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자주통일평화연대·전국민중행동·불평등한한미SOFA개정국민연대 주최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반전·반기지운동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하와이, 필리핀, 괌, 오키나와와 한국의 군산·소성리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미군기지와 군사훈련이 지역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이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나눴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견제를 내세워 동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에서 군사기지를 확대하고 다국적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현장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와이의 림팩, 필리핀의 발리카탄, 괌의 군사기지화, 오키나와의 미군·자위대 기지 확대는 한국의 평택·군산 미군기지와 소성리 사드기지 문제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자주통일평화연대는 이번 토론회의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매주 한 차례, 총 8회에 걸쳐 각 지역의 현실과 저항을 소개한다. 하와이의 미군 토지 임대와 반환운동을 시작으로 필리핀, 괌, 오키나와, 군산, 소성리를 차례로 살펴보고, 이어 미국 내 반제·반전·반기지 연대운동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및 동아시아 군사기지화를 짚어 본다.
서로 다른 지역의 이야기를 통해, 동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의 군사기지와 군사훈련이 어떻게 하나의 전략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에 맞선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투쟁을 연결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로 필리핀 신애국동맹 바얀(BAYAN)의 몽 팔라티노 사무총장이 발표한 내용을 소개한다. 아래 주요 내용이다.
식민지에서 신식민지로
필리핀 민중은 1896년 아시아 최초의 반식민 항쟁을 벌였다. 미국은 친구를 자처하며 도착했고, 1898년 우리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장면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했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이어진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미국은 학살, 강제 토벌 작전을 벌였고, 강제로 물을 들이붓는 '워터 큐어(water cure)' 고문도 자행했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첫 번째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공화국이 되었지만,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지배는 계속됐다. 필리핀은 식민지에서 신식민지로 전환된 것이다. 수비크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는 이러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징했다. 특히 클라크기지는 미국 본토 밖에 있는 미군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미군기지를 몰아내다
미국은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지원했다.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으로 마르코스 일가가 축출된 뒤, 1987년 헌법에는 외국군 기지를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필리핀 민중은 1991년 9월 16일 상원의 역사적인 표결을 통해 미군기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수비크와 클라크는 상업 중심지와 공항 거점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떠난 뒤에도 그들이 남긴 유독성 폐기물과 환경오염 문제는 고스란히 남았다.
미군 병력과 기지의 귀환
그러나 이후 역대 정부들은 미군의 귀환을 추진했다. 1999년 방문군협정(VFA)은 미군이 '단기' 또는 '순환' 방문이라는 명목으로 필리핀에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9·11 이후 필리핀은 미국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의 '제2전선'이 됐고, 이를 계기로 미군 주둔 확대와 군사훈련, 필리핀 남부의 기지화가 정당화됐다.
2014년에는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이 체결됐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은 최소 5곳의 합의된 지역에 군사시설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 이름은 '방위협력확대협정'이지만, 그 실체는 군사기지 협정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미국은 EDCA 시설 사용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협정이 종료되면 해달 시설이 필리핀에 넘겨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10년이 지난 뒤 EDCA는 자동으로 갱신됐다.
바이든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인 2024년, 미국은 더 신속한 정보 공유를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필리핀군 총사령부인 캠프 아기날도, 즉 미국의 펜타곤과 같은 곳 안에 이른바 '연합조정센터'를 건설했다.
미국에 더욱 밀착한 마르코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는 2022년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 4년 동안 그는 EDCA 부지 네 곳을 추가했다. 현재 EDCA 부지는 모두 아홉 곳이다.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는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접근을 확대하고 있다. 남부 민다나오에서 남중국해와 가까운 팔라완, 대만과 가까운 북부 바타네스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군사시설을 건설하도록 허용했다.
필리핀과 미국 당국은 미군이 필리핀에 기지를 두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양국 정부는 새로운 미군 시설 건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다바오의 신규 급유기지, 30mm 기관포탄을 장전·조립·포장하는 탄약 생산공장, 수비크만 광역청 자유항 안에 미 해군이 사용할 대규모의 온도·습도 조절 창고와 정비시설을 건설하는 계획 등이 추진되고 있다.
군사훈련도 연중 계속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미국의 군사동맹국에서 점점 더 많은 병력이 필리핀으로 들어오고 있다. 올해 실시된 발리카탄(Balikatan, '어깨를 나란히') 훈련에서는 실사격 훈련과 전쟁 시뮬레이션이 진행됐으며, 민간공항에서 토마호크 미사일까지 발사했다.
