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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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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9>

서만열

동네 아이들 총대장 서만열.
그는 그 무렵 중학교 이학년이었다.
여위고 가냘픈 몸매에 눈초리만 날카로웠다. 저보다 어린 애들은 물론 동갑쟁이나 손위의 큰애들도 졸졸졸 따르는 그야말로 타고난 ‘보쓰’였다.

소년단에서 데려가기엔 너무 컸고 민청에서 불러가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는 초보적인 공산당 교육이나 애국적인 민족교육에서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다. 그의 판단은 그야말로 자유,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유의 배후에는 그의 사람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어떤 신비스러움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잘난것도 아닌데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억압적인데는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방만한 것도 아닌 그 나름의 통제력이 있어서 아이들은 제 스스로 제자신의 속이야기를 찾아가 다 꺼내놓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모조리 보고하곤 했다. 그렇다고 쉽사리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은 반드시 전체 회의에 부쳤다. 모두들 빠짐없이 실컷 제 의견을 털어놓게 한 뒤에 맨 마지막에 가서 자기 소견을 나지막하게 들릴락 말락, 연약한 목소리로 남의 이야기 하듯, 때로는 속담을 들춰가며 핵심적인 몇 마디를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것으로 의견의 통일을 보곤 했고 전혀 그 뒤에 불만이 없었으니 참으로 전원일치, 만장일치였다.

직접 민주주의, 그리고 전원일치, 만장일치!
훗날 상고사를 읽거나 화백(和白)에 대해 묵상하면서 서만열의 영상을 떠올린 것을 나는 결코 우연이라 보지 않는다. 서만열이 그때 이미 화백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리하고 현명한 고대인들과 같이 지금도 그러한 사람, 그것도 기존의 대의민주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도 화백에 저도몰래 접근하는 것은 본능적 정치의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백 비슷하던 우리들의 그 발랄한 분위기가 병정놀음의 형태로 변질한 것은 국군, 즉 해병대 상륙 이후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서만열은 떠받쳐져 대장이 되었지만 실제에 있어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통제한 것은 지금은 그 이름을 잊어버린 덩치 큰 두 아이들 이었다. 군대와 똑같은 계급장을 만들어 가졌고 대나무와 송판 등속으로 소총과 기관총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으며 그때 많이 쏟아진 ‘무시고무’로 새총줄을 만들어 ‘새총부대’ 놀음도 했던 것인데, 다른동네 애들과 서로 쏘아대며 언덕위의 텅빈 우리집을 본부로 하고 주로 밤에 모여 군대 놀음을 하였고 우리집 채마밭에 있던 여자막, 나무로 얽은 넝쿨집을 영창으로 정해놓고서 규칙을 어긴 아이는 하룻밤쯤 가두어두기도 하는… 보초도 서는…

왜 그랬을까?
모방!
연약하나 지혜로운 자유를 버리고 전쟁을, 군인을, 그 강하고 딱딱한 소경동맹을 모방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때부터 서만열은 모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렵의 마지막 만열의 기억은 성자동(聖子洞)이다. 시뻘건 흙벼랑 중간에 시뻘건 어린아이 시체가 하나 눕혀져 있었다.

시뻘겠다. 피투성이였다.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도 어찌하려하지 않았는데 만열이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 어디서 구했는지 가마니 쪼각이 쥐어져 있었다.

만열은 그 애기시체를 가마니에 쌓아서 가지고 내려왔고 우리는 그것을 조금 떨어진 하당리 붉은 황토흙에 묻어주었다.

만열은 주머니칼로 조그마한 비목(碑木)을 깎아 무덤 앞에 꽂아놓는 걸 잊지 않았다.
‘한 귀여운 아기의 무덤’

돌아오는 길.
해는 이미 지고 별들이 돋아오는 짙푸른 초저녁 하늘아래 황토길을 말없이 이상한 감회와 어떤 공포 비슷한 외로움을 느끼며 걷고 있을 때, 뒤쪽에서 만열의 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돌갓집 뒷산길
어두워 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끝에 나앉아서
별만 봅니다.

내가 길고 긴 옥살이에서 풀려난 1980년 이후 첫 봄, 그러니까 1981년 봄 어느날 불쑥 그 서만열이 강원도 원주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생활에 찌든 검은 얼굴에서 이미 아우라는 떠나고 없고 경련하듯 엷은 미소 한가닥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여러차례 만나 술도 마셨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전쟁 전후한 그 시기의 기억만이, 그리고 그 서만열의 나긋나긋한 이미지와 겹쳐지는 유사화백(類似和白)의 장면들, 또 그 슬픈 노래만이 남아 내 마음에 어떤 의미심장한 울림을 울리며 에코하고 있다.

비록 나는 그 무렵에 군인 흉내와 전쟁놀음에 열중했지만 만열의 그 부드럽고 지혜로운 기억들은 이제와 비로소 생생한 색채로 되살아나고 있으니, 그리고 계속 에코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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