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고3 교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학교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그래도 학교는 돌아간다. 교사는 월급을 받아야 하고, 정부는 걷은 세금을 써야 하며, 부모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고, 아이들은 학교가 아니면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만신창이가 된 거대한 짐승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이들은 핏기 없는 얼굴로 시간을 때우거나 엎드려 자거나, 온갖 가지 일탈로써 학교 체제를 들이받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늘날 교육 현실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었고,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우리 교육을 바라보자는 성찰의 의지였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교육 희망'이라는 거짓 언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교육 불가능'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진 사회적 발언에 대한 반향은 크지 않았다.
다들 잘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나는 되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이 현실을 잘 알고 있는지를. 당신과 당신 자식이 겪은 것 말고, 신문 지상에 날마다 등장하는 익숙한 사실들 말고, 이 아이들의 속마음을, 그 마음의 지옥이 일구어낸 현실들을 정말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를.
나는 '교육 불가능'을 익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 김순천의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동녘 펴냄)를 권한다.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에 사는 고등학생 아이로부터 전라남도 담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학교 다니는 공고생 아이까지, 내신 상위 1.3퍼센트의 모범생으로부터 보호 시설을 전전하는 '비행 소녀'까지 열네 명을 인터뷰하고, 아홉 어른들(교육학 교수, 현장 교사, 정신과 의사, 학부모)의 고백을 담은 책이다.
공부
▲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김순천 지음, 동녘 펴냄). ⓒ동녘 |
흔히 말하는 노홍철 스타일 있잖아요. 좀 특이하고, 사람들이 보면 저 사람 뭔가 싶어서 관심을 끌 정도의 옷이요. 보다 보면 정말 예뻐요. 예를 들어 남자가 부츠를 신고 가슴이 파인 옷을 입는다던가 하는. 그런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야 할 것 같아요. 애들은 옷 사러 동대문에 자주 가는데, 전 거기는 잘 안 가고 인터넷을 뒤지거나 종로에 있는 구제 시장에 가요. 남이 입던 걸 어떻게 입느냐고 하지만, 청바지 같은 건 입다 보면 옷 주인의 색깔 같은 게 묻어나거든요. 물이 조금씩 빠지고 옷이 조금씩 뒤틀리고. 저는 그런 옷을 찾아다녀요. 구제 시장만의 매력이죠.
아이는 시장에 가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한다. 시장 사람들의 마음이 푹신하다고, 사람을 잘 믿고 각박한 게 없다고 한다. 다른 한 소녀는 피어싱에 대해 "몸에 반짝이는 게 달려 있으니까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표현들이 좋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을 아이들로 살아있게 하는, 그러나 이 땅에서만큼은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자 일탈의 원흉으로 치부되는 바로 그 '정직한 에로스'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오직 공부, 공부뿐이다.
공부가 대체 뭘까. 태권도 4단으로 꼬맹이들에게 발차기 가르치는 일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는 경찰이 되고 싶어 하지만,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벌써 좌절했다. 10퍼센트만 바라보고 하는 수업은 어차피 남의 이야기니, 판타지 소설에 빠져든다. '주인공이 힘이 세져서 나라 구하는' 이야기들뿐인, 그게 그거인 줄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다만, 다른 세계가 펼쳐져서 좋고, 시간이 잘 가서 좋은 것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마음이 불편하단다. 결국,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적응하는 인간이 살아남는 것이다. 어른들은 흔히 '요즘 아이들, 참 생각 없다'고 말한다. 따져보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정신병동
아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다만 돈은 많았으면 좋겠단다. 전교 1등하는 아이가 담배 피우며 노는 아이를 보며 자신도 그리 될 것 같은 불안감에 허우적거리다가 시험을 망치기도 한다. 이 무슨 과대망상인지.
"공부하고 싶니?" "하기 싫어요." "공부 말고 뭐하고 싶어?"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해요. 대학가야니깐." "좋은 대학 가서 뭐하려고?" "그래야 돈을 벌죠." 정신과 의사가 초등학교 3학년과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이 책을 뜯어 읽다보면 온 나라가 정신병동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여러 차례 책을 덮어야 했다. 정신병적 징후에 대한 보고는 계속 이어진다.
어느 강남 학부모의 이야기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하기에 선행 학습을 안 시키고 중학교에 보냈더니, 어느 날 학교에서 울면서 돌아왔단다. 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했는데, 친구들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개념으로 답을 하더란다. 버벅거리는 아이에게 어느 친구가 '너 왜 그렇게 망가졌냐'고 말하더란다.