당국은 미군 주둔 확대가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가 재난구호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미사일을 발사하는 군사훈련은 구호물자 배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 지역사회는 전쟁 놀이터이자 미사일 체계의 시험장, 전쟁 수행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고 있다. 군사훈련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고 긴장이 고조된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일상이 훼손된다. 훈련 기간에는 해상 항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농민들은 자신의 농지에 접근하지 못한다. 수영을 비롯한 관광 활동도 제한된다. 어민들에게는 다이너마이트 어업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군은 군함을 동원해 폭격 훈련을 벌인다.
미군은 군사장비를 민다나오에서 루손으로 운송했다. 클라크에서 카가얀으로 미사일을 옮긴 뒤 바타네스에 배치했고, 이제는 레이테에서 누에바에시하를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까지 발사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는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하나의 거대한 전진작전기지처럼 이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미군의 주둔 확대는 심각한 인권침해와도 연결돼 있다. 미국은 필리핀 정부의 대반란 작전을 위해 무기를 공급하고 드론 감시와 정보를 제공한다.
필리핀에서는 토지 없는 농민의 현실과 봉건적 억압, 만연한 부패, 외세의 지배, 극심한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공산주의 무장혁명 가운데 하나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필리핀 정부가 활동가와 인권옹호자, 혁명가, 그리고 모든 반제국주의 세력을 범죄자와 테러리스트로 매도할 수 있도록 테러 관련 법률의 제정을 강요해왔다.
무기 제조 거점으로 변하는 필리핀
2024년 필리핀·일본·미국은 3국 협정을 체결했고, 첫 번째 사업으로 루손 경제회랑을 추진했다. 경제 발전을 위한 고속도로처럼 포장됐지만,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것은 경제 발전보다 군사력 증강에 가까웠다.
올해 초 필리핀은 미국과 핵심광물 협정을 체결했다. 4월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실리카(Pax Silica) 연합에 가입했다. 비옥한 농지 1,600헥타르가 이른바 '경제안보구역'에 할당될 예정이다.
미국은 여기에 외교적 면책특권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 협정은 우리의 광물자원에 대한 수탈을 심화하고, 농민과 원주민을 삶의 터전에서 내몰며, 저임금 노동을 착취하고, 물과 에너지 공급을 고갈시킬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지역이 미국 군수산업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필리핀은 미국의 적대국들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될 위험까지 떠안게 된다. 이것은 개발로 포장된 무기 제조 거점이며, 전쟁을 위한 생산기지다.
필리핀 당국자들은 이 협정이 국가의 산업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군사적 목적을 거듭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이컵 S. 헬버그 미 국무부 차관은 팍스 실리카 경제안보구역을 군사 물류작전을 의미하는 '전진배치 산업기지'라고 불렀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이 기지가 "맨해튼 면적의 약 3분의 1, 즉 타임스스퀘어에서 맨해튼섬 최남단까지의 전체 지역과 맞먹는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중국을 상대로 한 대리전
필리핀과 미국 정부는 미군기지 확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중국 위협'을 부풀리고 있다. 실제로 필리핀에 병력과 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초강대국은 미국이다. 그런데도 필리핀 민중은 중국이 필리핀을 위협하고 있으며 곧 침공할 것처럼 묘사하는 온라인 콘텐츠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그들은 루손 북부에 여러 EDCA 부지를 배치했다. 대만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중국 본토까지 사정권에 두는 타이폰 미사일을 민간공항에 배치했다. 일본 역시 필리핀 북부에서 88식 미사일을 시험했다.
이것은 억제가 아니다. 오히려 충돌을 격화시키는 행위다. 미국은 중국과 벌이는 대리전에서 필리핀을 총알받이로 이용하려 한다. 필리핀이 스스로 방위력을 현대화하고 국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과거의 식민지배국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식민주의적 서사를 다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다고 해서 필리핀 민중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리핀이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의 최전선으로 끌려갈 위험만 커진다.
중국과의 해양 분쟁은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 분쟁을 필리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미군 EDCA 기지로 만드는 구실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투쟁은 계속된다
우리는 미국과 필리핀의 꼭두각시 동맹세력이 퍼뜨리는 악의적인 서사와 허위정보에 맞서 반제국주의 교육과 정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팍스 실리카가 환경에 더 큰 피해를 주고, 지역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며, 우리의 주권을 훼손하고, 진정한 발전을 위한 산업 건설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또한 EDCA와 미국의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민중을 단결시키기 위해 지역운동과 연대체를 건설하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른바 '제1도련선'을 따라 군사기지와 무기를 배치하고 있다. 필리핀은 그 도련선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다. 한국 역시 그 군사전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미국이 지배와 전쟁을 위한 도련선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저항과 연대의 도련선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곳곳에서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는 민중을 서로 연결해야 한다.
우리의 연대는 국경을 넘어야 한다. 우리의 저항 역시 국경을 넘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진정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와 평등의 원칙 위에 세워진 미래를 위해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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