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압록강 위에 멈춰 있던 다리가 마침내 열렸다. 그리고 개통된 지 불과 아흐레 만인 10월 24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 다리를 건너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10월 15일 신압록강대교 개통,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76주년, 그리고 다음 달 18~19일 선전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세 사건이 짧은 시간 안에 맞물리고 있다.
이번 방문은 시점도, 장소도, 형식도 예사롭지 않다. 김정은은 베이징이 아니라 단둥을 찾았고, 시진핑 국가주석 대신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전국정협 주석인 왕후닝이 그를 영접했다. 중국 외교를 총괄하는 왕이 외교부장도 동행했다.
김정은은 왕후닝과 함께 항미원조기념관을 방문해 중국인민지원군 전사자들에게 헌화하고 묵념했다. 헌화 화환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을 영원히 기억한다'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다.
이어 단둥의 자동차 공장을 시찰한 뒤 신압록강대교를 통해 귀환했다.
이러한 동선은 이번 방중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항미원조기념관에서 과거의 혈맹을 확인하고, 자동차 공장에서 미래의 경제협력을 모색했으며, 신압록강대교를 통해 양국의 새로운 연결을 상징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왕후닝의 영접이다.
왕후닝은 단순한 의전 담당자가 아니다.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시대를 관통하며 중국공산당의 통치이념과 국가전략을 설계해 온 핵심 인물이다. 현재는 중국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통일전선과 정치협상 분야를 이끌고 있다.
그가 김정은을 맞이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시진핑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서도 정치국 상무위원이라는 최고위급 인사를 통해 북한 지도자에 대한 예우를 갖춘 것이다. 동시에 이번 방문을 별도의 정상회담보다는 역사적 연대와 실질적 협력을 확인하는 정치적 행사로 구성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후닝의 이론적 배경과 정치적 위상은 북중관계를 사회주의 체제 간 연대라는 차원에서 부각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실제로 왕후닝은 회담에서 "공동의 사회주의 사업을 유대로 북중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또 "신압록강대교 개통을 계기로 인적 왕래와 경제무역 협력을 확대하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해 양국의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수호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다. 북중관계가 역사적 혈맹이라는 상징적 관계를 넘어 경제협력과 전략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실질적 관계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압록강대교는 그 변화의 가장 구체적인 상징이다. 2014년 완공되고도 12년 동안 개통되지 못했던 다리가 이제야 연결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다. 북중관계의 정치적 환경과 경제협력의 조건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교량 개통이 곧 대북제재의 해제나 대규모 경제협력의 전면 재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국이 협력 확대를 위한 물리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김정은의 외교적 선택지도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북한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돌파하기 위한 절박한 출구였다. 그러나 이제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복원하고 있다. 북러 밀착이 중국과의 관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양국 사이에서 외교적 공간을 넓히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한반도의 안정과 영향력 유지를 중시하는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북한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해 왔다. 북한은 이 차이를 활용해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협상력을 높이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방중은 북미 정상회담의 전주곡인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선전 APEC 정상회의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북중 간 전략적 소통이 향후 북미대화와 무관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번 방문을 곧바로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조율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공개된 중국 측 발표에서 북미대화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강조된 것은 북중의 전통적 우호, 사회주의 연대, 경제협력, 전략적 소통이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미국과 대화할 것인가보다 어떤 조건에서 대화할 것인가이다. 북한은 이미 핵보유를 국가적 지위의 핵심 요소로 제도화했고, 과거와 같은 일방적 비핵화 협상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전략적 후방이 강화될수록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 할 압박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방중은 북미대화의 직접적인 전주곡이라기보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 앞서 자신의 전략적 입지를 재정비하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동시에 중국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자신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향후 미중 정상외교에서 북한 문제를 둘러싼 전략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의 위치다.
북한은 중국과의 경제적 연결을 강화하고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고 있다. 미국 역시 북한 문제를 미중관계와 동북아 전략의 큰 틀에서 다룰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정작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은 어떤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
북중관계가 강화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한국의 외교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북 간 대화 채널이 사실상 단절된 상황에서 북중러의 전략적 연계와 미중 간 협상이 동시에 진행된다면, 한국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질 수 있다.
이제 한국 외교는 북미대화의 재개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 북한과의 인도주의적 협력과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독자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분리된 과제로 보지 않되, 모든 협력을 비핵화의 선결조건에 묶어두는 경직된 접근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20여 년 전 한국교통연구원에서 동북아 교통협력과 접경지역을 연구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수없이 오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가 꿈꾸었던 것은 단순히 남과 북을 잇는 다리가 아니었다.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고, 분단의 경계가 협력의 통로로 바뀌는 새로운 동북아의 미래였다.
그런데 12년 만에 열린 신압록강대교를 오늘 김정은이 건넜다. 중국과 북한은 그 다리를 통해 새로운 협력의 길을 열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 흐름의 바깥에 서 있다.
다리가 열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리를 통해 누가 오가고, 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가이다.
김정은의 전격 방중이 북미대화의 전주곡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의 판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자신의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고 있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북한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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