밤에 학원 뒷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공부시키는 학원에 아이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새벽 1시가 되어도 숙제가 덜 끝나면 집에 안 보내주는 학원, 틀린 개수대로 때리는 학원들이 떼돈을 번단다. 상담 받으러 와서 한 시간 동안 상담실에 가만히 있다가 가는 아이가 있다. 그 시간 동안 쉬는 것이다. 그 아이는 얼마 뒤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생 아이의 돈을 빼앗았단다.
스트레스에 찌든 아이들은 엄청난 욕을 해댄다. 왕따 당하던 아이가 전학을 가면 "왕따에 재수 없는 애"라고 인터넷에 올려준다. 왕따 당하는 아이가 몸을 스치면 "아, 더러워" 하며 몸에 닿은 부분을 턴다. "너 같은 애는 죽어야 해, 넌 쓰레기야!" 이런 쪽지를 가방 안에 넣어두기도 한다. 어느 대안 학교의 교장 선생은 말한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고. 자기 보호 본능만 남아, 포용심 없고 증오와 원망만 가득한 아이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괴롭히는 아이와 괴롭힘 당하는 아이 중에 누가 더 깊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일까? 괴롭히는 아이일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많이 망가져 있을까? 공부 잘하는 아이일 것이다. 부잣집 아이가 괴로울까, 가난한 집 아이가 괴로울까. 부잣집 아이가 더 괴로울 것이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생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친구는 학원에서 새벽 1시에 집에 돌아온다. 주말은 황금 타임이라고 학원에서 진종일 공부를 시킨다. 자기보다 성적이 잘 나온 아이에게 느낀 수치심과 열등감 때문에 그 아이와 보름 동안 말을 안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어릴 때 잠시 캐나다에서 공부했는데, 함께 간 어머니가 강제로 단어를 외우게 해서 짜증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악몽은 아니지만 잠을 편히 못 잔다고, 일어나도 몸이 뻐근하고 우울할 때가 많다고 한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럴 때마다 앞으로 2년이나 남았으니 이겨내는 법을 찾아야지, 생각한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불 끄고 닷새 동안 푹 자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
주변 친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고요. 저도 막 쫓기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런 친구들이 좋은 게, 저를 막 닦달하는 것 같아요. 말로는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그런 게 저한테 도움이 많이 돼요. 경쟁자이면서 친구죠.
아이는 대안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무서웠다고 한다. 저 애들은 어떤 자신감을 갖고 학교를 안 다니나?' 싶어서 말이다. 봉사 활동 다녀온 것도, 무슨 행사에 다녀온 것도, 책 한 권 읽는 것도, 이런 사소한 일도 평가받고 점수로 환산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이라고 느낀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할까. 예상하는 대로다.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돼"라고. 아이가 '너무 힘들다, 다시 어릴 때 다녀온 캐나다로 다시 나가고 싶다'고 하면, '여기서 하나 거기서 하나, 본인이 안 하면 어디든 똑같다'고 말한다. 아이의 부모도, 그리고 세상 많은 부모들도, 다만 아이가 마음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믿고 있다.
아이는 결국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 놀라운 포용력이라니. 아이가 인터뷰 마지막에 남긴 말에는 여운이 있다.
1년간 부모님한테 너무 죄송했고요, 담임선생님한테도 죄송했습니다. 앞으론 공부 열심히 해야겠죠?
학원에서 새벽 1시에 들어오는 아이들 중에 47.6퍼센트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한다. 서울시 초·중·고생 네 명 중 한 명은 행동 장애와 불안 장애이며, 100명 중 열여섯 명은 전문가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이 나라를 정신병동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누구인가.
학부모
부모 탓을 하겠지만, 부모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이 땅 부모들의 마음은 이 한 마디에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 고생시키지 말자는 개똥철학으로 애들 망치는 게 아닐까, 발을 들여놓자니 두렵고, 빼자니 불안하다"는 것.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부모의 고민은 아이의 상처가 아니라 '돈'이다. 뭐든지, 다 돈이란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미 국가의 '기간 산업'이 된 사교육 시장은 매달 세금 징수원처럼 돈을 걷어간다. 수학 한 과목에 30만 원이고, 과학도 30만 원, 무용하는 아이가 공연을 하는데 작품비 500만 원에 의상비 150만 원이 들어간단다. 부모의 절규는 이어진다. 노후 계획은 꿈도 못 꾸고 적금 통장 하나도 없다고, 학원비 좀 줄여볼라고 아침에는 큰 아이 종합 영어, 점심에는 둘째 아이 수학, 저녁에는 초등학생 막내 종이접기를 가르친단다. 이 나이에 지금 뭐하나 싶지만, 남편 직장이 어떻게 될지 몰라 더 불안하고, 그래서 하루 세끼 밥 먹고 이 집에서 편히 잘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 한다.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세례를 앞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밤 아홉 시에 초등학생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걸 두고 야단을 치니까, 한 어머니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신부님, 신부님 되려고 가톨릭 대학교 들어가려면 거기 경쟁률이 얼만지 아세요?, 몇 등급이라야 거기 갈 수 있는지 아세요?"라고.
