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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변신, "이승만 따라서 남조선 총선거 지지!"
[해방일기] 1947년 12월 9일
12월 2일에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 대표들이 모여 두 기구의 통합 방침을 의논하고 이튿날 아래와 같은 내용의 '협상서'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본인 등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 양 영수의 의도를 받들어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김기협 역사학자
2012.12.09 12:29:00
"경제민주화를 벌써 주장하셨군요"
[해방일기] 1947년 12월 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1947년 12월 중 <한성일보>에 연재하신 글 "삼균주의(三均主義)와 신민주주의"를 읽어봤습니다. 제가 읽은 것은 <민세 안재홍 선집 2> 228-243쪽에 수록된 것인데, 원래의 연재에 약간의 첨삭을 가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더군요. 삼균주의는 원래
2012.12.05 11:27:00
장덕수의 암살, 배후는 역시 김구?
[해방일기] 1947년 12월 3일
12월 2일 오후 6시 50분이면 캄캄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제기동 집에 두 청년이 찾아왔다. 한 청년은 경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장덕수는 한민당 간부 몇 사람과 식사 중이었다. 장덕수가 마루로 나와 청년들과 몇 마디 나누고 방으로 돌아서려는
2012.12.03 07:54:00
민족의 지도자는 어디에?
[해방일기] 1947년 11월 30일
오기영의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인도의 비극" 인도가 삼백여 년의 영국의 기반(羈絆)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그러나 종파의 상쟁으로부터는 해탈하지 못하였다. 힌두도 인도인이요 모슬렘도 인도인이다. 이들은 다 같이 영 제국주의와 싸웠고 다 같이 자유 인도를 위하여
2012.11.30 09:26:00
"의회 만드는 게 소꿉장난인 줄 아나?"
[해방일기] 1947년 11월 28일
입법의원의 대표성과 권한을 제한적으로 보는 미군정의 시각은 부일협력자 법안 거부 며칠 전 임시약헌 보류 통보에서 이미 나타나 있었다. 임시약헌은 1947년 3월 3일 의원 55인의 발의로 상정되어 곡절 끝에 7월 29일 입법의원 본회의를 통과한 것인데, 군정장관의 인준이
2012.11.28 07:53:00
허울이 벗겨진 '남조선 과도정부'
[해방일기] 1947년 11월 26일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이 최대한 서둘러 인민위원회에 업무를 넘겨줌으로써 '점령'의 의미를 최소화한 반면 이남의 미군은 군정부를 점령지역의 유일한 정부로 지키고 있었다. '민족자결'의 원리를 묵살하고 있었던 셈이다. 미군이 권력을 넘겨받을 주체
2012.11.26 09:49:00
김구, 다시 이승만 밑으로
[해방일기] 1947년 11월 23일
11월 17일의 '12정당 공동담화'(11월 16일자 일기)에 대한 '규탄성명'이 11월 21일 자칭 민족진영의 70개 자칭 애국단체로부터 나왔다. 한민당 회의실에서 모인 100여 정당 단체 대표들이 이 성명서 채택과 함께 규탄강연회 개최(11월 27일)와 유엔위원회 환
2012.11.23 09:53:00
송전 문제에 대한 한 수필가의 증언
[해방일기] 1947년 11월 21일
일기 중에 이따금 소개하는 수필의 필자 오기영이 모처럼 신문기사에 등장했다. 경전(京電) 업무부장인 그가 전기 사용에 있어서 시민의 협력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 상태로 계속된다면 금년 내로 서울은 암흑세계로 빠질 것으로 이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는 시민
2012.11.21 12:09:00
드러나는 '민족진영'의 정체
[해방일기] 1947년 11월 19일
11월 5일 첫 모임을 가진 각정당협의회(정협)가 11월 17일의 여섯 번째 회합에서는 12정당 공동담화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아직 참가범위도 확정되지 않은 준비위원회 단계인데도 이렇게 자주 모이고 합의 내용을 빨리 발표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가자들의 열의가 대단한
2012.11.19 08:13:00
김구, 드디어 이승만과 갈라지려나?
[해방일기] 1947년 11월 16일
11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천절 봉축행사가 열렸다. 개천절 봉축은 1909년 대종교에서 시작한 것이고 1919년 이후 상해-중경 임시정부에서 국경일로 경축해 왔다. 1948년까지는 음력 10월 3일을 봉축일로 삼았는데, 1949년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기 위해 문교부에서 '
2012.11.16 08: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