, 비렁내도 나고."
"저 우에 지방에서는 숭어도 먹던데요?"
"그런 디는 알아준디, 이런 디는 안 묵어. 여그 사람들이 안 묵는다는 거제."
"여기 사람들은 숭어는 아주 안 먹나요?"
"다 똑같은 디, 바닥에 것은 겨울에는 묵는 디, 여름에는 안 묵어. 히린내 나서, 해금내 나서 안 묵어."
얕은 갯벌에 사는 숭어나 여름 숭어는 흙냄새와 비린내가 심해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겨울 숭어는 먹습니다.
"바다에 나가서는 주로 무얼 낚으세요?"
"잡을 때도 있고 못 잡을 때도 있고 그라제."
"뭐가 많이 잡히는데요?"
"집이는 몰라. 그런 거 갈쳐줘도."
"갯지렁이는 직접 파서 쓰세요 ?"
"갈가시?"
"네."
"그라제. 그란디 거세는 붕어 낚시에나 쓰제. 갱물에서는 갈가시를 쓰고."
여기 사람들은 지렁이를 거세라 합니다. 거세는 뭍의 흙에 사는 지렁이. 갈가시는 청거시라고 하는 푸른 갯지렁입니다.
"문절이는 어떻게 요리 해 드시는데요?"
"인자 등 타가꼬 몰려서 해 묵제. 그냥은 못 묵어. 죽어부럿쓰께. 쌩으로 회해 묵어야 쓴디, 못해 묵으면 그냥 등 타가꼬 몰리제."
"탕으로는 안 끓여 드세요?"
"문절이는 여그서 끓여 노면 누가 묵도 안 해. 말려노면 묵은 디."
"맛 없어서요?"
"그냥 안 묵어."
"근디 머 하러 여그 왔능가? 누구 알음 있능가?"
"아뇨. 그냥 왔습니다."
"그런 돈 있으면 집이서 묵고 살어. 이런 데 섬 구겡 해서 머 한다고. 돈이 아깝제."
"할아버지는 비금이 고향이세요?"
"비금이 고향이여."
"어느 마을이신데요?"
"여그서 가까."
노인의 오토바이 뒤에는 낚시대가 여러 개입니다.
"민물 낚시도 하세요?"
"바닥에서도 할람 하고, 여그서도 하고. 민물에서는 안 해."
"여기 사람들은 민물고기는 안 먹나요?"
"붕어는 묵는디, 붕어는 묵지. 다른 거슨 안 묵어. 냄시 나서. 붕어도 비렁내나. 그래도 존 거시께 묵어."
"놀러 다니지 말고 괴기배 타등가 염전이나 대녀."
▲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비금도 내월리 석장승 Ⓒ신안군 |
노인은 낚시를 드리우고, 나그네는 구경하고, 둘은 한참을 말이 없습니다. 노인이 불쑥 침묵을 깹니다.
"염전에나 다니게. 염전 대니면 돈 벌제."
"염전에서 일하면 일당은 많이 줍니까?"
"소금 가매니로 얼마 묵제."
"....?"
"갯수로 묵는다, 이 말이여, 뭔 말을 알아묵도 못하고."
노인이 버럭 화를 내십니다.
"어떻게요?"
"갯수로 나나 묵으께. 열가마니 내면 염전 다닌 사람들끼리 여섯개 가꼬 시니 나눠.
하나 앞에 두가마니씩이나 되것제. 염전 임자는 니개 묵제."
나그네는 노인의 말들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습니다. 노인이 딴죽을 겁니다.
"그런 거 적지 마. 이녘 필요 없는 것 적어갓꼬 대니면 형무소 가. 필요 없는 것 적지 마. 근디 여그 누구 형제간 있능갑제."
"아니요."
노인은 아무 연고도 없이 섬마을을 찾아와 배회하는 나그네가 미심쩍습니다. 노인은 끝내 아픈 곳을 콕 찌릅니다.
"게을러 갖고 일 안해 묵을라면 돈 쓰지 말고 집이서 가만 있어야 돼."
