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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국가의 새해가 밝았다
[해방일기] 1948년 1월 2일
몇 달 동안 시민 생활을 옥죄어 온 미곡 반입 금지 조치가 1월 1일부로 풀렸다. 이 해금 조치를 경찰 계통 명령에서 제일 먼저 확인한다는 사실이 찜찜하다. "미곡 자유 반입에 경찰은 간섭 말라" 미곡의 자유 반입에 대하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총감은 1일부로 다음과 같은
김기협 역사학자
2013.01.02 10:17:00
'해방 일기'를 잇는 '대한민국 실록'을 내다보며
[해방일기] 1947년 12월 31일
29개월 전 '해방 일기'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이 작업이 하나의 산책이며 하나의 대장정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하나의 여행으로 생각합니다. '산책'의 즐거움도 있고, '대장정'의 보람도 있는 길이 되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먼 길을 걸을
2012.12.31 08:20:00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쿄 전범 재판
[해방일기] 1947년 12월 28일
도쿄 전범 재판정(Tokyo War Crimes Tribunal)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정(IMTFE, 극동IM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의 일부였다. 도쿄 재판이 시작된 1946년 5월 3일자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극동 IMT의 재판정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나
2012.12.28 10:25:00
미국에도 손 내민 호치민, 김일성은 왜?
[해방일기] 1947년 12월 26일
1947년 12월 27일자 <경향신문>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정세에 관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스탠리 스윈튼 AP 기자의 분석 기사인데 동남아시아 지역이 '서남아주(西南亞洲)'로 표시되어 있다. 도입부의 전체적 조망과 끝의 베트남 설명 부분을 옮겨놓는다.
2012.12.26 10:36:00
남조선의 도깨비방망이, 군정 재판
[해방일기] 1947년 12월 24일
몇 달을 사이에 둔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 중 어느 쪽이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을까? 여운형은 백주대로상에서 저격당한 반면 장덕수는 해 저문 뒤 찾아온 암살범에게 집에서 총을 맞았다. 그리고 여운형은 전 조선의 좌익 인물 중 가장 비중이 큰 사람의 하나였던 반
2012.12.24 07:47:00
김구의 오락가락 행보, "조직이 뭐길래…"
[해방일기] 1947년 12월 21일
한독당 부위원장과 국민의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조소앙이 12월 20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한독당 제2인자로 독자적 활동을 별로 않고 있던 조소앙은 지난 달 각정당협의회(정협) 움직임을 주도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12월로 접어들며 김구가 이승만 노선 지
2012.12.21 10:30:00
동력 꺼진 기계와 같은 남조선 경제
[해방일기] 1947년 12월 17일
배급 쌀값이 12월 15일부터 소두 한 말에 120원에서 140원으로 올랐다(<경향신문> 1947년 12월 11일). <경향신문> 1947년 3월 22일자 기사 "쌀값은 저락되어 좋으나 올라만 가는 찬값에 두통"에서 "최근 원활히 배급이 계속됨에 따라 600원이나 하던 쌀이 소두
2012.12.17 13:08:00
장덕수 암살로 궁지에 몰린 김구
[해방일기] 1947년 12월 14일
장덕수 살해범은 범행 후 38시간 만인 12월 4일 오전에 체포되었다. 주범은 종로서 소속 경관 23세 박광옥이었고 공범은 연희대 학생인 20세 배희범이었다. 그들은 체포 직후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한다. 이들의 배후가 금세 명확하게 거론되기 시작한 사실을 12월 7일자 &
2012.12.14 10:33:00
전력대란 공포, 진짜 원인은 북쪽이 아니라…
[해방일기] 1947년 12월 13일
이북으로 전기 요금을 보낸 데 관한 기사 하나가 나왔다. 1945년 8월부터 1947년 5월말까지 남조선이 사용한 북조선 전력 대금 계산 1억4000만 원에 해당하는 제 물자는 미주둔군의 책임으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던 바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에 제4차로 수송한 물품을 도합하
2012.12.12 07:53:00
김구는 돌아서고 중간파는 남아서…
[해방일기] 1947년 12월 10일
12월 10일 민족자주연맹(민련)에서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담화가 나왔다. 민련은 아직 정식 출범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 담화는 엄밀히 말하면 그 준비위원회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족자주연맹 선전부에서는 10일 기자단 정례 회견 석상에서 "
2012.12.10 08: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