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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 키운 건 '전라도 싹쓸이'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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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 키운 건 '전라도 싹쓸이' 구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4>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시민군이 탄생하고 광주 공동체가 형성되다

프레시안 : 1980년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면서 광주 시민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지만 계엄군의 철수는 일시적인 것이자, 광주를 철저히 봉쇄해 고립시키는 동시에 폭도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고약한 선동 작업을 수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5월 22일, 최정운 교수가 말하는 광주 공동체에서 시민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시민군은 카빈, M1 등 낡고 빈약한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그러한 시민군을 처음에 이끈 건 20세의 김원갑이었다. 청소년티를 이제 막 벗은 이 사람은 무장한 시위대원들에게 '대열을 정비하자'고 역설하면서 이 무장 시위대를 이끌고 22일 아침 일찍 도청에 들어갔다. 무장대 대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시민군이 탄생하게 된다.

김원갑이 시민군을 이끄는 역할을 오랫동안 한 건 아니다. 22일 오후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 지휘권을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김창길 위원장한테 넘겨라'라고 하자 김원갑 이 사람은 바로 넘겼다.

이날 광주 시내 각 병원은 부상자로 가득 찼다. 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특히 총상 환자들이 주요 병원을 다 채우다시피 했다. 21일 계엄군이 시민을 정조준해 본격적으로 발포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전에도 수많은 부상자가 병원을 찾았지만, 그때는 총상 환자보다는 군홧발에 짓밟힌 사람, 진압봉이나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은 사람, 대검에 찔린 사람 등이 많았다.

이렇게 병원에 환자들이 넘치고 또 개중엔 중상자가 많다 보니까 의약품은 물론이고 혈액도 모자라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차로 시내 각지를 돌며 스피커로 헌혈을 호소하고 그랬는데,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병원에 직접 찾아와 자기 피도 뽑아서 써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부녀자들이 밥통, 바구니 같은 걸 들고 도청에 왔다. 밥, 반찬, 국 같은 걸 마련해 식사를 제공한 것이다. 계엄 당국에서는 폭도 운운했지만, 이 시기에 광주 시민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탈취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군을 비롯해 항쟁 편에 서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이렇게 밥도 지어주고 그랬다.

프레시안 : 그런 속에서 이 엄중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움직임이 여러 갈래로 나타나지 않았나.

서중석 : 22일 정시채 전남 부지사가 도청에 나와 사태 수습책을 논의했고 그러면서 이종기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사태 수습 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등 온건한 7개 항을 가지고 상무대로 갔다. 그렇지만 소준열 전남북 계엄분소장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수습위원들은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이종기 위원장이 '합의된 것이 없다'고 시민들에게 말하자, 시민들은 야유를 했다.

그러한 가운데 바로 22일부터 전날 전남 각지에서 가져온 무기 문제가 가장 중요한 최대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시민수습위원들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기 반납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런 의견이 많았다. 그러면서 이날 오후까지 무기 200여 정을 회수하게 된다.

그런데 22일 이날 총리 서리 박충훈이 광주로 내려왔다. 박충훈은 신현확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21일 오후 새로 총리 서리로 임명된 사람인데, 광주에 와서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드러냈다. 그런 사람이니까 이 시기에 그런 자리에 임명한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물러난 후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밥을 지어 시민군 등에게 제공했다(왼쪽). 그리고 피가 모자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했다(오른쪽). ⓒ5·18기념재단


'전라도 싹쓸이' 발언 의혹 정호용, 왜 거듭 광주에 내려왔을까

프레시안 : 총리 서리라는 중책을 맡고 광주에 갔으면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기본일 터인데 실제로는 어떠했나.

