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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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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9>

악어형

악어(鰐魚)형(兄) 한기호 선배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한 마리 크낙한 악어를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 우스운 소리라도 들으면 큰소리로 홍소(哄笑)를 터뜨린 뒤 그 웃음이 슬며시 미소로 바뀌면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다.

영어에 'Crocodile teers(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거짓 연민을 표시하는 위선적인 눈물이라는 뜻이지만 나는 말 그 자체로써 한기호 선배에게 별명삼아 붙인 것이 바로 '악어'다.

악어 형은 나보다 서울대 문리대 2~3년 윗 선배로 심리학을 전공했고 오랜 일선기자생활로 닦이어 한 사람의 능란한 사회인, 조직자이며 기업가, 곧 CEO가 된 사람이다.

그 악어 같은 얼굴 뒤에 극도로 섬세한 마음이 있어 술자리에서 내가 외우는 이용악(李庸岳)의 '북쪽'을 들으면 마치 그 시 속의 눈 쌓인 북쪽에라도 있는 듯 울적하고 창연(愴然)한 미소를 짓거나 가끔은 눈물바람까지 한다.

"지하!
그거 한번 들려줘! 그거 말이야!
밤에 산에 눈내리는 거! 시말이야!"
술만 마셨다 하면 그 소리고 요즘에는 정릉집 방안에 써붙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시일까.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길
구비구비 돌아간
백무산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산과 산 사이
너를 두고 온 작은 마을에도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이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런 악어 형이 통혁당 때문에 '청맥'(靑脈)의 접수가 물 건너간 뒤, 돈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며 돈벌이에, 기업운영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부도나고 피신이 불가피했다.

겨울 날인데 눈 쌓인 요양원 언덕 위로 찾아와 자기는 지금 부산(釜山)으로 피신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청강(靑江) 선생은 지금 원주에서 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진보적 가톨리시즘 공부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자기가 올라올 때쯤은 퇴원해서 원주에서 만나자고, 만나 새길을 의논하자고 약속하고 부산으로 떠났다.

1962년에서 1964년까지 열렸던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가 2년간 검토한 사회개혁의 메시지와 방법론, 신학적 배경들을 정리한 문건들이 속속 출간되어 원주의 청강 선생이 그 동네 양반들과 함께 공부중이라는 기쁜 소식이었다.

악어 형은 내가 퇴원할 무렵 부산에서 원주로 가 주물공장(鑄物工場)을 경영하던 중 교통사고로 다리를 부러뜨려 내가 찾아갔을 때는 목발을 하고 있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반가워하는 나에게 자신의 처지가 안좋게 보일 듯 해서였는지 신경질로 가득한, 그러나 예의 그 눈물 그렁그렁한 웃음을 웃어댔다.

가톨리시즘과 사회혁명을 결합시키고 신협(信協)이나 점진주의 안에 새 불씨를 지피려는 청강 선생의 구상과 전망에 대해 대체로는 동의하면서도 가톨릭 조직의 '소경동맹'적 위계성(位階性), 일종의 국가주의적 공룡(恐龍)을 대놓고 욕했다.

하기는 악어형 말이 맞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려면 선생님의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톨릭센터 한 작은 방에 선생님과 젊은 그들이 모여 있었다. 10여 명 될까? 책상 위에 당시 교황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공부하고 있었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귀기울여 들으니 텍스트의 착 가라앉은 침착성 뒤에 수많은 논쟁과 토론과 노선 선택의 갈등이 개재한 것 같았고, 그 논리의 여유로움은 2000년 역사와 조직의 방대한 치밀함에 대한 자부심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이것은 새로운 물결이요, 새로운 매혹이었다.

나는 그날 밤 서울로 돌아와 하길종(河吉鍾)에게 편지를 썼다. 아마도 몇해 안에 어떤 큰 변화가 이 반도에 불어닥칠 것 같다고, 그리고 나는 그 물결에 참가하기 위해 언젠가는 시골로 집을 옮길지 모르겠다는, 풋풋한 그리고 서늘한 밤의 유쾌한 잠이 그날 밤 나를 찾아왔다.

아, 이것은 행복인가.
마음의 저 밑, 저 어둑어둑 밑바닥에서 대답이 올라오는 듯했다.
'아직 멀었다.'

그래,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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