그래서 그렇게 공부를 시킨단다. 초등학교 수학 한 학기동안 배우는 단원이 7~8개인데, 학원에서는 그걸 2~3번 수업으로 끝내버린다는 거다. 엄청난 양의 숙제가 남는다. 결국 12시, 1시까지 숙제를 해야 한다. 영어도 그런 식으로 공부를 시킨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아이가 나중에 과학고로 갈지, 외고로 갈지 몰라서 그렇단다.
인권
청소년 인권 문제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통해 제도화의 문턱을 막 넘으려는 중이다. 그런데, 이 문턱을 넘어서더라도 다시 맞닥뜨려야 할 상황을 미리 보여주는, 기분 나쁜 사례들이 있다. 나는 아직 이런 경우를 보진 못했는데, 도회지 학교에서는 이런 경우가 적지 않은가 보다.
매를 들지 않고, 쿠폰으로 아이들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교사들이 있다. 야자를 빠지지 않으면 쿠폰 한 장을 준다. 다섯 장을 모으면 야자를 한 번 빠질 수 있는 권리를 준다. 그러다가 야자 안 하고 도망치면 쿠폰을 모두 회수해 버린다. 지각하는 아이에게는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서 있게 하는 벌칙을 준다. 50분 수업으로 지친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 10분은 목숨과도 같다. 그래서 아이들은 절대 지각을 하지 않는다. '애들을 똑똑하게 괴롭힐 줄 아는 선생님'이라고 아이는 날카롭게 진단한다.
그런데, 이건 약과다. 장기 자랑으로 벌을 대신하는 선생님이 있다. 교사는 공연이 있다고 메신저로 쪽지를 보내고, 약속한 시간에 교사들이 모이면, 벌 대신 장기 자랑을 선택한 아이들은 교사들 앞에서 가진 온갖 재주를 선보인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이는 비트박스도 하고, 랩도 하고, 노래도 한다. 오늘은 발라드, 내일은 트로트 이런 식으로 돌려 막는다. 그림 잘 그리는 아이는 선생님 초상화를 그려주고, 운동을 잘 하는 아이는 텀블링 묘기를 선보인다. 요리를 배우는 아이는 음식을 해서 갖다 바친다. 인천 학익고등학교 학생의 증언이다.
옆 반 학생 중에 누가 어제 새우튀김을 해 왔다던데 너는 뭐 없냐? 그러면 아, 제가 내일 회 떠오겠습니다, 그래요. 걔는 회 전문이거든요. 이런 일이 되풀이돼요. 다른 반 선생님이 학생 앞에서 또 그런 얘길 하거든요. 누가 회 떠왔다던데 넌 뭐 없냐? 그럼 걔가 또 그러죠. 랍스터 해 오겠습니다. 자꾸 불어나는 거예요. 음식을 모아놓고 식탁에서 같이 드시기도 해요. 누구네가 뭘 참 잘하네, 그러면서.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차라리 아이들을 때리는 게 이보다는 더 교육적이라고 본다.
학교가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 중에 상·벌점제가 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다. 아이들은 학교와 상·벌점제를 놓고 두뇌 게임을 벌인다. 아이들이 벌점을 만회하기 위해 벌이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 친구한테 지갑을 잃어버린 척하라 해 놓고 자신이 학생부에 지갑을 갖고 간다. 급식소에서 주웠다면서.
그러면 지갑 잃어버린 학생은 찾아가라는 방송이 나오고, 얼마 뒤 원 주인인 친구가 교무실에 나타난다.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묻는 학생부 교사에게 친구는 급식소에서 잃어버렸다고 답한다. 알리바이가 맞아 떨어지니, 아이는 상점을 받고, 벌점을 만회한다. 이 건으로 모범상을 타면 학교생활기록부에도 등재가 되니, 시도해봄직한 일인 것이다.
부끄러운 교사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바깥으로 돈 소녀가 있다. 겨우 마음을 잡고 중3때 공고 자동차과에 진학하려는 소녀에게 담임교사는 '그 성적으로는 안 되니, 통신과를 가라, 그러면 자동차과로 전과가 가능하고, 자동차 동아리에 들어도 된다. 그러니 거길 가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통신과를 갔는데, 막상 가보니 전과도 안 되고, 자동차 동아리도 없었단다.