"집이 없거든요."
"그라면 괴기 배 타등가. 염전이나 대녀."
한동안 입질이 없습니다. 노인은 드리웠던 낚시를 거둬들입니다.
"물도 안하네. 물도 안해. 에이 씨발 도로 가야 쓰것다. 본 자리로."
노인은 사발이를 몰고 자리를 옮깁니다. 수문 다리 중간쯤에 앉아 낚시를 던집니다.
"점심은 어쨌능가?"
"아직 안 했습니다."
"그라먼 여그는 식당도 없고. 도초도까정 가야 할턴디. 아님 쩌그 사거리까장 가야 헌디."
"잠은 어디서 잤능가?"
"도초서요."
"그람 걸어 왔능가?"
"예."
"자식들이랑 같이 사세요?"
"농사도 없고 하께 나가서 살라고 해부렀어. 나가서 즈그들끼리 멋대로 살라고 하제."
노인이 갑자기 낚시대를 잡아챕니다.
"문절이 온다. 문절이."
비료를 싣고 가던 트럭 한 대가 노인 옆에 멈춥니다.
"많이 나깟소."
"잉."
"밥도 안자고 그라고 나끄요?"
"밥을 늦게 묵어놔서."
트럭은 농로를 따라 떠나고 노인은 다시 낚시를 던집니다. 노인의 오토바이에는 낡은 목발 두 개가 실려 있습니다.
"많이 잡으세요. 할아버지."
"조심해 가게잉."
▲ 한때 비금도의 부촌이었던 고란리의 돌담. 돌담의 원형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섬학교 |
비금도 겨울 시금치 '섬초'
비금 벌판의 논들에는 이미 시금치 씨앗이 뿌려져 있습니다. '섬초'라는 브랜드를 가진 비금도의 겨울 시금치는 명성이 자자합니다. 한 겨울에도 하우스가 아니라 노지에서 자라는 시금치는 달고 고소합니다. 시금치는 염전과 함께 비금도의 가장 큰 소득원이지요. 시금치 농사를 않는 논은 드문데 수문 근처의 논은 시금치를 심지 않았군요. 사방이 매캐한 연기로 자욱합니다. 할머니 한 분이 논바닥을 불태우는 중이십니다. 병충해를 없애려는 것일까요?
"할머니, 볏짚들을 거름으로 쓰시지 왜 태우세요?"
"거름 안 되게 할라고."
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안 되게 한다니. 무슨 뜻일까요.
"거름 되는 게 좋지 않은가요?"
"못써, 부글부글 끓어서. 나락 심어노면 끓어갔고 벼가 다 죽어부러."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볏짚은 거름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논에 시금치는 안 심으세요?"
"안 심어."
"왜요?"
"못 해내께."
벼농사보다 몇 배 소득이 큰 것을 알지만 노인은 일손이 부족하고 힘에 부처서 시금치 농사를 못 짓습니다.
"시금치는 손이 많이 가서. 겨울에 계속 캐내야 하니께 고생시럽기도 하고."
농수로를 따라 걷습니다. 나락을 베던 초로의 내외가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들일을 해도 들밥을 내올 사람이 없습니다. 내외는 나락 베던 낫을 내려놓고 승용차에 오릅니다. 집이 아니라 식당으로 가는 길처럼 보입니다. 농수로는 넓고 물은 풍성합니다. 이 먼 섬의 수로까지 서울 낚시꾼들이 붕어낚시를 오기도 한다는군요.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비금 들판을 적십니다. 시금치를 키우는 것은 절반이 물입니다. 신안의 들판은 겨울에도 죽지 않습니다. 시금치가 자라는 들판은 겨우내 푸르릅니다.
작은 풀들로 인해 들판은 생명력이 넘칩니다. 저토록 작고 사소한 것들의 은덕으로 사람의 삶도 이어집니다. 발가락 하나만 아파도 나그네는 이 가을 들판을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몸의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마저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재빠르게 자라는 손톱과 느리게 자라는 발톱, 흰 머리카락과 고질적인 기침, 똥, 오줌까지도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닌가요.
