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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의 좀비들은 추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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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의 좀비들은 추방돼야 한다"

[기고] 최근의 표절 사태와 '베끼면서 성장한' 우리 학문 풍토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교수 시절 저지른 학문적 부정 행위를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데 이어 연구지원금을 받기 위해 사실상 같은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중복 게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김 부총리는 27일 기자간담회에서 논문 표절 의혹은 부인하고 중복 게재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사과 발언은 금세 무색해졌다. 바로 다음날인 28일 새로운 논문 중복 게재 사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같은 논문을 여러 곳에 중복 게재하는 일을 '자기 표절'이라고 부른다. 설령 김 부총리가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수용한다 해도 이제 그가 어떤 방식으로건 표절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는 벗기 힘들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와대는 28일 "김부총리의 사퇴를 거론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런 청와대의 반응에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교육과 학문에 관한 정책을 담당하는 교육부총리는 학문적 부정 행위에 대해 가장 엄격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등의 저서를 통해 서구적 모방의 글쓰기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해 왔던 한일장신대 김영민 교수(철학)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김 교수는 "강도를 저지른 학자는 부도덕한 학자일 따름이지만, 표절한 학자는 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김 교수가 학문적 부정행위를 통해 쌓은 권위를 바탕으로 공직에 취임한 김 부총리를 두둔하는 청와대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김 교수가 표절 행위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대체 누가 누구를 욕할 것인가?"라는 학문 공동체의 공범(共犯) 의식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김 교수는 이런 공범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을 '침묵의 카르텔'로 규정하며 이들이 우리의 정신문화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이런 '침묵의 카르텔'은 서구 학문과 문화를 일방적으로 베끼면서 성장한 우리의 근대 학문사에서 배태된 것이라며 이런 '식민적 타성'이 '아카데미아의 좀비'들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아카데미아의 좀비'는 권위주의에만 의지할 뿐 능력과 도덕성이 모두 결여된 이들을 가리킨다. 김 교수는 '아카데미아의 좀비'들이 후학들 역시 자신들처럼 타락하게끔 만드는 구조를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타락의 재생산 구조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김 부총리를 두둔하고 나선 청와대의 태도만 놓고 보면 그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전망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자세로 논문을 표절한 학자를 퇴출시키고 식민성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김 교수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표절 등 학술활동의 형식적 원칙을 어기는 짓은 말할 것도 없이 학자의 삶에 치명적이다. 이 짧은 글은 치명상을 입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사로 활동하는 학술 좀비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이의 글을 표절한 학자는 더 이상 학자가 아니다
  
  그것은 가령 업사이드 반칙을 했다거나 다소 위험해 보이는 태클을 했다는 종류의 지적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축구선수가 손으로 드리볼을 해서 핸드볼 선수처럼 점프슛을 했다든가 혹은 신발 속에 숨겨 들어온 칼을 꺼내 축구공을 터뜨려버렸다는 식의 치명성을 말한다. 축구선수이기를 포기한 그가 여전히 필드를 뛰고 싶다면 핸드볼 선수로 재등록을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우선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아야 한다.
  
  가령 간첩죄로 5년간 복역한 정수일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그 가치는 그의 간첩 혐의 내용과 구별될 수 있고, 또 구별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실정법에 따라 처벌을 받은 사건이 자동적으로 그의 학문적 재능과 성과에 치명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음주운전이든 은행강도든, 한 학인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곧장 그의 학자적 자질이나 성취와 내적으로 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 학인이 단지 사적 학술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교수나 관료와 같은 공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사안에 따라서는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그 책임감을 좇아 신속하고 현명한 처신이 뒤따라야 할 법도 하다.
  
  그러나 학인으로서 표절이나 논문 중복개재와 같은 학술활동의 원칙을 깨트리는 짓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허물어뜨리는 짓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 사건은 간첩죄나 음주운전, 심지어 강간이나 은행강도와 달리 곧장 그의 학자적 자질이나 성취와 내적으로 관련되며, 따라서 학인이라는 자기정체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손으로 공을 드리블해서 점프슛하는 축구선수는 서투른 축구선수가 아니다. 그는 이미 '축구선수'가 아닌 것이다.
  
