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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남편은 돌아올 수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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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남편은 돌아올 수 없어도…"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1〉 진실이 밝혀질 수만 있다면

1년이 지났습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이라는 같은 병으로 죽거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린 딸을 잃었던 황유미 씨의 아버지가 작은 몸뚱이로 거대한 삼성과 세상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이후 하나 둘씩 피해자는 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삼성은 여전히 '직업상 재해가 아니다'는 입장만 되풀이합니다. 고 황유미 씨의 유족이 신청한 산업재해 인정 요구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가 조만간 나올 예정입니다.

과연 백혈병과 삼성반도체 공정 사이의 인과관계가 드러날까요? 역학조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과 <프레시안>은 다섯 번에 걸쳐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도 여전히 삼성반도체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가진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전 현장 노동자이면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남편을 둔 피해자 가족이다. 19살이었던 1995년 10월에 기흥사업장 5라인에 입사해서 2007년 3월 퇴사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 생각을 하면 놀라워서 어리벙벙해 했던 기억밖에는 없는 것 같다. 사업장의 규모와 기숙사 시설, 라인안의 환경들은 신입사원이 주눅 들기에 충분했다. 방진의복을 입고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 웨이퍼의 생김새 등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에 얼어붙어서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삼성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4년쯤 지나 신입사원의 티를 벗어가면서 삼성이라는 곳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 사내 이벤트 활동을 통해 지금의 얘들 아빠인 내 평생 반려자 황민웅 씨를 만났다. 젊은 사람이지만 매사에 사려 깊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려와 도리를 중요시 했던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정말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교제했던 시간이 철이 들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결혼을 하고 아빠를 쏙 빼닮은 아들을 낳기까지의 시간들은 참으로 가슴 벅찬 행복한 날들이었다. 세상은 우리부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부부가 된 정애정 씨(뇐쪽)와 황민웅 씨. 황민웅 씨는 2004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 사망했다. ⓒ프레시안

결혼 3주년의 계획을 세우느라 행복했던 결혼기념일 하루 전날인 2004년 10월 27일. 애들 아빠가 수원 아주대학교 응급실에 입원해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경험했다. 신랑이 볼까봐 응급실 문 밖으로 나와서 혼자 눈물을 훔쳐야 했다.

혼란스러워서 슬플 틈도 없었다. 치료하면 나을 거라고, 신랑을 위로하고 애써 태연한 척 했다. 한 달 전 부터 감기몸살을 앓는 것처럼 힘들어하고 기운이 없던 그를 환절기라서 그러려니, 감기겠거니 하고 지나쳤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는 그동안 피를 토하고 몸에 반점이 보이는 증세까지 있었으면서 혹시라도 내가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본인도 예사 감기는 아닌 것 같고 심해야 폐렴정도로 생각했단다.

위급하다는 진단을 받고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고 바로 응급실에서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항암 치료가 시작되면 백혈구 수치가 낮아지기 때문에 무균실로 입원해야한다며 바로 무균실로 입원절차를 밟았다. 이 어지러웠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 후 일주일 뒤에 나는 임신 5주 진단을 받았다. 유독 아이 욕심이 많았던 신랑과 신랑 닮은 아이를 하나 더 낳고 싶어 했던 나인데도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없었던 상황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그는 항암 치료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첫 항암 치료를 하자 아프지 않고 기운이 난다며 날 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항암 치료는 이 편안함조차도 길게 놓아두질 않았다. 합병증이 오고 심장쇼크로 생사를 넘나들면서 이미 신랑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 매 순간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 "내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고 있었고, 신랑의 오랜 간병으로 지쳐가면서도 아이 때문에 신랑이 힘을 내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안에서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프레시안
내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고 있었고, 신랑의 오랜 간병으로 지쳐가면서도 아이 때문에 신랑이 힘을 내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안에서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첫 번째 골수이식이 무산됐다. 계속 항암 치료를 하며 기다렸지만 국내에서는 골수 수여자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결국 일본에서 골수 수여자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이미 만삭이 된 배를 부여잡으며 신랑이랑 부둥켜 않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신랑은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해주었다. 내 앞에서는 담담한 모습만 보였던 그였지만 왜 그 사람이라고 공포스럽지 않았겠는가.

