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어린 애를 데려가다 고작 100만 원 안팎을 주면서 죽도록 부려먹더니 결국 삼성은 딸의 죽음까지 방치했습니다. 위험천만한 곳에서 일을 시켜놓고 (노동자들이 잇따라) 백혈병에 걸리고 산업안전공단이 조사를 벌인다니 기계며 시설을 다 바꿔놓고 "문제 없다"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합니다."
저 세상으로 갈 때까지도 두 뺨에 솜털이 보송보송했었다. 속초에서부터 멀리 기흥까지 취직한 딸을 올려 보낼 때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어린애들도 이름만 들으면 아는 삼성에서 일하게 된 딸이 자랑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딸이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지난해 3월 6일 끝내 숨졌다. 딸의 첫 번째 기일, 아버지는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 딸의 죽음을 기리는 사람들 앞에 섰다. (☞관련 기사 : "삼성반도체 다니다가 백혈병 얻어 죽었습니다")
"삼성에 노동조합만 있었더라도…"
그리고 폭포수처럼 그간 쌓인 한(恨)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다 삼성에 노동조합이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만약에, 만약에 노동조합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회사가 마음대로 온갖 화학물질을 사용하진 못했을 거 아닙니까."
아버지 황상기 씨의 말대로 삼성반도체에 노동조합이 있었더라면, 고(故) 황유미 씨의 죽음에 대해 회사가 감히 산업재해 신청까지 만류하진 못했을지 모른다. 딸을 잃은 아버지를 찾아와 감히 "아버님 혼자서 삼성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냐. 이길 수 있으면 한 번 해봐라"고 말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노동조합이 딸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앞으로는 딸과 같은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삼성반도체, 제2의 '죽음의 공장' 되나?
비단 유미 씨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유미 씨와 같은 라인에서 함께 일하던 이숙영 씨도 똑같은 병으로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박지연 씨도 지난해 9월 똑같은 병명을 진단 받고 투병 중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소장은 "현재 확인된 것만 12명의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사망 혹은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민주노총 등 13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든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www.cafe.daum.net/samsunglabor 또는 sharps@hanmail.net)'가 만들어진 뒤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유정옥 소장은 "급성골수성백혈병 외에도 일반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희귀질환과 피부암으로 인한 투병과 사망 제보와 더불어 유산과 불임, 자녀의 선천질환 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입은 피해 사례는 계속 쌓이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집단 사망으로 소위 '죽음의 공장'으로 불리는 한국타이어와 더불어 삼성반도체 역시 가히 '제2의 죽음의 공장'이라 할 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건강할 때는 '한 가족', 병 들면 '관계 없다'는 삼성"
삼성은 현재 공식적으로 "공장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자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현재 산업안전관리공단에서 역학조사를 벌이고 있고, 노동부도 최근에서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13개 반도체 제조업체에 대해 노동자 건강실태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날 황유미 씨의 추모제에 모인 사람들은 삼성의 사과를 촉구했다. 대책위의 김재광 씨는 "삼성은 사회공헌활동으로 어린 백혈병 환자들에게 후원금까지 지급하고 있는 기업"이지만 "정작 자기 노동자들에게는 건강하고 힘 있을 때는 한 가족이라더니 병이 드니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고 비난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삼성그룹 해고자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더 이상은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고 산재 노동자가 길거리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삼성에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무노조 경영' 방침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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