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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충격, 일본은 '좀비의 나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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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충격, 일본은 '좀비의 나라'로 변했다!

[변방의 사색] 후지타 쇼조의 <전체주의의 시대 경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이 흘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프레시안>에 접속해서 새로운 기사가 떴는지 찾아본다. 오늘은 교토 대학 원자로실험연구소 연구원 고이데 히로아키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이런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도쿄전력도, 우리나라 원자력 마피아들도, 일단 좀 잠잠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필부조차도 그 사이 얻은 기초적인 지식에 비춰 봐도 쉬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어느새 이번 사고를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반열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것을 봐도 그렇다. 연료봉이 녹아내리고 임계 상태와 비임계 상태가 오락가락하면서 원자로는 조금씩 나빠져 갈 것이 분명하다. 과연 도쿄전력의 바람대로 대여섯 달 안에 방사선량을 감소시키고, 원자로를 냉각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을 맞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체르노빌 전투>를 보면서 전율하게 되는 대목이 있다. 15분간 머물러도 치사량을 넘어서는 끔찍한 방사능이 넘실대는 발전소 건물 옥상에서 인부들이 삽으로 방사능 쓰레기를 한 삽 두 삽 떠서 퍼 내리고는 서둘러 도망치듯 임무 교대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후쿠시마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조만간 암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서. 누가 할 것인가? 도쿄전력 사장님이?

후지타 쇼조가 꿰뚫어보고 있었던 사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상태만큼이나 궁금한 것은 일본 사회의 흐름이다. 얼마 전 놀라운 기사를 보았다. 도쿄 도지사를 십 수년째 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작자, 우리에게는 극우의 망령으로 여겨지는 이 인간이 이번 대지진 사태에 대해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어이없는 망언을 했는데, 그럼에도 이번 도지사 선거에서 유유히 3선에 성공했다는 기사였다.

내가 잘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정말 놀랐다. 내 짐작과는 전연 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평화운동가 요시모토 유키오는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현재는 지진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제 국민을 '신민'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한 정보는 거의 제대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하나가 되자'고 몰아붙인다고 한다. 고이데의 인터뷰를 진행한 유학생 전은이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상업 광고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넘쳐난다고 전한다.

▲ <전체주의의 시대 경험>(후지타 쇼조 지음, 이순애 엮음, 이홍락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랫동안 사숙해 온 사상가 후지타 쇼조(1926~2003년)를 생각한다. <전체주의의 시대 경험>(이순애 엮음, 이홍락 옮김, 창비 펴냄)을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은 그가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와 관련되는 이 일련의 흐름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는 현대 일본 사회를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로 설명하고 있다.

지진과 화산이 빈번한 일본에 원자력 발전소가 50기가 넘는 것도 결국은 에너지의 대량 소비와 관련되는 "불편함의 원천을 일소하려는 욕구"로 해석할 수 있다. 원자 폭탄을 얻어맞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954년 3월, 비키니 섬의 수소 폭탄 실험으로 일본인 어부가 사망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날,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청년 정치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모두가 미적댈 때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의 책임"이라며 원자력 발전 연구를 밀어붙이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런 황당한 행동도 후지타 쇼조가 비판하듯,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가족 국가 체제에서 몽매한 '어린 아이' 같은 신민들을 보살피는 용기 있는 정치가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이 위험천만한 원자력 발전 체제를 "세계 최고 기술력" 운운하며 끝끝내 고집하는 행태는 또한 후지타 쇼조가 현대 일본의 정신이라고 명명한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된, 자기애로서의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깊이와 우울하면서도 강인한 힘에 반해 글을 쓰다가 막힐 때면 자주 그의 글을 들춰보곤 했다. 그는 천황제와 전향 문제, 파시즘을 연구하면서 1950년대 이후 일본 지식인 사회의 저항적 흐름을 이끌어온 사상가이자 활동가였다. 한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재일 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을 대학 강단으로 이끌어준 것도 그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 이후에는 비관론자가 되어 갔다. 그는 고도성장 사회 이후의 일본 사회가 "정해진 규격에 따라 생산되는 제품에 불과한, 극히 무의지적인" 좀비들의 집단으로 변해가는 것에 깊이 절망했다. 일부러 대학 강단을 떠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면서 이단자를 자처했으며, 재일 조선인 문제를 깊이 고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우울한 고백을 던지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비판 담론의 사회적 역할을 상당 부분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대신 그는 "고래 뱃속의 이물질"과 같은, 사회 전체의 궤도를 수정하는 힘은 될 수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저항과 이탈로써 체제를 "들이받는" 불량스러운 존재들을 예찬했다. 그리고 그는, 한 사회의 재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몰락의 경험"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몰락이란 "사물의 기초에 도달하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후쿠시마 사고에 이렇게 집중하는 것도 몰락의 경험을 통해서만 거듭남을 기약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원자력 마피아'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엉터리없는 사기극을 좀 살살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다만, 나는 몰락을 응시하는 정신을 기다린다. 방사능은 우리가 만나게 될 이 문명의 실체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될 것이다.

오늘(21일) 아침, 후쿠시마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모유에서 방사능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여름이 다가오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할 때 몰려올 패닉 상태를 생각하니 아득하다. 과연 이 사회는 몰락의 경험을 통해 재생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몰락'과 '재생', 이 화두를 붙잡으며 나는 후지타 쇼조의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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