골수이식 수술 날을 기다리며 기쁜 마음으로 그이 곁을 떠나오면서 "예쁜 아이 낳고 올게"라고 인사를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었다. 수술로 둘째를 힘들게 낳았다. 신랑은 "안 된다"는 의사의 만료에도 외출 허락을 받고 둘째의 얼굴을 보러 잠깐 오긴 했지만 나도 정신이 없고 애들 아빠도 어떤 정신력으로 왔나 싶을 정도로 말하는 것조차도 힘들어 했던 상황이라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며칠 뒤,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전화 벨소리가 왜 그렇게 불안하던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애들 아빠가 위급하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수술로 출산한데다가 오랜 간병으로 지쳐서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던 나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신랑이 응급처치를 받으며 중환자실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때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정말 믿기 힘든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지울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지만 이조차도 내 사람의 기억이기에 지워 버릴 수가 없다.

10일 후, 내 사람은 영영 나와 아가들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대상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가슴으로 울부짖었다. 금쪽같은 아들, 딸을 남겨 놓고 떠나기 싫어 몸부림쳤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더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다.

그이와 결혼하고 3년 9개월의 기억들이다. 내 사람을 떠나보내고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산사람에게는 슬퍼하는 것조차도 사치스럽다 생각하는지, 처리해야 할일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이가 세상에 남겨 놓고 간 흔적을 정리하는 것도 내 일이었고, 그이가 선물로 남기고 간 두 아이를 위해 슬픔을 잘 다스리는 일도 내 몫이었다.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이를 악물고 앞만 보고 달려온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집단 발병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대책위가 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책위인 '반올림'을 처음 만나면서 또 다른 피해가족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 혼자만의 슬픔이라 생각하고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똑같이 경험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알고 많이 놀랐다. 이때부터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아픔들을 하나하나 다시 새겨야 했다. 또한 처음부터 발을 잘못 들여놨다고만 생각했던 반도체 현장 라인에서의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입사해 주눅 들었던 마음에, 삼성의 그 거대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면서도 문제를 제기하려는 마음을 꿈도 꾸지 못했었다. '또 하나의 가족'으로 불리면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 일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냐'는 최면에 걸려 있었다. 철저히 삼성인으로 길들여진 나와 또 다른 노동자에게, 잘못된 것이 있어도 느끼지 조차 못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혹여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은 삼성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기에 난 오늘도 애들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려 애쓰고 있다."ⓒ프레시안
이미 퇴사한 나에게도 그 영항은 너무 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생각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너무 쉽게 보이는 것들이었는데 왜 그때는 이런 엉터리 같은 모습들이 보이지 않았는지 뒤늦게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했다. 하지만 삼성에서 일하며 삼성의 돈을 받아먹고 있는 한, 무노조 경영을 하는 삼성을 상대로 유해한 작업환경이든, 노동자들을 향한 노동착취든 이것을 개인이 사회에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반올림' 의 피해자 가족으로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삼성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죽은 남편은 돌아올 수 없지만, 다만 두 보물인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억울함 없이 알려주고 싶다. 국가나 삼성이 이 죽음을 인정해줌으로써 지금도 똑같은 환경에서 노예같이 일하고 있을 현장노동자들이 좀 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쾌적한 공간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뿐이다.

남들은 삼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혹여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은 삼성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기에 난 오늘도 애들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려 애쓰고 있다.

정애정 씨는 10년 동안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라인의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고, 97년 같은 공장에 입사해 2004년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을 진단받아 항암 치료 중 사망한 고 황민웅 씨의 아내이기도 하다. 현재 그녀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반올림'의 가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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