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NPB) 통산 최대 안타 기록(3085 안타)을 보유한 전설적인 재일동포 타자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씨가 9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장훈은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야구 영웅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로 시작된 비극적인 양국 과거사를 고려하면 이례적인 경우다. 적지 않은 재일동포가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차별받고 한국에서는 '반쪽바리'로 조롱받았던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일본 귀화를 거부한 위대한 재일동포 장훈의 탄생
1980년 5월 28일 장훈은 3000안타를 기록했다. 기념비적인 안타 기록에 한국은 열광했다. 이는 단지 장훈이 그라운드에서 이룩한 업적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재일동포 2세라는, 온갖 차별과 역경 속에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대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한국인의 긍지를 일깨운 그의 쾌거를 높이 평가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그에게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했다. 최 대통령은 "장 선수가 실력과 기술##로 3000안타 기록을 세운 것도 매운 장한 일이지만, 그보다 한국 사람으로서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한국의 국민정신을 드높이고 있는 데 대해 깊이 치하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장훈은 1980년 초에 요미우리에서 롯데로 이적하면서 "모국 팬에 보답하기 위해 귀화를 단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초 그는 일본 귀화를 추진했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부진했던 1979년 시즌을 마치고 머리를 식힐 겸 한국에 체류할 때 자신을 열렬히 환영해 준 모국 팬들 모습을 보고 귀화를 포기했다.
오른손 장애를 딛고 일어선 장훈은 근성과 노력의 화신
장훈은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큰 화상을 입어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굽었다. 오른손 세 손가락으로 겨우 야구 배트를 쥘 수 있는 상태였다.
오른손 장애로 스윙을 제대로 할 수 없던 장훈은 특제 배트를 만들어 야구를 해야 했다. 배트의 아랫부분을 얇게 깎아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훈은 이 특제 배트로 끊임없는 연습을 한 끝에 비로소 강한 스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 강화를 위해 매일 정규 훈련이 끝난 뒤 오른손으로만 600개 씩의 공을 치는 살인적인 훈련을 감행했다.
하지만 장훈은 오른손 장애 사실을 비밀로 삼았다. 장애 때문에 타격에 한계가 있다는 건 결과로 승부해야 하는 프로야구 무대에서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 야구인 중 대부분은 장훈의 오른손 장애 사실을 잘 몰랐다.
장훈은 1981년 은퇴 후, 뛰어난 타격 기술과 선구안으로 현역 시절 '타격의 신'으로 불렸던 가와카미 데츠하루와 만났다. 장훈이 이 자리에서 자신의 손을 대선배인 가와카미에게 보여줬다. 가와카미는 장훈의 오른손을 보고 "이런 손으로 어떻게 (야구를 했나)"라며 눈물을 쏟았다.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은 근면과 근성이 바탕이 된 전국민적 '도료쿠(노력)'에서 시작됐다. 이 와중에 장훈과 같이 피나는 노력으로 역경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들은 일본에서 이른바 '도료쿠의 화신'으로 추앙 받았다.
히로시마 곱창구이와 원폭 피해자 장훈
장훈과 관련해 특히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부분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희생이다. 장훈의 어머니 박순분 씨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날 장훈과 그의 둘째 누나를 온몸으로 감싸며 자식의 생명을 지켜줬다.
장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흰 옷을 입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 등 뒤로 유리 파편이 박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초등학생으로 근로봉사를 하고 있던 장훈의 큰 누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박순분 씨는 장훈을 비롯한 자녀들의 생계를 위해 곱창 등을 파는 호르몬구이 집을 열었다. 어머니는 서툰 일본어로 암시장에서 고기 재료를 구해와 밤낮없이 일하며 자식들을 돌봤다.
호르몬구이는 사실 히로시마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음식이다. 일제 시기 히로시마에 건너 왔던 조선인들은 미쓰비시 중공업과 같은 군수업체에 강제징용 되거나 히로시마 항만에서 잡역부로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장훈의 아버지처럼 고물상을 하는 재일조선인들도 많았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인이 꺼려했던 도축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먹지 않는 소나 돼지고기 내장을 식재료로 썼다. 그래서 히로시마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곱창구이 같은 음식을 즐겨 먹었다.
일본 피단협 "장훈이 세상을 떠나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지난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의 미마키 도시유키 대표위원은 장훈이 세상을 떠난 뒤 <요미우리 신문>을 통해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장훈은 사람을 사로잡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더 많이 피폭의 경험을 (세상에) 전하며 핵폐기를 호소해 주시길 바랐다. (그가)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실제로 장훈은 20년 전부터 미디어 등을 통해 자신의 피폭 체험이나 평화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밝혀 일본 사회에서 야구 레전드가 아닌 평화주의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특히 지난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원폭을 투하한 당사국 대통령이 찾아 준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큰 위안을 얻었다고도 했다.
장훈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년 건강검진을 하기 전에 혹시 피폭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감기에 걸리거나 기침만 해도 원폭 후유증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원폭 후유증에 대한 공포는 장훈이 지난 2010년 <장훈의 또 다른 인생: 피폭자로서, 인간으로서>라는 책을 썼던 이유이기도 했다.
만년에 일본 귀화를 선택한 장훈
장훈은 지난 2024년 <산케이신문>을 통해 "몇 년 전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밝혀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한 때 (한국의) 어떤 정권이 재일교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일본에) 건너갔다 거나, 남의 나라에서 편하게 잘 살고 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강제 징용으로 끌려왔거나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본에) 왔다. 재일교포 1세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힘들게 살았는지 모르는 것 아닌가 하는 서운함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20년 넘게 KBO(한국야구위원회) 특보로 일했지만 한국시리즈나 올스타전에는 단 한번도 초청받지 못했다. 은혜도 의리도 잊어버린 것이 한국의 나쁜 점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한국 국적을 지켜온 야구 영웅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한국 사회의 배타성과 재일교포 정책에 대한 부재를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장훈은 당시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그는 "관동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유언비어 때문에 희생됐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의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은 한국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기간 동안 한국이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귀화 결정은 자녀와 손주 세대를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손들에게 일본 사회에서 영주권자(외국인)가 아닌 일본인으로 살도록 법적 안정성을 물려주기 위한 결정이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의 일본 귀화는 겉으로 보면 한국과 일본의 야구 영웅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두 국가의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장훈의 현실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국적은 변경했어도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재일교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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