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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길에서 그들을 구하는 길은?

[기고] 기륭전자 해직 여성 노동자의 촛불

지난 5월 2일 점화된 촛불은 45일을 훌쩍 넘어 밤마다 촛불바다를 이루어 밝게 빛나고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에도 도심을 밝히고, 숱한 시민들의 가슴을 밝혔다. 21년 전 6월 그날의 최루탄(일명 '지×탄')은 현재 소화기로 바뀌었으나 물대포와 곤봉, 방패 등이 그대로 등장하여 진압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날과 달라진 게 있다면 시민들이었다. 21년 전 시민들은 '군부독재 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독재 치하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연좌농성을 했고, 저항의 '짱돌'과 화염병을 들기도 했다. 2008년 촛불시위현장의 시민들에게는 촛불 자체가 저항의 무기이며, 염원이고, 문화이자 코드가 되고 있다. 또한 물대포 직격탄 앞에 '온수'와 '샴푸'를 달라고 외치며 패러디와 해학을 비폭력저항의 무기로 삼고 있다. 이제 촛불집회는 국민의 엠티(M.T.)이자 가족소풍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 여전히 20세기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기한 단식 농성, 35m 고공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김귀옥

그런데 여전히 20세기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기한 단식 농성, 35m 고공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그저 자신의 일자리에서 계속 일하게만 해달라는 주장이다. 20여 년 전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다를 바 없는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여성들이다.

그들은 비정규직노동자로서 월 88만 원에도 못 미치는 60~70만 원의 임금일지언정 최소한도로 먹고 알뜰살뜰 생활하여 아이들을 보습학원에 보내며 아이들 자라는 걸 희망으로 삼으로 살아왔다.

그런 어느 날 2005년 7월경 기륭전자의 부품 조립 라인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 윤종희 씨(39세)는 영문도 모른 채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 기륭전자는 그녀를 비롯한 여성이 대다수인 노동자 400여 명을 해고시켰다. 그들 중 대다수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으로, 파출부로, 서비스직으로 일자리를 떠나야 했다. 2008년 6월 15일, 이제는 3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만이 회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남아 복직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월 11일 서울시청 고공농성에 이어, 5월 26일에는 구로역 35m CCTV 철탑에 여성 노동자들이 매달려 희생을 각오하며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이미 1000일을 넘김 파업으로 기력이 바닥난 윤종희 씨는 고공에 매달린 지 13일 만에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윤 씨가 실려 가고, 기륭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자 기업 측은 회유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문제이므로 이사회를 열어서 결정해야 한다고 통고했다. 그 후에는 회사 대표는 24명의 사무 관리직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복직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통고했지만, 24명 중 1명의 직원을 제외한 23명이 이들의 복직을 거부했다. 그 사이 회사 측은 이미 회사 공장을 팔았다고 한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원하면 죽음을 주마"라며 지난 11일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몇몇 여 교수들과 얘기를 나눠, 한국 여성노동사에서 유례가 없는 최장기 농성사건인 기륭전자 해직 노동자 문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 기륭전자 농성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6월 15일 정오 직전의 기륭전자 농성장에는 한여름 열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정문 수위실 옥상이 그들의 단식농성장이었다. 그 농성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위실 옥상에 깔려 있는 분단의 철책을 밟고 들어가야 한다. 기륭전자 사주에게 해직노동자들은 분단의 철책 저편에 있어야 할 위험한 존재이거나 '적'이었다.
▲ 농성장 주변 마당을 맴돌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띠었다. 해직 여성노동자들의 아이들이다. 그들에게 공장 마당은 놀이터이자, 학습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귀옥

농성장 주변 마당을 맴돌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띠었다. 해직 여성노동자들의 아이들이다. 그들에게 공장 마당은 놀이터이자, 학습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농성, 해직, 투쟁, 인권,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있다. 김학철, 이종구 화백이 방문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옆에서 아이들은 그림 공부를 한다. 또 매일 저녁 7시 기륭전자 정문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문화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 등을 부르며 음악 공부도 하고 춤을 배운다.

고공투쟁을 했던 윤종희 씨는 딸 얘기를 해 주었다. 고공투쟁을 시작하던 날 아침,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에게 고공투쟁을 하러 간다고 말해 놓고 떠났다. 큰 딸이 동생에게 엄마가 고공 농성 투쟁하는 것을 보러 가자고 하자 9살 난 동생은 엄마가 롤러코스터 같은 것을 타고 있는 줄 알고 신이 나 했다고 한다. 35m 철탑에 매달려 있는 엄마를 보면서 울기는커녕, 씩씩하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서 울었다고 했다. 9살짜리가 지난 3년간 농성장에서 단단하게 변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며 종희 씨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후 1시가 다 되자, 그들은 우리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할 수 없음을 미안해하며 간혹 물을 마셨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식하지 않고 문제를 풀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호소했다.

1024일의 농성 속에서 이미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그들의 단식을 중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단 한 가지. 예전의 그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일자리일지언정, 오늘도, 내일도 일할 수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이 죽음의 길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이며, 학교에서 마음이 멀어진 아이들에게 학교와 친구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들의 염원에는 KTX 여승무원, 이랜드 여성노동자를 포함한 수 백 만 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망이 담겨 있고,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담겨 있다.
▲비록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일자리일지언정, 오늘도, 내일도 일할 수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이 죽음의 길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이며, 학교에서 마음이 멀어진 아이들에게 학교와 친구를 돌려주는 것이다. ⓒ김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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