▲ 하누넘해변의 해넘이 Ⓒ신안군 |
"구경삼아 가씨오, 싸득싸득"
비금도의 마을들은 들판의 끝 산자락을 따라 형성되어 있습니다. 난개발의 침입을 덜 받은 집들은 단정합니다. 농로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라 걷기에 편합니다. 수로 옆으로 난 들길, 해변길, 염전길, 마을 안길, 고갯길, 실로 다양한 삶의 길들이 혈관처럼 섬 곳곳으로 퍼져 있습니다. 해변을 따라 송치, 외포 내포, 월포 마을이 있고, 선왕산 밑으로는 죽치, 임리, 외촌, 내촌 마을이 터 잡고 있습니다. 월포 마을 수로 변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콩을 타작중입니다. 검은콩의 작황이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오매 여그까장 걸어 왔소."
"예, 들판이 아주 넓던데요."
"그래라우. 서울 사람들은 여그가 바단 줄 알고 왔다가 놀래라우. 육지라고."
"콩 농사를 많이 지으셨어요?"
"비가 많이 와갔고 다 썩어 불고 남은 게 벨로 없어라우."
"속상하시겠어요. 아주머니."
"더 걸어 가실라우?"
"예."
"구경 삼아 갔씨오. 싸득싸득."
나그네는 싸득싸득 들길을 걷습니다. '싸득싸득' 그 말이 참 정겹습니다.
하루 종일 비금도 들길 30km를 걸었습니다. 오른 쪽 무릎이 시큰거립니다. 숙소가 있는 도초항까지는 아직도 5km가 남았습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무릎 아픈 것을 핑계로 차를 얻어 탈 생각을 합니다. 네 대째, 지나가는 차에게 손을 들었지만 누구도 세워주지 않습니다. 여러 번 거절당할수록 자꾸 자동차 앞에서 비굴해집니다. "무릎 좀 아프다고 이러면 쓰나. 걷는 사람이." 퍼뜩 정신이 되돌아옵니다. 그래 천천히 쉬엄쉬엄 가자. 급히 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차 얻어 탈 생각을 버리니 나그네는 다시 길의 주인이 됩니다. 풍경의 주인이 됩니다. 고적한 밤길은 더욱 정겹지 아니한가요.
▲ 도초도 일몰 Ⓒ신안군 |
섬학교 12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1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00 목포 도착
11:00-12:00 점심식사(목포 <초원음식점>에서 꽃게살덮밥정식)
12:00-12:30 목포 옛 골목길을 산책하며 여객터미널로 이동
13:00 목포항 출항(쾌속선)
13:50 비금항 도착
14::10-17:30 비금도 첫째날 걷기(6km)
내월리 노인정→내월 우실→하누넘해변→고서저수지
18:00-20:00 도초도 선착장 숙소(창성모텔) 도착, 저녁식사(<보광횟집>에서 자연산 광어, 농어회와 매운탕, 간재미무침 정식)
20:00 자유시간, 취침
<12월 2일(일)>
07:00 기상
08:00 아침식사(도초도<창성식당>에서 도초도식 백반)
09:30-10:30 도초도 시목해변 걷기
10:40-11:40 도초도 고란리 돌담길 걷기
12:30 비금도 가산항 출항
13:30 목포 송공항 도착
14:00 점심식사 (목포 <남경회관>에서 남도정식)
15:00 서울 향발
▲ 비금도·도초도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물통, 윈드재킷, 장갑,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버스가 섬에 들어가지 않음)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10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5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학습자료]
[비금도] 면적 44.13㎢, 목포로부터 54.5km의 지점에 위치. 동쪽으로는 암태·팔금·안좌면, 서쪽으로는 흑산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연도교가 가설된 도초면, 북쪽으로는 자은면과 이웃하고 있다. 유인도 3개와 무인도 79개로 형성되었고 해안선은 132.64㎢이다. 섬은 전체적으로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본래 1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었으나 조선시대부터 수십여 회의 방조제사업(공식기록으로만 80여 회)을 거쳐 지금의 하나의 섬을 만든 곳이다. 섬의 모양이 새가 날아오른 형상이라 해서 비금도(飛禽島)라 칭하였으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해안뿐 아니라 내륙의 산들도 절경을 자랑하는 몇 안 되는 섬 중 하나다. 동으로 성치산맥이 뻗쳐 있고 중간에 마산이 크고 작게 고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선왕산맥이 높고 낮게 이루어져 우람하며, 그 사이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으로는 황해바다에서 밀려온 모래로 형성된 명사십리 백사장이 있다. 최고점은 선왕산(255m)이다.(비금면사무소 자료)
