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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제 저항을 넘어 창조로!

[촛불의 소리]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촛불을…

우리집에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7월 5일. 제가 두 번째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순간입니다. 서울과 원주에서 우리 집에 감자 캐 주러 온 네 분의 일꾼들과 함께 어머니까지 참석하여 촛불집회를 한 것입니다.

6월 10일. 광화문 거리를 새벽까지 샅샅이 훑고 다닌 것이 첫번째 참석이었습니다. 두번째가 바로 7월 5일 우리집에서입니다. '참석'이라기보다 '개최'가 되겠습니다.

두 달을 넘기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분석과 칭송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위문화의 탄생이라고만 할 수 없는 어떤 변혁의 단초가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슴 벅찬 순간들은 매일매일 연출되고 있습니다.

촛불을 찬양하건 비난하건 똑 같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의 자기 생각과 주장에 촛불현상을 꿰어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김지하 선생의 글도 그렇습니다. 늘 후천개벽의 징후만 좇고 있는 분입니다. 월드컵 이후 저는 김지하 선생님을 두 번 만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같은 얘기입니다.

보수 세력들의 좌익빨갱이 재방송과 다르지 않습니다. 촛불현상에서 자기 주장의 근거만 확대해서 본다는 점에서는.

어느 교수는 자신이 번역하고 저술한 <제국기계>와 <다중> 이론이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집단지성과 다중지성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진보학자나 사회운동가는 프랑스의 6.8 혁명을 빗대고 제2의 6.10항쟁을 거론합니다.

저는 지금의 촛불을 믿지 않습니다.

'웹2.0 의 소통방식'이나 '네트워크로 엮인 독립개체의 등장', '거리 권력의 탄생'에도 저는 열광하지 않습니다. 열광하기에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탄생되던 2002년.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세력교체'라 하면서 열광을 했던 논객들이 여전히 지금의 촛불현상의 분석과 이론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에 선거참관인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 있어서 뉴스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가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인간 노무현'은 믿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믿지 않는다고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졸저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에 실려 있음)

지금의 촛불을 믿지 않는 이유는 제가 집에서 촛불을 밝힌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종국에는 자기자신의 근원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보는 때문입니다. 권력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해체가 전제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촛불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의 변화, 또는 권력 담당자의 교체가 아니라 권력의 해체라고 하는 것은 정치권력 뿐 아니라 개인 속에 있는 모든 유형의 권력마저도 깡그리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 그 자체의 속성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권력자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착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시민의 직접민주주의가 발현되었다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이라고 촛불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시민단체 논객은 서울광장에 '시민권력'이 탄생했다며 정부권력과 별개의 권력이 서울에 공존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개념을 거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촛불의 지도부라 하는 분들의 생각과 지향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역사상 등장한 시민권력의 행로를 떠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혁명, 3.1만세운동, 4.19 혁명, 광주항쟁, 6.10 항쟁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멀리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중국의 5.4 운동이나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 필리핀의 반 마르코스 혁명 등등.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관점, 생태의 관점, 사랑의 관점, 포용과 상생의 관점에서 보면 바뀐 권력은 이전 권력과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더 큽니다.

권력의 지위에 오른 4,19와 6.10의 주역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됩니다. 권력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한 개인을 권력의 속성에 포박합니다.

모든 유형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계신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계승자라 할 수 있습니다.
큰 자유는 자기 생각과 주장에 묶이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평등은 온 세상 만물이 하나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 가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정국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촛불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촛불은 이명박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주된 자기 동력으로 삼습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권력을 꿈꾸고 있습니다. 스스로 권력의 포로가 되고자 합니다. '저항폭력'의 이름으로, 또는 '대항폭력'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거리에서의 말과 행동의 폭력성은 스스로를 권력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미국 미친 소. 너나 쳐 드셈" 이라는 여고생들의 팻말을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하면서 통쾌해 하는 풍경입니다.
보수 기독교 광신도들이 온 세상을 '예수천국과 불신지옥'으로 양분 하듯이 촛불들도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상대편(현 정부, 한나라당, 조중동, 극우단체들, 보수 종교인 등)을 뜯어 고치고 물리쳐야 할 악의 세력으로 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침없는 조롱과 업신여김, 비아냥과 헐뜯기와 깎아 내리기는 결국 자기 자신 속에 그런 기운을 채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주체가 되기에는 거리가 멉니다.

