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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이들에게

[오찬호의 틈새] 일베를 식별하면, 일베는 사라질까?

강연 후 단체사진을 찍을 때가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양한 동작을 요구한다. 예전에는 치즈나 김치라고 말하라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손 모양이 많다. 브이는 고전적인 동작이고, 검지와 엄지를 교차시키는 하트도 식상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요구를 하는데,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제대로 하는지도 걱정이고, 혹시나 오해받을까 봐 두렵다. 손가락 모양을 식별하며 난리 치지 않았던가.

집게손은 남성 혐오를 상징한다며 으르렁으르렁 거리더니 기업의 사과까지 이끌어 낸 사례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트 모양을 처음 흉내 낼 때 나도 오해를 받았다. 당연히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적당히 구부려 접촉하는 전통적 하트를 생각했는데, 다들 한 손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부랴부랴 따라 했는데 그게 집게손 비슷했나 보다. 누가 그 사진을 보고 시비를 걸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하트 모양을 만들려고 노력했을 뿐이니 웃고 넘겼다. 그 동작에 다른 뜻이 있다고? 내 머릿속엔 없는 정보다.

한국 사회와 식별 문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믿는다. 하나가 일곱여덟 번째쯤에 연결된 걸 목격하고 뱉는 말이 아니라, 하나만으로도 열을 해석한다. 틀렸음을 알아도 후퇴하지 않는다. 앞으로 조심하자는 다짐이 없다. 어떻게든 우기다가, 전혀 다른 하나를 억지로 연결해 이를 두 번째, 세 번째 증거라며 우기며 말한다. "봤지? 내가 그랬지?"

모두가 그러는 것도 아니다. 궁예가 사람 죽일 때 사용한 관심법 수준의 예지력은 권력관계에 따라 철저히 위에서 아래를 향해서만 순항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은 여성을 간단히 정의하고, 하나를 트집 잡아 폭력을 정당화한다. 개신교를 기본값이라 여기는 이들은 이슬람교를 종교로 취급하지 않기 위해 이 수법을 애용한다. 엘리트들은 대학 이름 하나로 모든 걸 식별한다. 명문대 나온 사람들은 다르다는 과장된 식별이 만연하니 한쪽은 대학 이름만으로 근면, 인성, 판단력까지 보증받지만 한쪽은 작은 파편 하나로 무능, 게으름 심지어 도덕성도 문제가 있다며 소급 처리된다.

반대 방향도 있지만 사회적 힘으로 작동할 정도의 에너지는 아니다. 상사가 신입의 지각 한 번을 보고, 안 봐도 안다고 슬쩍 말하는 것과 신입이 상사의 행동이 꼰대라며 SNS에 익명으로 올리는 것의 무게감은 같지 않다. 부모는 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자녀를 몰아가지만 자녀가 그러하면 이렇게 말한다. "네가 뭘 알아!"

그래서 식별 당하는 쪽에서 알아서 적응한다. 여성들은 자기 관리를 하며 꼬투리 잡힐 일을 사전에 차단한다. 학력차별의 피해자들은 따져봤자 조롱만 돌아온다는 걸 잘 알기에 알아서 스스로 인간의 자격을 낮춘다. 공부 못하니 이런 일 해도 된다, 공부 잘했으면 이런 대우받았겠냐면서 말이다. 이주자들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살려고 심하게 노력한다. 일부러 김치 잘 먹는 척하고 일부러 식당에서 이모라고 한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인종적 특성이라는 소릴 들으니, 일단 착하게 산다. 착함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게 기본권이 아니지만 그걸 따질 힘이 없다. 식별되면 끝장이기에, 어떻게든 그 레이더에 걸리지 않으려고 알아서 조심한다.

식별 문화는 수직적 서열화가 상시적인 사회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대부분의 악성 민원도 학부모를, 소비자를 위쪽의 영역에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에 의해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를 보고 열을 생각해, 사소한 교육현장의 에피소드를 확대 해석한다. 훈육이 단번에 아동학대로, 동년배끼리의 일상적 의견 충돌이 교육적 중재라는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학교폭력으로 돌변하는 이유다. 서비스 쪽은 말할 것도 없다. 대화 한 마디를 가지고 열을 파악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며 소리를 친다.

서사보다 라벨로 설명하는 식별 문화가 만연하면, 본인 스스로가 잘 식별되고 싶어 한다.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회에선 서울대 보낸 엄마, 두 아이 명문대 보낸 부모라는 표현도 넘쳐난다. 누가 묻지도 않아도 자신이 의사 배우자라는 사실을 밝힌다. 직장인 정도로 소개하면 될 상황에 여의도 금융권 정규직, 광화문 대기업 본사라는 수식어를 굳이 포함시킨다. 노동자라도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할 때든, 나를 설명할 때든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복잡성을 견디지 못한다. 학교 이름을 먼저 말하고, 어느 지역에 사는지 어떤 아파트 거주자인지를 공개한다. 자가 여부까지 말이다. 성격조차 MBTI의 몇 가지 대문자 조합으로 천명한다. 정치권의 진영논리는 식별 그 자체다. 이쪽인지 저쪽인지를 실시간으로 묻고 답한다.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사람의 성격을 단조롭게 해석하는 MBTI와 다를 바 없다. 유희적이냐 적대적이냐만 다를 뿐이다. 정치 스펙트럼이 넓으니 이해도 넓게 하자고? 그게 통하면 진영이겠는가.

