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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⑩
'무기수' 임방규, 푸른 죄수복을 입다 임방규를 포함해 무기수로 감형된 7명의 사형수들이 오후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으로 바꿔 입은 임방규는 그제야 '사형을 면했구나'라며 안도했다. 무기수 이하만 죄수복이 지급됐고, 곧 처형될 사형수는 사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임방규가 있는 동안 대전교도소에서는 총살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2016.03.18 15:14:47
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⑨
총살 집행 현장과 美고문의 확인 사살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대부분 앞 수정을 찬 것과 달리 일부는 뒤 수정을 찬 채 꽤나 불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임방규는 뒤늦게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터라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
2016.02.26 11:32:00
"영양실조에 쥐 잡아먹었더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⑧
포로수용소 내 변절자, 그리고 탈출 사건 하루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을 포로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 날은 필시 상부의 검열이 있거나, 기념일 또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수용소를 찾은 날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가고나면 통조림은 모두 회수됐다. 천막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잠자리가 들어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흙을 고른 뒤 난로가 설치됐다. 하지만
2016.02.12 11:17:58
"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⑦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 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학교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2016.02.04 11:26:23
"빨치산에게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⑥
한국전쟁의 애환이 묻어있는 '한정당' 김창근이 좌익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종형님의 영향이 컸다. 그의 사촌형인 김택근(전쟁 전 사망)은 왜정 때부터 공산당 조직원이었고, 김영근(당시 22세)은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김영근은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북송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 방호산 부대(인민군 6사단)가 순창에 내
2016.01.30 08:13:39
인민군에 징집된 그 청년, 살아남았을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⑤
가슴 메이는 이름 '쌍치'…'돌고개' 전투 전북 순창군 쌍치면. 누군가에게 '쌍치'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메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경이 번갈아가며 장악했고, '해방구(解放區)'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다. 좌우 이념대립의 정점에서 애먼 주민들만 통곡의 피를 흘린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양민 학살이 그러했듯 이곳 역시 군경에 의한 학살
2016.01.21 11:45:34
"니가 뭔데 사람을 패!"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④
기포병단 '기차 전복' 작전 1951년 9월 병단의 규모가 컸던 기포병단은 전남도당의 요청으로 영광 불갑산 지원 작전을 폈다. 전남도당 인민유격대 불갑지구사령부는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전남 서북권을 관할해왔다. 하지만 1951년 2월20일(음력 1월15일) 이른바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이뤄졌고, 군경토벌대는 이 지역을 완전히
2016.01.15 11:06:45
소설 <남부군>, 실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③
덕유산 '송치골 회의', 그리고 빨치산 재편 빨치산 병력은 수시로 재편됐다. 그만큼 전선의 변화가 극심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녹음이 짙푸르던 1951년 8월의 일이다. 남부지구(회문산 일대) 역시 군경에 의한 대공세가 이뤄지자 병단을 사단제로 개편한다. 기포병단은 407연대, 카츄사병단은 408연대로 바뀌었고, 두 연대가 합쳐져 46사단을 이뤘다
2016.01.08 15:14:12
"성냥 대가리 총탄, 빨치산의 처절한 항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②
北 의용군 임방규, '성수산 빨치산'이 되다 1950년 9월 20일경, 낙동강 전투에 참여한 북한 의용군 임방규(당시 19살). 그는 거제와 마주하고 있는 통영 광도면 횡리(고성과 통영사이)에 주둔했다. 한·미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사천 방어 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낙동강 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의 화력은 막강했고, 전선은
2016.01.01 09:45:19
"어린 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사형!"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①
"임방규 이하 29명 사형!" 재판장의 사형 언도와 함께 법정 안 양옆으로 늘어선 헌병들이 '찰카닥' 장탄을 했다. 행여 있을지 모를 난동에 대비한 실탄 장착이었다. 이어 기세등등한 군인들이 '빨갱이 사형수'를 서둘러 재판장에서 끌어냈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났다. 취조 뒤 검사가 몇 장의 서류를 넘기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상을 읊어내자, 소령 계급장을
2015.12.24 10:5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