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그는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910년 한겨울 간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태어날 때는 백작이었고, 죽을 때는 농부 옷을 입고 있었다. 인생의 방향이 보통 반대인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 양반은 참으로 독특한 행보를 걸어간 셈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그 질문에 대해 고민하며 소설 두 편을 썼는데, 하나는 『전쟁과 평화』(1869), 다른 하나는 『안나 카레니나』(1878)다. 두 작품 합치면 원고지로 족히 수만 장이었다.
백작님의 기묘한 모험, 귀족이 쟁기를 잡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귀족이었다. 집에 농노가 수백 명이었고, 드넓은 영지가 있었으며, 그 덕분에 먹고사는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가 "자본주의는 나쁘다"고 유기농 카페를 운영하는 격이랄까. 그런데 톨스토이의 경우, 그 자기모순을 적어도 죽을 때까지 부끄러워했다는 점에서 요즘의 그 '강남좌파'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중년을 넘기면서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겪는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가 갑자기 "내 소설이 다 무슨 의미냐"고 무너지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유튜브 구독자 1천만 명 짜리 채널 운영자가 갑자기 "조회수가 삶의 의미인가"라며 계정을 탈퇴하려는 상황. 그 번민 끝에 그는 『참회록』(1882)을 쓰고, 이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직접 밭을 갈고, 신발을 만들고, 농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귀족부인이었던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fya Andreyevna Bers, 1844~1919)는 속이 터졌을 것이다. 남편이 백작 체면도 없이 쟁기를 끌고 다니니 말이다. 결혼생활 48년 동안 두 사람의 갈등은 러시아 문학만큼이나 방대하게 쌓여 갔다.
톨스토이주의, 국가도, 군대도, 교회도 거부한 노인
톨스토이 사상의 핵심은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국가는 폭력기구다. 따라서 국가도 나쁘다. 교회가 국가와 손을 잡았다면 교회도 나쁘다. 세금도 병역도 거부하라. 땅을 직접 일구고 단순하게 살아라.
이 논리를 러시아 정교회와 차르(황제) 정부에 정면으로 들이댔으니, 반응이 어땠겠는가. 1901년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공식 파문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를 파문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차르정부는 그를 감옥에 넣지 못했다. 가뒀다가는 전 세계여론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명성이 방패가 된 드문 사례였다.
그의 사상은 국경을 넘었다. 인도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때, 톨스토이의 비폭력사상을 직접 편지로 주고받으며 이론적 뼈대를 다졌다. 두 사람의 왕래서신은 역사적 문서로 남아 있다. 훗날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은 인도독립을 이끌었고, 그 정신은 다시 미국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에게 이어졌다. 한 러시아 노인의 생각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세계를 바꾼 것이다.
문학이 무기가 될 때, 권력을 향한 직구
톨스토이의 소설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활』(1899)은 귀족청년이 자신이 과거에 망가뜨린 한 여성의 재판에서 배심원으로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러시아 사법제도, 교도소, 국가폭력, 종교의 위선을 낱낱이 해부하는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검열의 표적이 됐다. 그래도 나왔다. 명성 덕분에.
그는 단편도 날카로웠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에서 한 농부가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 하루 종일 뛰다가 결국 쓰러져 죽는다.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자신을 묻을 두 평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덮으면서 "이거 혹시 요즘 이야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톨스토이의 탓이 아니라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의 탓이다.
한국에서 읽는 톨스토이, 불편하지만 필요한 거울
자,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톨스토이가 살았던 러시아제국은 극심한 빈부격차, 귀족과 농노의 신분제, 교회와 국가권력의 유착,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구조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2026년 한국. 상위 10%가 전체 부동산의 절반이상을 소유하고, 청년들은 아무리 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 국회는 특권으로 가득 차 있고, 대형 종교단체들은 세금 한 푼 안 내면서 수천억 원의 부를 쌓는다. 검찰과 사법부는 강자에게 너그럽고 약자에게 엄격하다는 불신이 쌓여 있다. 이 그림을 톨스토이에게 보여줬다면 그는 뭐라 했을까. 아마도 짧고 굵게 한마디 했을 것이다. "여기도 똑같군."
톨스토이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첫 번째 시사점은 기득권의 자기반성이다. 그는 스스로 기득권이었다. 백작이었고, 대지주였고, 유명인이었다. 그럼에도 그 구조자체가 잘못됐다고 평생 외쳤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부끄러워하며 내려놓으려 했다. 오늘날 한국의 특권층이 이 정도 자기성찰을 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두 번째는 폭력 없는 저항의 가능성이다. 한국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촛불을 들었다. 2016~2017년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물결은 세계가 놀란 비폭력 시민저항이었다. 톨스토이가 봤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간디도 킹 목사도 그 정신의 줄기는 하나로 이어진다.
세 번째는 진정성의 문제다. 톨스토이는 말과 삶이 달랐던 자신을 평생 괴로워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많은 지도자들은 말과 삶이 달라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다. 진보를 외치며 강남 아파트를 굴리고, 노동자 편이라며 자녀는 특권학교에 보낸다. 부끄러워하는 것만이라도 배웠으면 한다.
마지막 기차, 82세 노인의 가출
1910년 10월, 82세의 톨스토이는 한밤중에 집을 나섰다. 아내와의 갈등,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체념이 뒤엉킨 채로 그는 그냥 걸어 나갔다.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탔고, 한 달도 안 돼 아스타포보(Astapovo)라는 작은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세계언론이 그 간이역 앞에 몰려들었다. 역장의 집이 임시 임종실이 됐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장소에서 죽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는 단 한 줄의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평생 쓴 글이 유언이었으니까.
우리는 왜 톨스토이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가 위대한 작가여서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특권을 솔직하게 직시하고, 그럼에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부끄러움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 그것이 톨스토이가 지금 이 땅에서 꿈꿨을 세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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