서중석 : 박충훈은 임명장을 받자마자 청와대 뒤뜰에 대기 중이던 헬리콥터에 올라타고 몇몇 장관들과 함께 광주로 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내키지 않는 이 길을", 광주로 가는 길을 말하는데, "안 갈 수도 없는 내 처지가 안타까웠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갔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갔는데, 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현장 상황을 직접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현지 지휘관의 건의에 따라 광주 시내에 내리지 않고 인근 송정리에 착륙했다. 현지 파악을 내 눈으로 하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썼다. "그 후 언제 준비된 것인지 모르지만 아침에 청와대에서 건네받은 담화문 원고대로 녹음해 현지와 서울서 모두의 자제를 호소했다." 여기서 현지는 광주를 말한다. 온 것도 억지로 왔고, 거기에다가 남이 써준 걸 읽는 그런 총리 서리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런 시기에 총리 서리가 된 사람이 오죽하겠느냐'고 보고 기대도 안 했다. 그런 상태였는데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특별 담화는 다시 한 번 정부를 불신케 했고 총기 자진 수거 작업에 치명적인 역효과를 가져왔다고 5월 25일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 매가리 없는 짓을 억지로, 남이 시킨 대로 박충훈이 한 것이다.

(박충훈이 읽은 특별 담화에는 '난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소수의 폭도에 휩쓸리지 말라' 등 광주 상황을 왜곡하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북괴가 광주사태를 악용해 남침하거나 후방에 침투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무한정 방관할 수는 없다'며 안보 위협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상투적인 방식으로 정부가 무력 진압을 위한 수순을 밟고 있음을 내비치는 부분도 있었다. 아울러 박충훈은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시민에게 발포하지 못하고 반격을 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이 특별 담화는 현지 상황을 직접 파악한 결과라는 명목 아래 22일 오후 7시 20분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됐다. '편집자')

그런데 박충훈의 광주 방문과 관련해 나중에 또 다른 논란이 생기게 된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광주항쟁 당시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의 주장에 의하면, 이날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은밀히 내려왔는데 박충훈 총리 서리도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박충훈이 참석한 간담회에서 정호용이 '전라도 싹쓸이' 발언을 했다고 정웅은 주장했다.

정호용은 이걸 부인했다. 그날 광주에 간 건 맞지만 그런 발언은 하지 않았고 간담회에도 안 갔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주장이 엇갈렸는데, 하여튼 정호용은 이날 광주에 내려와서 무언가 휘하 부대들에 지시를 하고 올라갔다.

(향토 사단인 31사단을 이끌었던 정웅은 광주항쟁 직후인 1980년 6월 직위 해제를 당했다. 1988년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된 정웅은 국회에서 '전라도 싹쓸이' 발언 문제를 거론했다. 1988년 7월 5일 정웅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호용이 1980년 5월 22일 박충훈이 내려온 후 열린 "작전 지휘관 및 기관장 간담회 석상에서 '이번 기회에 광주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한 놈도 남김없이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등의 망언"을 했으며, 자신이 직접 간담회 자리에서 그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광주항쟁 당시 정호용이 직접적인 작전 지휘 계통에 있지는 않았지만 진압 작전을 사실상 지휘했다는 주장도 했다.

정호용은 1988년 12월 7일 광주 청문회 증인으로 국회에 출석했을 때 "싹쓸이라는 말을 알고 있지도 못했다"며 '전라도 싹쓸이' 발언 의혹을 부정했다. 또한 "내가 3개 여단을 광주에 보냈지만 그것은 딸을 시집보낸 사돈과의 관계와 마찬가지", "부대를 배속받은 사단장에게 권한이 있었던 것"이라며 작전 지휘 관련 의혹도 부인했다.

광주항쟁 당시 현장을 취재한 김영택 기자는 훗날 박사 논문에서 "그(정호용)의 말을 빌리면 31사단에 배속시켜 광주에 내려보낸 자신의 부하들이 궁금해서 (1980년 5월) 20일에 이어 (22일에) 또 내려왔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박 총리 서리를 수행하지도 않고 작전 지휘권도 없다는 정 사령관이 왜 또 광주에 내려왔을까. 또다시 '시집간 딸'을 보러 온 것일까?" 덧붙이면, 정호용은 진압 작전 돌입 직전인 1980년 5월 26일 밤에도 광주에 내려왔다. '편집자')

이날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도 광주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5월 22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혁명 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복직 교수와 복학생을 통해 5월 중순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5월 22일 민주화 촉진 국민 대회를 개최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며 일제 봉기를 획책하는 등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총을 계속 들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무기 회수·반납을 둘러싼 갈등