  학술활동을 사익의 도구로 삼는 이들, 우리 정신문화 타락의 주범
  
  표절, 혹은 여타 학술형식적 원칙을 어기는 행위를 하는 순간, 그는 이미 학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학술공동체나 관련되는 공중(公衆)이 더 이상 그를 학자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 이 당연지사를 시시때때로 재론해야 하는 것 자체가 성가시고 서글픈 노릇이다.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된 선례가 있지만, 서구에서는 학인의 학술논문이 아닌 저널리스트의 칼럼이나 기사의 경우에도 인용 표시가 없이 임의로 따온 몇몇 문장들 탓에 해당 집필자가 사직을 당하고 사주(社主)가 공식사과를 하는 판국이다. 그러나 이미 끊임없이 고발되고 비판되었건만, 표절 등으로 학술형식적 원칙을 어긴 치들이 번연히 대학의 안팎에서 전래의 권위와 위세를 누리며 온존하고 있다. '대체 누가 누구를 욕할 것인가?'라는 투의, 침묵의 카르텔이 우리 정신문화계의 타락과 권위주의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 이제야말로 단호하고 슬기롭게 곪은 살을 도려내고 속빈 뼈를 교체해야 한다.
  
  물론 일차적인 문제와 그 책임은 관련 당사자의 학술적 도덕성으로 돌아간다. 게임의 룰(rule)을 준수하지 않으려면, 비상한 노력으로 그 룰을 바꾸려는 혁신에 투신하든지, 아니면 응당 다른 게임의 장으로 옮아가야 한다. 학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 '주이상스(쾌락)'의 측면이 있고, 학인이라면 그 쾌락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키는 데에서 일차적인 보람이 얻는 법이다. 그러나 언죽번죽 편법을 일삼으며, 학술활동을 사익을 위한 도구적 합리성의 절차로 악용하는 짓으로는 이미 학문도 학인도 아니다. 이것은 학인들마저 자본주의적, 처세술적, 그리고 단자적 개인으로 전락한 세태를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아울러, 학인 공동체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붕괴되었고, 그 사이 자본주의적-관료적 체계가 학인 개개인의 실존을 돌이킬 수 없이 잠식했다는 증표다.
  
  서구학문 '베끼기'로 성장한 우리 학문, '표절'에 둔감한 학문의 '좀비' 낳아
  
  시야를 넓히면, 개인의 학문적 염결성과 도덕성 이전에 우리의 근현대 학문사의 성격과 지형이 논의의 배경으로 잡힌다. 우리의 근대화가 그 본질에서 서구화이며 일종의 베끼기와 따라잡기였듯이, 우리의 현대 학문과 그 글쓰기 역시 제도적-구조적으로 모방과 표절의 유혹을 변화나 성장의 동기와 혼동해 온 것이다. 나 역시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를 낸 후 줄기차게 지적해 왔지만, 그런 뜻에서 우리 학문의 탈식민성과 자생성은 학술적 글쓰기의 형식에 대한 각성과 새로운 글쓰기의 창의적 실험에서 출발해도 좋다.
  
  우리 학계의 악마적 독소는 그 체질화-구조화된 식민적 타성이 내부적으로는 학술적 권위주의와 결탁해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본뜨고 베끼고 짜깁고 눈치보면서 입신한 '아카데미아의 좀비(서아프리카의 부두 족이 숭배하는 뱀의 신에서 유래된 말로서 절반쯤 죽어 있고, 절반쯤 살아 있는 괴물을 뜻한다. 처세술과 요령에만 의존하는 무사안일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인다)'들은 그 자신의 체질과 처신을 바꿀 도덕성도 의욕도 능력도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좀비들이 새끼 좀비들을 역시 구조적, 제도적으로 재생산하면서 우리의 후학들을 체계적으로 타락시키고 그 능력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종주국의 그늘은 학계를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갖은 제도와 관행 속에 상흔(傷痕)처럼 남아 있다. 아도르노(T.W. Adorno)의 유명한 말처럼, 상흔은 요컨대 반복강박적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제도와 정신문화적 관행 속에 완강히 온존하고 있는 식민성의 상흔을 단호하고 현명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한, 식민성과 권위주의로 무장한 좀비들의 반복강박적 타성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내용이 좀 부실하거나 엉성한 논문을 쓰는 학자는 부실하거나 엉성한 학자다. 그러나 표절한 논문의 저자는 이미 학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글은 논문도 무엇도 아니다. 실로 그것은 똥 닦아 버린 호박잎보다 못한 것이다. 그는 단번에 퇴출되어야 하며, 영원히 돌아올 수 없어야 한다. 우리의 정신문화적 세계 전체를 혼동과 타락의 사슬로 엮어놓은 식민성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대체 언제나 제 글을 쓰고 제 말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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