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 유학 온 지 만 1년이 넘어간다. 여러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늘 느끼는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어느 국가든 안고 있는 문제와 해결책이 꽤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란과 페루 친구들에 따르면 그곳 역시 한국처럼 수도권에 비해 지역 보건의료 인력이 부족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문 진료나 비대면 진료를 대안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둘째, 반대로 내가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문제의식과 해법이 다른 국가의 맥락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건강 도시'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며 더욱 확실하게 와 닿았다. 흔히 큰 병원이 밀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한 도시에 사는 것이 건강에 유리하기 때문에, 도시와 건강을 함께 살펴보는 주제가 덜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담당 교수는 바로 그러한 고정관념이 도시의 건강 불평등 문제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중저소득 국가의 도시에는 일자리가 많아 거대한 인구가 몰리지만, 부족한 위생시설, 높은 인구 밀도에 따른 감염병 위험, 높은 주거비가 오히려 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이 연구는 중저소득 국가 도시의 일차의료 서비스에 대한 기존 연구들을 종합하여 분석하였다. (☞논문 바로가기: 중저소득 국가 도시의 1차 진료 서비스 제공에 영향을 미치는 공급과 수요 측면의 요인)
지난 수십년 간 공중 보건과 모자 보건 프로그램, 감염병 통제 노력, 경제 수준 향상 덕분에 중저소득 국가의 건강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일회성 개입으로 해결되지 않는 심혈관 질환, 암, 정신 질환과 같은 비전염성 질환 앞에서는 여전히 취약하다. 비전염성 질환은 백신 지원과 같은 단기적 처방이 아닌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며, 이는 튼튼한 1차의료 체계가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의료진이 충분하고, 병원비가 감당 가능한 수준이며, 환자들이 받는 진료 서비스의 질이 좋은 '제대로 된 시스템'이 굴러가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중저소득 국가의 인구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들은 농촌보다 의료 접근성이 좋을까?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연구에 따르면 중저소득 국가의 도시 거주자들은, 설령 가장 열악한 슬럼가에 살더라도 보통 도보 15~30분 거리에 병원이나 진료소를 두고 있다. 하지만 '병원이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곧 '필요한 진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연구진은 겉보기에 풍부해 보이는 도시의 의료 인프라 이면에 숨겨진 '접근성, 비용, 그리고 질'의 모순을 다음 세 가지로 짚어낸다.
첫째, 과연 그 시설들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가? 케냐, 마다가스카르 등 10개 국가에서 의료 제공자 한 명이 하루에 보는 외래 환자 수는 중앙값 기준 15명 이하로, 시설이나 인력 자체가 부족해서 진료를 못 받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면허(자격)가 없는 인력이 운영하는 병원의 비율이 높거나, 여러 진료과가 함께 있는 종합병원이 아닌 의사나 간호사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영세한 진료소가 대부분인 국가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설들이 이용자의 필요를 충분하게 충족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노숙인이나 국제 이주민은 조사에서 배제되어 있어, 가장 취약한 계층의 실제 현실은 이보다 더욱 열악할 것이다.
둘째, 병원비가 감당 가능한 수준인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기 위해 드는 비용은 이용자가 내는 진료비, 교통비, 그리고 병가를 내기 어려워 발생하는 소득의 손실까지 포함된다.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약값이었는데, 진료비 관련 총 지출 중 약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67~100%였다. 기본적인 음식과 주거비, 교통비에 대부분의 임금을 소비하는 가난한 도시 거주민은 장기 복용이 필요한 약값을 감당할 수 없다. 대부분 공공 진료소를 이용할 때에도, 진료 자체는 무료인 경우가 많았지만 약값은 별도였다.
셋째, 의료의 질은 어떠한가? 기존 연구들은 일관되게 도시 1차의료의 평균적인 질이 낮다고 평가한다. 세네갈과 케냐를 포함한 9개 국가의 연구를 보면, 의료진이 모의 환자를 상대로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치료를 제공한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더 많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필수적인 의약품이 구비되지 않았거나, 처방되지 않은 항생제를 판매하거나 사용하는 경우, 불필요한 항생제를 과다 처방하는 사례가 광범위하게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체계 속에서 아픈 사람들은 언제, 누구에게 진료 받을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중저소득 국가 도시 빈민가의 거주민들도 저렴한 비용, 짧은 이동 거리, 차별하지 않고 친절한 의료진, 그리고 높은 의료 수준을 원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단순히 가까운 곳을 가기보다 비용, 시간, 병원의 평판 등을 저울질하며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가령 선호하는 병원에 가기 위해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더 멀리 있는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 빈민가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비용과 시간이라는 제약 때문에 의료의 질을 포기한 채 빠르고 저렴한 진료소를 택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질 낮은 진료를 선택하는 것은 '어떤 병원이 좋은지 몰라서'가 아니라, 당장의 생계를 짊어진 채 다른 대안을 선택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인프라 속에 가려진 가난한 이들의 고립은 비단 외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건강한 도시를 향한 논의는 누구나 두려움 없이 좋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묻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 서지정보
Lilford R, Daniels B, McPake B et al. (2026) Supply-side and Demand-side Factors Affecting Allopathic Primary Care Service Delivery in Low-income and Middle-income Country Cities, The Lancet Global Health, 13, e942-e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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