프레시안 :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신군부는 유혈 사태를 일으킨 것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갔다. 광주 시민들로서는 폭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무조건 총을 내려놓기도, 그와 반대로 더 큰 희생을 무릅쓰고 무장 항쟁을 끝까지 이어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두환 일당이 강제한 이 상황으로 인해 광주 시민들은 힘든 고민을 계속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서중석 : 5월 23일, 무기 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위원장 김창길은 무기 회수 및 반납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김종배 등 일부 학생이 반대했다. 이 무렵부터 1970년대에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등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대표적인 리더 그룹으로 부상했는데 이들은 무기 회수 및 반납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무기 반납을 거부한 사람들은 시민군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이 사태를 확대시켜놓고 오히려 몸을 사리고 있으며 수습위원들은 무조건적 무기 반납을 주장하고 있다'며 매우 분개했다. 총을 잡은 사람들은 대부분 날품팔이, 구두닦이를 비롯한 하층 노동자로 공수 부대와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고 희생도 가장 컸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광주항쟁에 참여했더라도 학생이나 중산층 이상은 이들에 대해 이질감을 느꼈고 이들과 같은 부류가 되기 싫어서도 총을 잡지 않았다고 최정운 교수는 분석했다.

조철현 신부는 특히 무기 회수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조 신부는 각지를 돌며 여러 차례 위협을 받으면서도 시민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설득했고,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김창길 위원장한테도 무기 수습 및 반납 문제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역설했다.

그런 속에서 이날 오후 도청 광장에서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가 열렸다. 10만 명이 훨씬 넘는 시민이 참가했다. 이 범시민 궐기 대회는 항쟁 주체 측이 준비했다. 이들은 '광주항쟁의 대의에 충실한 강경한 투쟁을 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이나 평화적 타협론 같은 건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시민들은 오전부터 모여들었는데, 이 대회에서 학생, 시민, 노동자, 농민, 주부들의 주장이 담긴 의견을 비롯해 각종 성명을 낭독하고 '민주 해방'이 올 때까지 싸우자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시민들은 오랜만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 모임에서 열띤 모습을 보여줬다. 시민 공동체 자치 시대에 열린 대회 중 가장 규모가 컸고 각계각층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그야말로 광주 시민들이 혼연일체가 된 광주 시민들의 대회였다.

그런데 이날 주남마을에서 또다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틀 전인 5월 21일 송암동을 지나가는 버스에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서 9명이 사망했는데, 23일에는 주남마을에서 훨씬 더 큰 희생이 나왔다. 시위대원 등 18명을 태운 소형 버스가 주남마을 앞에 이르렀을 때 공수 부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중 15명은 마을 앞 현장과 차 안에서 숨지고 3명은 붙잡혔다. 여고생 1명과 남자 2명이었는데, 중상을 입은 두 남자는 끌려가 사살됐고 여고생 홍금숙, 이 사람 한 명만 살아남아서 나중에 증언을 하게 된다. (공수 부대는 붙잡힌 남성 2명을 즉결 처분한 것에 더해 그 시신을 암매장하기까지 했다. '편집자')

▲ 계엄군 철수 후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었다. ⓒ5·18기념재단


어린이 사살→오인 총격전→분풀이 학살, 11공수여단의 어느 하루

프레시안 : 초기에 관변 인사 중심으로 구성됐고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에도 부정적이었던 시민수습위원회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불만도 점차 커지지 않았나.

서중석 : 5월 24일 오후 제2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가 열렸다. 10만 명 가까이 운집해 도청 광장 일대를 메웠다. 계엄군과 두 번째 회의를 한 수습위원회가 이 대회에서 시민들에게 전날의 협상 결과를 보고하려 했다. 그런데 이종기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자 여기저기서 "집어치워라", "필요 없다" 등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24일에는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0여 명의 어린이가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한 어린이가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한 어린이가 숨졌다.

그 후 이 부대는 효덕초등학교 앞을 지나 광주-목포 간 국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집중 사격을 당했다. 공수 부대를 공격한 건 마을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었다. 공수 부대를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었다. 공수 부대도 바로 응사했다. 그러다가 보병학교 교도대 쪽에서 자신들이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물러갔다. 이 오인 총격 사건으로 장교 1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오인 총격 사건 사망자들은 광주항쟁 진압 직후 훈장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오인 사격 사실을 감추고 기록을 조작하는 일도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사(2013년 5월 23일)에 따르면, 1980년 총무처 '무공훈장부' 공적란에 이 사건 사망자 9명 중 7명은 '충정 작전에 참가해 5월 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 나머지 2명은 '불의의 총탄에 맞아 순직', '폭도들 제압 중 무반동총에 저격당해 전사'라고 기록됐다. '편집자')

그런데 보병학교 교도대가 빠져나간 후 공수 부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또 일으켰다. 공수 부대원들은 오인 총격과는 전혀 상관없는 근처 마을을 덮친 다음 3명의 젊은이를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해버렸다.