그런데 그 교사는 소녀를 두고 '걔는 통신과라도 간 걸 다행으로 생각할 거야'라고 말했다 한다. 그렇게 공고 통신과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너희가 정말 이걸 하고 싶으면 대학 가서 깊이 파라'고 말하고, 학과 공부에 적응하지 못해 마케팅을 공부하면 어떨까 싶어 찾아간 상담실에서는 '그냥 네 위치에서 열심히 해라' 그런다.
가난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거의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무시와 냉대,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지도, 대충 때우는 수업, 아이들은 학교에서 3년간 잔소리와 욕만 먹고 졸업하는 것이다. '선생님도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데, 사회에서 누가 우릴 따뜻하게 대해줄까.' 아이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좌절의 선이 그어진다.
아이의 절규
지은이 김순천이 청소년 쉼터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가출한 아이들에게 인생 연표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학교의 기억이 모조리 빠져있다고 한다. 일부러 빼려고 빼는 게 아니라, 학교 일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가족의 이름을 잊어 버린 아이도 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아마 폭주족 아이들과 어울린 것 같고, 쉼터에서 배운 사진 찍기와 학교 바깥에서 사귄 친구들이 삶의 전부인 아이다. 돈 없이 무작정 집을 나왔을 때, 전화하면 달려 나오는 친구들이 있다. 재판을 받게 되니 자기들도 일하느라 바쁠 텐데 우르르 같이 가주겠다고 해서 눈물이 났다는 아이다. 질문에 대해 예, 아니오 단답형으로 답하던 아이가 인터뷰가 무르익었을 때, 이렇게 절규한다. 이게 잊히지 않아 옮겨 본다.
솔직히 저희가……잘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잘못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저희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왔어요. (울음) 나라에서 비행청소년이다, 나쁜 애들이다, 폭주족이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폭주를 하는 애들도 나름대로 관심을 받고 싶고, 자기를 봐주니까 그게 좋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으니까. 잘못을 해봤자 저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하는 거고……. 솔직히 말하면 저희랑 정치인이랑 비교하면 정치인이 더 나쁘지 않아요. 저희는 그냥 몇 천원 빼앗은 건데, 정치인은 몇 억씩 빼돌리는 거잖아요.
어른들이 이 비행청소년에게 묻는 말이 있다. '넌 커서 뭐가 될래?'라고. 그때마다 소녀는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커서 된 게 그거예요?'라고.
이 책에서 어른들은 아이들로부터 시종일관 공격당한다. 우리를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제발 우리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고 외친다.
대안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한 아이의 이야기다. 심리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치킨을 시켜먹을 일이 있었다. 바로 옆에 컵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콜라를 따라 마셨는데, 그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결이는 컵 모양을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아기자기한 컵을 좋아하네"라고. 갑자기 부아가 난 아이가 한마디 했다고 한다. "단순하게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아무 컵이나 옆에 있어서 쓴 건데,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짜증났다고 한다.
움찔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심리검사, 상담, 격리, 보호, 치료, 아이들은 시스템 속에서 늘 이렇게 재단당해 왔을 것이다. 살아있는 만남이 아닌 기계적인 만남과 치유가 아이들을 더욱 깊이 병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는 것, 우리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 그리고 이 참혹한 세상을 바꾸어 달라는 것',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비투스, 경쟁의 물적 기반
물론 이 현실을 가능케 했던 물질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 안정적인 지위를 대물림해줄 가능성이 더욱 옅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 위기의 반영인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정신병동 같은 현실은 많은 부분 한국 같은 사회에 고유한, 뚜렷한 역사적 기원을 가진 하나의 사회 문화적 '습속'이라고 본다. 우리의 노력으로 깨부술 수 있는, 깨부수어야만 하는, 다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에 치유하기가 난망해 보이는, 그런 '아비투스'일 뿐인 것이다.
'교육 불가능'은 대세가 되었고, 지금과 같은 최악의 관행으로 똘똘 뭉친 학교 교육의 몰락은 필연적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키운 시절은 내가 아는 한 유사 이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각성을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 대가를 언젠가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며, 이미 치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교는 굴러간다. 교사는 월급을 받아야 하고, 정부는 걷은 세금을 써야 하며, 부모는 달리 아이를 맡길 데가 없고, 아이들은 학교가 아니면 달리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회는 학교를 향해 '교육만이 희망'이라고, '선생님 힘내세요!' '학교야 힘내라!' 따위 소리들을 한다. 허망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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