[하누넘해변] 비금면 내월리에 위치. 길이 1km, 폭 50m의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 해변의 모습이 하트를 형상하고 있어, 일명 하트해변, 또는 사랑의 해변으로 불리고 있다. S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지로 유명. 특히 하누넘 낙조는 천연기념물 332호인 칠발도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용소(용방죽)] 용소리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천연 연못. 면적 9,118평, 깊이 3m인 이 연못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이곳에서 용이 살다가 승천하면서 꼬리질을 한 곳에서 지금도 물이 그치지 않고 치솟고 있다고 전한다. 연꽃이 가득 자라 있어 꽃이 필 무렵이면 장관을 이룬다.
[떡메산] 산이 공중에 떠있을 때 여인이 이것을 보고 "떠온다, 떠온다, 떡메산" 하고 소리쳤더니 공중의 산이 지금의 자리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의 산이다.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우실] 비금도 산 속에 쌓은 돌담이다. 우실의 어원은 '울실'이다.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농작물 피해를 막는 한편 액운도 막는 신앙적 의미로 돌담을 쌓았다. 하누넘 해수욕장 가는 길목의 내월리 내촌마을 뒤편 고개의 우실이 대표적이다.
[서산사] 작은 섬에서는 보기 힘든 고찰이다. 고려 우왕 1년(1390년) 내월리 선왕산 뒤편에 처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온다. 이후 3차례 중건된 전통사찰.
[내월리 석장승] 1955년에 세워진 대장군 장승. 1950년대 어느 해 마을의 젊은이들이 원인 모르게 사망하는 등 마을에 액이 겹치자 풍수지리에 밝은 이 마을 주민 전남균 씨가 선왕산 숭애봉의 세찬 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숭애봉과 마주 보는 장승을 세우도록 주장해서 세워진 석장승이다. 주민들은 장승이 앞산의 기를 꺾어 액을 막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밤달애놀이] 비금도의 대표적 민속. 밤달애놀이는 망자의 혼을 달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례이다. 호상을 당한 상가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밤샘을 하며 치룬다.
[도초도] 유인도4, 무인도 58개로 이루어진 도초면의 본섬. 1,593세대 3,570명 거주.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54.5km 지점에 위치. 동으로는 안좌면, 서로는 흑산도, 남쪽으로는 하의도, 그리고 북쪽은 1996년에 완공된 서남문대교로 비금도와 연도되어 있다.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다.
[시목해변] 도초면 엄목리에 있는 시목해수욕장. 3면이 산과 바다로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한 지형에 백사장이 2.2㎞이다.
[고란평야] 도초도에 있는 수다리에서 고란리까지 이어지는 평야.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다.
[고란리 돌담길] 마을 전체에 옛 돌담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돌담마을이다. 이 마을 돌담을 처음 본 필자가 신안 군수에게 건의해서 문화재로 보존할 것을 제안했다. 신안군에서 조사한 뒤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다. 섬 지방으로는 드물게 돌들만으로 쌓은 강담이 아닌 진흙을 넣어 쌓은 죽담이다. 고란리는 예부터 유난히 돌담을 잘 쌓는 마을로 유명했었다 한다. 한때는 300여 가구가 산 대촌이었다. 고란평야로 인해 유학생이 가장 많았던 부촌이고 면사무소도 이곳에 있었다.
교장 | 강제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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