진보신당에서 생중계하는 <칼라티브이> 진행자 진중권 선생은 민주노동당이 분당할 때 "가만 놔 두면 저절로 망할 집단"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인데 촛불정국의 떠오르는 논객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두루 활보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노컷뉴스, 미디어스, 엠비시 일부 내용들은 분명 기사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촛불에 대한 부추김과 확대재생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 몰려 있는 조중동의 끔찍한 보도들은 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이제야말로 <저항을 넘어선 창조의 길>이 촛불이 가야 할 방향이 되어야 한다.

지금 7.5 대행진 이후 촛불의 행로를 놓고 고심이 많습니다. 그 고심은 어떤 의제로 전환 할지에 대한 것이며 어떤식으로 촛불을 켤지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의제를 전환 하는 것이 과연 해법이 될까요?

저는 이제야 말로 <저항을 넘어 선 창조의 길>이 촛불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를 향한 요구와 주장은 이제 됐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요구와 주장을 펴 나가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남과 주변환경을 향한 요구와 저항은 마치 평화와 행복이 환경조건과 상대편의 행동 여부에 달려 있다는 식의 오해를 갖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를 전면에 내세워 촛불의 행로를 거론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촛불의 재협상이라는 요구조건이 이뤄졌느냐와는 무관하게 거리의 싸움에서는 이겼습니다.

그런데도 재협상과 정부책임자 처벌이나 구속자 석방, 또는 한반도 대운하 포기와 공공부문 민영화 금지 등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촛불이 이런 것에 시간과 정력을 계속해서 쏟을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소를 음식으로만 보는 시선을 거두고 생명을 가진 가축으로 봐야 하며 내 밥상에 오르는 반(反) 생명적 음식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야 하고 이명박 식의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자기 혁신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자가용 버리기, 대형차 경차로 바꾸기, 재생에너지 쓰기는 기본입니다. 농촌 살리기와 유기농(자연농) 식품 먹기, 초중고 정식 교과목에 명상과 수련을 포함시키기, 음식 안 남기기 등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촛불을 켜야 합니다.

채식하기, 귀농하기, 더울 때는 땀 흘리고 추울 때는 떨며 살기, 포용하고 사랑하기, 어떤 조건에서도 늘 평화롭기, 이런 것이 이 시대 최고의 진보일 것입니다. 비판과 저항, 상대를 이기기 위한 투쟁은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시적인 수단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농민들이 주관하는 촛불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땅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화학농법을 하면서 도시적 소비생활을 하는 농민들이 많습니다. 도시민들의 타락한 입맛을 좇아 끝임없이 스스로가 파괴 될 때까지 파괴적인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미친 소 대신 한우 판촉에 열을 올리는 지자체가 많습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지자체 지원속에 계속 지어지는 한우 축사들을 보고 있자면 이것은 가축들이 사는 집이 아니고 쇠고기 공장에 불과합니다.

논 한 가운데에 덜렁 세워지는 축사의 한우들은 사료만 먹고 자랍니다. 갇혀 살고 파란 풀을 단 한입도 먹지 못하고 일생을 마칩니다. 고기 생산 공장인 셈이죠. 촛불이 결과적으로 이런 우리 현실은 온존시키는 쪽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농민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지금까지의 반 생명적 농사를 중단하고 생명의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종류의 폭력도 학생들에게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언사로 사물을 설명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공장에서 지급 받은 면장갑을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빨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파업은 이러한 큰 세상으로 가는 과도기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자기 집에서 촛불을 켜고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권위적 군림을 포기하겠다고 촛불앞에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광장에서 촛불을 켜서 촛불다짐 발표대회를 여는 것입니다.
직장단위, 가족단위, 정당단위, 기타의 모임단위로 각자의 촛불실천을 발표하고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정치적 요구을 내세우는 촛불집회도 열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요구를 집약하는 것이지요.

촛불들의 새로운 실천 제안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진심으로 비는 기도회를 제안 할 수 있고 북한 굶주리는 동포를 위한 보름 동안 성미 모으기 운동도 제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창조의 촛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창조'의 핵심은 <개인적 대각성의 사회화와 사회변혁의 일상생활화>입니다.

프랑스 6.8 혁명을 관 속에 넣고 마지막 못질을 했다고 호언하는 사르코지가 지금의 프랑스 대통령입니다. 3년 전 프랑스의 주변부 삶을 사는 이민 청소년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정치혁명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비판과 저항을 출발점으로 민초들은 일어납니다.
비판과 저항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 가려면 끝임없이 '적'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비판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손아무개 선생은 '촛불은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면서 계속 촛불집회를 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구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승리'가 이명박의 신자유주의적 지향과 뭐가 다를까요? '승리'가 목표가 되면 패배의 순간을 준비하는 짓과 다를바 없습니다.

창조의 삶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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