광주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린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런 상황에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 이어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오지 않나. 최규하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5월 25일 수습위원회가 재야 중심으로 새롭게 짜였다. 이날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대표할 만한 변호사, 교수, 민주화 운동 청년, YWCA 측 인사, 신부 등이 모여서 이번 사태가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하고 어떤 보복 조치도 하지 않을 것 등 사태 수습을 위한 4개 항을 통과시켰다. 또 이들은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 이름으로 "5월 18일과 19일에 자행된 공수특전단의 살상 만행이 80만 시민을 분노케 하고 정당방위로서 시민 봉기로 유도했다", "사상자에 대한 허위 보도와, 자위권을 행사한 민주 시민에 대하여 난동 및 무장 폭도라고 한 일방적인 허위 보도가 시민을 더욱 분노케 했다" 등 '광주사태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도 합의를 봤다. 광주항쟁을 시민 봉기나 의거로 본 점에서 그 이전 수습위원들의 시각과 분명히 달랐다.

이날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 시민들, 또 수습위원들 등의 간절한 기대를 모으면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장관들과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군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오후 6시 폭우를 무릅쓰고 상무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 그리고 수습위원들이 간절히 바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규하는 '대통령이 광주에 와서 우리를 좀 만났으면 좋겠다. 광주 상황을 직접 보고 갔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광주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습위원들조차 만나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밤 9시 KBS 뉴스를 통해 '광주 시민에게 고하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는 광주 시민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려는 어떠한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광주의 유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방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참 가느다란 희망이지만 그래도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그런 심정으로 최 대통령을 기다렸던 광주 시민들의 절절하고 절실한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최 대통령은 당초에는 시내에 들어가 수습위원들을 만나려 했다고 하는데, 대통령을 따라간 군부 측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너 서클을 중심으로 한 전두환·신군부 세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습위원들이 얼마나 대통령의 방문을 기다리고 기대했는지는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 명의로 나온 이 글에 잘 담겨 있다.

프레시안 : 최규하가 이날 발표한 특별 담화문에 대한 답신 형식인 이 호소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최규하 대통령이 만나지도 않고 되돌아갔지만 이 호소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민족적 비극인 광주사태로 심려하시며 몸소 광주까지 오셨고 최대한 관용을 베푸시겠다는 담화까지 내려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호소합니다. 저희들은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80만 광주 시민의 마음의 상처를 씻어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최규하 대통령 각하이심을 믿고 근원적인 수습을 위해 저희들의 충성 어린 호소를 받아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수습위원들이 합의해 통과시킨 사태 수습을 위한 네 가지 사항을 이야기했다. "1.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해주시고 2. 사과와 용서를 청해주시옵고", 사과와 용서를 해달라는 뜻인데, "3. 이미 약속하셨지만 다시 한 번 모든 피해에 대하여 정부가 보상하고", 이건 약속한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썼다. 네 번째는 이렇다. "4. 어떤 보복 조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시옵기를 피눈물을 삼키면서 간곡히 간언드립니다."

얼마나 호소할 곳이 없으면 그 무력한 최규하 대통령한테 이렇게 간절하게 수습위원들이 호소했겠나. 이때 광주 시민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25일 이날 무기 회수 문제를 둘러싼 갈등 끝에 결국 김창길이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김종배가 위원장이 된다. 적극 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이끌어가게 된 것이다.

김성용, 조철현, 이성학, 홍남순, 이기홍 등은 이날 밤 이들을 방문해 격려했다. 김성용 신부는 "이번 광주사태는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광주 시민들의 울분의 표현이다. 같이 노력하여 우리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자"고 말했다. 이들은 다음 날 새벽까지 청년들과 함께 있었다. 김성용 신부 등의 이러한 용기 있는 언행은 무기 회수를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을 줬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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