▲조국 전 대표가 지난 5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조국 페이스북 갈무리

일베의 위험성을 설마 모르겠는가

식별의 역사는 슬프다. 우생학, 골상학은 사람을 많이 죽였다. 관상학은 지금도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곧잘 활용된다. 관상은 거짓말 안 한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저 문장을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이들은 흔하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문화는 끔찍했다. 무슨 단체에 가입하면 보리쌀 한 되 준다고 해서 덥석 받았다고 학살당한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연좌제는 부모 보면 다 안다, 조부모 보면 다 안다는 논리다. 사돈의 팔촌을 보고도 나를 판단하는데, 누가 논리적 모순을 조목조목 따지겠는가. 무조건 숨어야만 산다. 제주 4.3 이후, 육지로 떠난 제주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생 써오던 말투를 숨겼다. 사소한 어휘에도 섬에서 왔냐고 추궁을 당하니, 몇 겹으로 감춰야만 했다.

빨갱이 취급받았던 학생 운동권은 절멸해도 마땅한 존재니 식별은 당연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전경들은 대학생의 가방을 탈탈 털고 했다. 불온서적 아니냐면서 잡아갔다. 막스 베버의 막스(Max)를 카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Mark)로 알고 의심받았다는 일화는 6.25 전쟁 당시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먼저 외친다. 나 빨갱이 아니라고. 나 운동권 아니라고. 나 노조 소속 아니라고. 이 문법이 확장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때는 표정도 필요하다. 나도 그들이 싫다는 표정 말이다.

사투리 논쟁이 이런 식별의 유산과 무관하겠는가. 일베에 질색하는 사람들은 나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의도가 무엇이든 그 말투 일베 아니냐는 식별이 일방적으로 흘렀고 지목되면 일베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걸 부인할 수 없다. 그것도 사투리라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생 사용해오던 말에 불과한 것이 근거가 되는 건 대단히 슬픈 일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안다. 일베도 분명 있을 거다. 일베스럽게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서 사투리라며 넘어갈 거라고 믿는 악질적인 인간이 왜 없겠는가. 많을 거다. 하지만 일베가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 사소한 언어 구사마저 신경을 써야 한다며 얼마나 황당한가. "와 이리 맛있노"는 처음과 끝이 다 사투리라 괜찮지만, "왜 이리 맛있노" 는 비문이라며 의심하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는 게 어렵다.

머리 한 번 긁적거리고, 말투 하나로 열을 볼 필요는 없었다고 인정하면 되지만 그러지 않는다. 기어코 평소에 사투리가 거슬렸던 자신을 드러낸다. 일베로 오인될 수 있으니 사투리 쓰는 사람이 신경 쓰면 되지 않냐는 말까지 등장한다. 표준어 사용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알아서 잘 하라는 것인가. 이런 현상이 과하다고 하자, 역시나 경상도스럽다는 기괴한 추임새가 붙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자신감 없이 가능하겠는가.

높은 명중률로 일베가 식별된다고 치자. 그럼 일베 정체성은 사라지는가? 그 말 쓰지 말라고 하면, 다른 말이 탄생할 거다. 그럼 그때 또 추적하고, 식별하고, 실수해도 사안이 심각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건가? 이들은 간과한다. 이런 강박이 일베가 만연하고 있음을 알리려는 처음의 물음조차 힘을 잃게 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절대로 척 보면 알 수 없다

곳곳에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강력한 효과를 노린다. 페미냐, 일베냐, 좌파냐, 극우냐의 사회적 의미는 다르겠지만 문법은 같다. 식별하고 조롱한다. 조롱은 또 식별의 연료로 사용된다. 몇 바퀴 돌면 멸칭이 등장하고, 그 멸칭을 공유하는 자들은 하나로도 열을 안다며 키득거린다. 논란이 된들 '아니면 말고'라는 알리바이에 숨는다. 지금은 자신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며 동조자들을 모은다. 이들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무시한다. 예측이 틀리면 침묵하고, 맞으면 예언자 행세를 한다.

그래서 유튜브 정치평론 세계는 종교가 됐다. 교주의 지침대로 신자들은 질주한다. 이 문제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렇다고 치자. 우려스러운 건 언론사에서도 '돈이 된다'는 이유로 유사한 플랫폼을 만들어 혐오를 생산하고 승인하고 지지자들끼리의 신뢰를 보증한다. 등장하는 기자들은 전혀 기자답지 않다. 기자는 하나 다음에 둘을 취재하고, 셋을 의심하고, 넷을 확인하는 직업인데 그들은 하나면 충분하다며 열을 떠든다. 누군가의 글 한 줄, 말 한마디만을 가지고 ‘원래 그런 인간’이라며 험담하기 바쁘다. 슬픈 건, 그럴수록 조회 수가 높다는 거다.

척 보면 안 다는 말이 넘쳐나는 사회답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냐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제발, 조금만 차분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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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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